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상태라고 합니다."

"최악의 사태는 면했군. 혹시 외부에 알려진 건 아니겠지?"

의자에 푹 기대고 앉아 있던 김 이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 회사 소속 의료진들 몇 명 외에는 저와 이사님 둘 밖에 모르는 사실입니다. 다행히 가족도 없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 외부에서는 아마 모를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 최 부장 자네가 책임지고 살려내야 하네. 우리 회사의 사활이 달렸어. 원인도 꼭 밝혀내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님.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최 부장은 이사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인상을 썼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상현실게임을 만든 회사다.


기존의 컴퓨터나 콘솔로 할 수 있는 게임과 달리 현실감도 뛰어나서 재미도 있고 최소 수백만원씩은 하는 캡슐을 구매해야 할 수 있는 가상현실게임 특성상 대기업 중에서도 매출이 잘 나오기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처음으로 캡슐을 사용하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생긴 것이다.


"큰일이네 허참. 어이, 김 과장, 이리 좀 와 봐."

자기 자리로 돌아온 최 부장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최 부장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김 과장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캡슐 쓰다가 혼수상태 빠진 사람 알지? 그 사람 자료 좀 줘보게. 대체 뭐 하다 그런 사고가 났는지 좀 봐야겠어."

"네, 여기 있습니다."


김 과장이 건네준 자료를 받아든 최 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당 게이머의 이름은 정시현, 닉네임은 루치에, 나이는 29세였다.


"게임을 대체 몇 시간이나 하는 거야? 하루 평균 17.5시간? 미쳤군. 이러니까 그런 사고가 생기지, 씁."


그 말을 들은 김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장님, 뒷장도 한번 봐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최 부장이 자료를 넘기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중증근무력증 환자라…… 흠, 이러면 뭐라 할 수도 없겠어. 잠깐, 그럼 캡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다 보니, 별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쩝, 그나마 다행인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봐야겠어."


최 부장은 게임을 총괄할 뿐 플레이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루치에라는 사람은 게이머 사이에서 유명한 플레이어였다.

랭킹 1위 힐러인 데다 힐러 중에서 유일하게 '성녀'라는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였으니까.
물론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지만.


***


서나라 황제가 대군을 일으켜 남쪽으로 출정했다.


그때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황궁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수많은 자객들이 궁으로 침입해서 보이는 사람마다 무참히 도륙하기 시작했다.


궁에 있던 여종 몇이 아기를 데리고 도망쳤다. 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인 만큼 여종들도 무공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을 뽑았기에 힘을 합쳐 포위를 뚫고 나왔다. 그러나 팽성 밖으로 도주하려는 길에 자객들에게 곧 추격당하기 시작했다.


여종들이 모두 죽고 한 명만이 남아 팽성 남쪽의 사수까지 도망쳐오자 어디선가 일단의 검수 무리가 나타나 여종을 둘러쌌다.


"창궁검대다!"


검수들은 푸른 옷을 입고 있어 옷이 달빛에 비쳐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었다.

그 순간 자객들의 머릿속에는 남궁 세가의 가주, 창천검 남궁천이 황제와 절친한 사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창궁검대는 천하제일가로 일컬어지는 남궁세가의 정예들 답게 순식간에 자객들을 도륙했다.


그때 창궁검대를 이끌고 온 남궁세가 장로, 남궁도는 겨우 살아남은 여종이 안고 있던 보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으시군."

그 말을 들은 여종이 비통하다는 듯이 눈물을 흘렸다. 여러 식구들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시게. 하늘의 자손께서 일이 이렇게 될줄 어찌 몰랐겠는가?"

남궁도는 여종에게서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는 아주 어여쁘게 생긴 아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슬픈 마음에 탄식했다.

"역시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어."


그러더니 난데없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늘의 자손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자객들을 정리하고 대오를 맞춰 대기하고 있던 검수들은 갑자기 들려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말에 경악했다.


하늘의 자손이란 중원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수백 년에 한 번씩 내려와 인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내려와서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였다.
하늘의 자손은 이 혼란스럽고 힘든 하계를 돌보기 위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천부적인 무도적 자질과 지혜까지 타고난다고 한다. 물론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실제로 하늘의 자손이라 추정되는 몇몇 사람들이 하계에 평화를 가져다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강보에 싸인 아기가, 하늘의 자손이라고?

남궁도는 미친 사람처럼 오른손으로 주먹을 쥔 채 몇 번이고 외쳤다.


"하늘의 자손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늘의 자손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


서나라 중앙에 있는 팽성은 풍요로운 도시다.

그렇지만 운이 없게도 이전 왕조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킨 바가 있어서 수도의 지위를 빼앗겼다.

그래서 정치, 문화의 중심지 지위는 서쪽에 위치한 새 수도인 신정에 빼앗기긴 했어도 기름진 땅에서 나는 각종 물산들로 경제의 중심지 지위는 굳건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천하제일가인 남궁세가로서는 수도가 옮겨간 것이 호재였다.

황실의 영향력이 팽성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황실 입장에서도 수도에 천하제일세가가 있다는 점이 불만이었으니 천도는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다.


어느 화창한 날.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세가 옆문 돌계단 앞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겨우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중이었다.

주위 아이들과는 명백히 다른 아름다운 은발에 대가가 그려낸 듯한 눈썹과 특히 생기로 가득 차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예쁘장한 아이는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지만 말투는 어른스러워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오늘 내가 해줄 이야기는……."


그때 여종들이 서녀 아가씨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또 어딜 가신 거예요?"


남궁연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더니 모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는 돌계단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한번 털고 얼른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시현이 이 세계에 온 지 딱 5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어느 미지의 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자신이 기억하는 중세의 중국과 비슷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많이 달랐다.

게다가 하던 게임의 캐릭터로 다른 세상에 와버린 것이다.


어느 날 여종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나서야 자신이 남궁세가 가주의 서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수년에 걸쳐 시현은 자신의 신분에 점차 적응해 갔다.

비록 여자아이로 다시 태어났기에 생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해야 했지만 만약 성인의 몸에 빙의했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현은 이전 생에 중증근무력증 환자였기 때문에 병상에 오랫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고 조금 움직이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여자가 된 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세가 사람들도 그가 서녀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라 할 만한 상대가 없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세가 사람들에게 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며, 줄은 뒤 부활했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항상 평범한 아이들과 어울렸다. 아니 정확히는 이전 세상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이전 세상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만, 시현이 생각하기에 이 세계는 무언가 이상했다.
중세에 걸맞지 않게 유리창이 있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빙의물이나 이세계물의 치트키 중 하나인 비누 같은 물건을 이미 사람들이 널리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시현은 갑자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세가 사람들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정 이낭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었다는 대답같지도 않은 말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설마 어머니도 빙의자인 건가?'


사실 시현은 중요한 일은 어린 아기일 때 일어난 일까지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궁도가 자신을 안고서 미친 듯이 하늘의 자손이라고 외치던 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자손은 어머니이고, 자신은 어머니가 하계를 버리지 않은 증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없겠지만 중환자였던 시현은 다시 태어나게 해준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종교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고민까지 하기도 했다.


'굳이 하던 게임 캐릭터로 태어나게 만들었으니 그런 걸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 그럼 게임 설정에 맞춰서 여신교라도 만들면 되려나? 그런데 여긴 중원 세계관 같단 말이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시현이 문득 이전 생의 가족 생각이 났다.

하루종일 병원에 누워만 있다가 떠난 아들이었으니까.


'죽은 거 맞겠지?'


사실 시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게임을 하다가 정신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에 있었지만 죽었는지 어땠는지까지는 기억에 없었으니까.


이전 삶의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나 지금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고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들은 잘 살고 있으니 그만 보내주라고 말이다.


***


"아가씨! 위험합니다! 얼른 내려오세요! 제발요!"


남궁연은 작은 동산 꼭대기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여종들이 보기에는 어린 아이가 세상을 다 살았다는 듯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웃는 모습이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어서 내려오라고 보챘다.


한참 세상을 내려다보던 남궁연은 여종들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더니 순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나무 한 번 오른 거 가지고 호들갑은. 내가 한 번이라도 떨어진 적 있어?"


평생 누워만 있던 사람이 사지 멀쩡하게 다시 태어났으니 조금이
라도 더 움직이고 싶어했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하인들이나 같은 세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주님의 서녀 아가씨께서는 참으로 말괄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물론 너무 어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미 어른스러운 말투에 익숙해진 여종들은 놀라지 않고 집으로 아가씨를 모시고 와 먼저 몸을 씻겼다.


여종들이 몸을 씻겨주는 동안 남궁연은 생각에 잠겼다.

생김새로 봐서는 하던 게임 캐릭터인 채로 다시 태어난 게 맞는 것 같은데, 게임처럼 상태창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쓰던 스킬을 쓸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뭐 이 정도면 된 건가.'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은 차원의 틈새에 날아가 버렸는지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이 세상은 세상의 중심이 몇백년 전 중국과 비슷했고 어릴 적 읽은 무협지에서 본 듯한 세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오히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천하제일가인 남궁세가의 일원인 만큼 무공이랄까, 이능력은 당연히 있는 게 오히려 더 말이 되기도 하고, 하늘의 자손의 딸이라는 두 번째 신분도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남궁연은 자연스럽게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샘솟았다.

어쩌면 이 세상의 기술 수준에 걸맞지 않는 문물들에 어머니의 임김이 닿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미크로네시아 일대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특이한 종교가 있는데, 비행기를 신으로 삼는 화물 신앙이라는 종교가 있다고 한다.

현대 문물이 낳은 '화물'들을 가져다주는 비행기를 보고 어떠한 신적인 존재가 가져다주는 신기한 물건이라 생각해 비행기를 만들어 그들을 다시 불러내려는 종교인데, 아마 이런 이유로 어머니를 '하늘의 자손'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남궁연이 생각에 빠진 동안 여종들이 몸을 깨끗이 씻기고 몸을 닦아주었다.


가주님의 서녀 아가씨에게는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무엇을 하더라도 짜증을 내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몸을 씻거나 낮잠을 재울 때 떼를 쓰거나 잠에 들지 않으려고 용을 써본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궁연은 전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번 잠든 뒤로 중간에 깨어난 적도 없었다.


몸을 씻은 남궁연은 세가의 가모이자 적모인 이씨와 식사를 하러 처소에 들렀다.


"언니, 어디 갔다 이제 와?"


처소로 들어가자 이씨 부인과 그녀의 딸이 남궁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씨 부인은 올해 스물하나로, 선이 가늘고 얼굴이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복숭아빛 치마에 하늘색 배자를 걸쳐 새하얀 얼굴과 조화로워 보였다.

이씨 옆에는 어린 아이가 앉아 있었다. 얼굴이 살짝 노랗게 떴고 몸도 살짝 말라서 몸이 약해 보였다.


남궁연은 이씨를 볼 때마다 전생 생각이 났다.

스물하나면 전생이었다면 이제 한창 대학교를 다닐 나이인데 딸이 벌써 네 살이니까, 대체 언제 결혼을 한 거지?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젊다기보다는 어린 유부녀라는 말이 더 적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궁연은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이씨에게도 그런 기색이 읽혔다.

저 아이는 나를 볼때마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예아 때문인가? 아무래도 예아를 그렇게 좋아하나 보다.

아니라면, 정 이낭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냥, 뒷산에 가서 팽성 구경이나 좀 하고 왔지."


남궁연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는 가주인 남궁천의 적녀인 남궁예로 그녀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세가의 다른 아이들처럼 무공 수련은 커녕 몸을 요양하기 바빴다.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모양인지 온갖 영약을 먹고 있는데도 좀처럼 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궁연은 안쓰러운 마음에 남궁예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약은 먹었어?"

"웅."

"잘했어."


남궁연이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 약 잘 먹었으니까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

"무슨 이야기 해 줄까?"

"행복한 왕자!"

"알았어."


남궁연은 이복 여동생의 병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게임 내의 스킬이 현실 세상에서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치료해줄 수가 없었다.

직업히 힐러였던 만큼 당연히 저 정도의 병은 고쳐줄 수 있었고, 죽은 사람이라도 사후 사흘 이상 지난 게 아니라면 되살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실제로 스킬을 발동했을 때 어떻게 될 지 몰라 쓰지 못했을 뿐이었다.


남궁연과 남궁예는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남궁연은 자기가 엄마라도 되는 듯이 행동했고, 아픈 남궁예를 아껴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세가 사람들이 보기에 이복 자매인데도 보기 드물게 사이가 좋아 보였다.

일반적인 무림세가라면 적통과 방계 간의 대접은 하늘과 땅 차이라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모인 이 씨도 딸과 친하게 지내는 남궁연이 밉지 않았다.


만약, 남궁연이 서녀가 아니라 서자였다면 사이좋게 지내기는 힘들었겠지만 어차피 여인은 가주가 될 수 없었기에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었던데다 저렇게 딸을 잘 보살펴주니 마음에 쏙 들었다.


식사를 마친 남궁예가 남궁연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시현은 잠이 든 남궁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든 와중에도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미소짓는 것이 재미난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시현이 여종들에게 남궁예를 처소로 데려가게 한 다음 주위 여종들을 물리고 이씨에게 말했다.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현이 이씨 앞으로 다가오더니 신비로운 하얀 빛을 발하는 석상을 건넸다.
"예아의 몸상태가 다시 나빠질 때, 이 석상을 잡고 내력을 주입하시고 마음 속으로 저를 부르십시오."

시현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씨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다. 연아 너는 예아를 진작에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그럴 마음이 들었는지 물어도 되겠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란다. 원망할 생각은 없으니 편하게 말해보렴."

그 말을 들은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로는 원망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친어머니 처지에서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전부 내 업보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한 시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랬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허송세월했다고 후회하거나 이룬 게 없다고 나중에 부끄러워하긴 싫으니까요. 그래서 제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요. 저도 어머니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겪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친모가 돌아가신 것까지도요.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에는 어떠한 거룩하고 위대한 뜻이 있을 것이다."

잠깐 말을 멈춘 시현이 옆에 놓여 있던 차로 목을 축였다.

"어린아이다운 발상이지요. 그러나 제 친모께서는 그냥 행복하게 살라는 말만 남기셨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고 성공하지는 못했더라도 열심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던 이씨가 떨리는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는 행복한 삶이라는 게 무어니?"
"천하 백성이 행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행복하고 걱정 없이 잘 사는 것입니다."

중원은 지금 네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쪽의 대연, 서쪽의 대촉, 남쪽의 대송, 그리고 중원 한복판의 대서.
천하 백성이라 하면 다른 나라들의 백성들까지 아끼는 마음이 든 걸까?
이씨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걸 보지 못했는지 시현이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누구든 치료할 수는 있지만 제 치료를 받게 되면 아마도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씨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남궁연이 남궁예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저렇게 병약해서야 네가 치료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무공을 배우기에는 그른 몸이니."

그건 아닙니다, 하고 시현이 이씨의 말을 끊었다.
"내공을 못 쌓을 뿐이지, 무공은 익힐 수 있습니다. 다만 저를 마음 속으로 모셔야 합니다. 소림의 부처나 도가의 원시천존처럼 말이지요. 제가 예아가 걸어야 할 무도의 길의 조사가 되는 셈이지요. 저를 향한 마음이 갸륵할수록 내공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힘이 생길 것입니다. 저는 이 힘을 신성력이라 부릅니다."

이씨가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는 사이에 시현이 말했다.
"그럼, 어머님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연무장에 가봐야겠네요.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하고 시현이 처소를 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이씨가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씨 처소를 나서던 시현의 가슴에 별안간 신비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분명히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데도 처소 안의 이씨 부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듯이.
신앙의 끈이었다.



저번에 쓴 거에 좀 더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