시대와 차원을 넘어서, 세상과 세상 사이 어딘가의 틈새공간에 조금 이색적인 회합이 열렸다.


대리석 기둥이 둘러쳐져 경계짓는 새하얀 타일이 깔린 바닥에 레이스가 나폴거리는 화이트 탁상보가 깔린 테이블, 거기에는 찻잔과 다과가 다양하게 세팅되어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포근하고 고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성의 말소리에 이들은 회포를 풀기 시작한다.


"역시, 인형에 인형사하면 구체관절인형이 아니겠어? 적절한 무게감과 양감을 가지면서도 자유롭게 기동이 가능하기까자. 속 안에 다양한 장치를 넣기 공간도 넉넉하고, 내구성도 나름 괜찮고, 옷갈아입히는 재미와 늘여놓았을때 그 공간감이 너무 좋다고."


홍차가 채워진 꽃잎같은 찻잔을 한 입 머금은 소녀는, 너풀거리는 원피스에 살짝 화이트 케이프를 두르고, 레이스로 장식된 머리띠까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서양인형같은 신비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양 손 열 손가락에 모두 낀 반지와 이따금 반짝이는 실들의 존재를 보면, 그녀가 실로 인형들을 조종하는 마리오네트에 능통한 인물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바로 옆에 앉아있던 또 다른 소녀가, 짤깍, 소리나게 찻잔을 내려놓고 이어서 말하기로 했다.


"구관 인형의 양감에는 동의해. 근데 그건 너무 무겁고 또 차갑잖아. 역시 솜을 가득 넣은 봉재인형 특유의 따뜻함이 최고 아니겠어? 커-다란 봉재인형을 잔-뜩 만들어서 힘-껏 껴안았을때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지! 하루 종일도 그 안에 잠겨있을 수 있고! 또 그 품속에서 잠들때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마리오네트 인형사보다는 조금 어린듯한 소녀는, 풍성한 핑크빛 공주님 드레스에 양갈래머리를 귀엽게 묶어 사랑스러움을 강조한 듯 했다. 조금 특이한 것은 공주님은 반지 대신 팔찌 하나만 장식하고 있었는데, 실로 직접 인형을 조종하기 보다는 마력뭉텅이나 염력으로 제어하는 분류인 듯 했다.


"바로 그 차가움이야 말로 인형의 본질이지 않겠나요?"


테이블 반대편의 너풀이는 옷을 입은 청년이 말을 받았다.

많은, 서양식 차람의 인물들과는 다르게, 청년은 동양식으로 여민 가운을 걸쳤는데, 인형사라기에는 흔히들 하는 손에 관련된 장식은 하나도 없이 동그런 귀걸이만 하고 있었다.


"인형은 인간의 형상을 하되, 인간이 아닌 것. 봉재인형은 인간의 형상이라기에는 너무 추상화되어 그저 별개의 물체로만 보일 뿐이죠. 역시 인간의 형상을 따라가려면 정성스럽게 빚어서 가마에 구워 형태를 잡은 도기인형만한게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완벽한 형태에 완벽히 차가운 피부, 도저히 생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더 없이 꼭 맞는 조화이죠. 대리석 조각에 사람들이 환장하는 이유가 있죠. 형태의 완벽함이 갖춰지면,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벌써 배가 부릅니다."


"맞아맞아, 역시 인형은 무생물이라 좋은게 아니겠어?"


이번에는 또 옆에서 쿠키를 집어먹던 여성이 말을 받았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푸른색 작업용 앞치마채로 자리에 앉은게 다소 위화감이 일었지만, 상당히 원판이 반반했던지라 결례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건 옆으로 삐져나와 귓가로 늘어진 몇가닥의 옆머리가 더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생물은 제멋대로에, 쓸데없이 채온도 높아서 덥고, 계속 뭔가를 먹이고 배출하고, 관리가 복잡해! 봉재인형도 먼지쌓이고, 솜도 죽어버리고, 하여간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맘에 안든다고! 인형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내가 모르는건 하나도 없어, 한 땀 한 땀 내가 직접 조각하고 다듬고 오롯이 내가 내리는 명령만 수행 가능하니까! 내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지식들, 내가 입력한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을 상상해봐~ 전혀 생물이 사는 듯 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그거야말로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겠어?"


"그건 좀 별론데?"


앞치마 여성에 이어서, 이번에는 마리오네트 소녀로 발언이 넘어갔다.


"내가 입력한 그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니, 너무 재미 없잖아? 나는 인형이지만 독립된 인격체를 창조하고싶어. 구체관절인형인 채, 내 명령 없이도 스스로 걸어다니고, 정보를 습득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까지. 그렇게 단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백개의 자아를 가진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더 아름답지 않겠어?"


"그러면 활기가 넘치는게 마치 생물같잖아. 그게 좋은거야?"


"생물이 아닌 차가운 피부의 인형들이 생물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다양함을 추구한다. '가짜에게는 진짜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에 진짜보다 더 가치있다'라는 경구가 있듯이, 인형은 확실한 무생물이기에, 생물의 행동을 모방하는 모습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뭐야 너네들... 오로지 인형만으로 이뤄진 도시에서 살고싶은거였어? 인형은 우리 생활의 소품이잖아. 바라보고, 벽을 채워주고, 만지면서 폭신한 촉감을 느끼고, 또 다른 사람이랑 교류하고... 우와... 인형만 돌아다니는 거리라니... 낭만이 없는데..."


"후후후, 낭만이 없기는요? 상상해보세요, 인간이 가득했던 이 거리가 이제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로 가득 차서 끊임없이 움직이는겁니다."


공주님이 질색하던 중, 안경 쓴 소년이 마시던 캔을 내려놓았다. 새까만 바탕색에 초록색 심볼이 인상적인 드링크는 확실히 이 자리에서는 제법 이질적이라 할 만 하다.


"지금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조종과 간섭이 필수적이었죠. 하지만 새 시대가 다가옵니다. 인간은 집에서 쉬면서 지시만 내리면, 인공의 인형체가 인간이 하던 일을 모조리 대체하고, 심지어는 인간과 대화하면서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나아가, 인형 스스로 인형을 만들면 그것은 이미 무생물이라 할 수 없겠죠. 그래요, 인공적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설계된, 무기물로 이뤄진 지적생물이 창조되어 우리 인간의 자손으로써 영원불멸 번영하는겁니다! 인간의 아이가 꼭 유기체야 할 필요는 없죠. 우리의 아이는 무기체로써 시간과 생물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채 이 우주를 가득히 인간의 위업으로 채워나가는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최고의 위업이 아닐까요?"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보쪼가리들만 붙들고 늘어지면 뭐가 좀 되겠습니까? 좀 밖에 나가서 걷고, 사람도 좀 만나고 하세요. 하여간, 책상물림들은..."


감색 세련된 재킷에 풍성한듯, 실용적인듯 과거와 현재의 어중간한 고풍스러움에 줄타기하는 패션을 선보이는 신사는, 테이블에 페도라까지 벗어두고 홍차를 한모금 마시고, 가슴주머니에서 단안경까지 꺼내다 착용했다.


"다들 너무 보이지 않는것에들 집착합니다. 실이니, 마력이니, 전자통신이니... 톱니바퀴와 차분기계, 천공카드의 아름다움, 복잡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매끄럽게 작동하는 기계장치를 바라보고 설계하고 심지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토마톤의 명쾌한 작동방식을 손으로 제작하고, 눈으로 바라보고, 소리로 듣는게 얼마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움직임과 행동은 마치 사람을 연상하나 모든 요소 하나하나에 인간이라고 감정이입할 요소는 전혀 없고, 오롯이 인공물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고있죠. 좀 우리 눈에 보이는 작업들을 해 봅시다."


"으엑.. 기름냄새..."


"진흙은 그래도 구우면 매끈해지는데..."


"딱딱해! 기분나빠! 시끄러워!"


"예쁘지가 않아!"


이후로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