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대던 사샤는 불현듯 위화감을 느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총성에 덮여 자신의 비명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자기 목에서 나온 괴성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왜 자신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인가?

 사샤는 공포에 덮여 어두워 졌던 시선을 바로잡아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자신의 앞에는 피에 젖은 이반 하사가 쓰러져 있었고,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독일 병사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상황이 바뀐 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이반도, 독일 병사도, 그리고 자신의 코 앞에서 멈춘 총알과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도.

 사샤는 소스라치게 놀라 이반의 시체를 떨어 내고서는 참호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참호 저 편에는 이제서야 살육을 시작한 듯 총검을 높이치켜든 독일군이 있었고, 근처에는 방금 자신이 그랬듯이 공포에 질려 총을 앞으로 내밀뿐인 참호 속의 러시아군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교과서에서 전쟁을 묘사한 삽화를 보는 듯했다. 사샤는 고지 맨 위에서 멍하니 그 전장의 살풍경을 바라 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정적에 방금까지 총을 쏘던 살풍경과는 다른 공포가 올라왔다. 성호를 그어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는 찰나,


“거기, 기다려요! 거기서 움직이지 마세요!”


 몇 달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사샤는 등 뒤에서 들려 오는 그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듣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음색 자체는 아름다운 편이었다. 다만, 그것이 모르는 언어로 된 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말뜻을 자신이 알아 들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들려 온 소리임에도, 그 뜻은 정확하게 사샤의 뇌리에 꽂혔다. 사샤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온통 독일군의 군복으로 뒤덮여 칙칙한 녹색이 되어 버린 고지 위에, 검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움직임이 불분명했다.무언가 새까만 것에 가려 사지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고, 옆에는 길고 흰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샤와 여자로 추정되는 저 자 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더 추정할 필요는 없었다. 사샤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반문하였다.


“나 말인가?”


“그래요, 제가 곧  갈테니까,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면 안되요. 알았죠?”


 방금도 사샤 본인은 분명 러시아말로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알 수 없는 언어였다. 사샤의 턱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온 몸을 휘감는 섬찟함에 그 자리에 못박힌 채 올라오는 검은 여자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샤가 있는 곳은 고지의 꼭대기였다.


“잠깐, 헥. 기다려요. 어우, 왜 이렇게 높아, 여긴?!”


 사샤는 자신의 가슴을 어둑어둑하게 덮고 있던 여러가지가 걷히는 느낌을 들었다. 전장의 비정함, 죽음의 공포, 그리고 방금 들었던 언어의 괴리감에서 느꼈던 섬찟함 등등. 대신 그 자리는 어이없음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와 그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빨리 움직이면 10초정도면 걸어 올라올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가다가 멈추어 몇 초간 쉬다, 가다가 중간에 멈추고를 반복하였다. 흡사 암벽을 등반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사샤는 불평이 섞이고 힘이 빠져가는 목소리의 주인을 측은하게 바라 보았다.

 거리가 가까워 짐에 따라 사샤는 지금 올라오는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 보았던 검은 형상은 그녀가 두르고 있던 망토였다. 머리를 덮는 후드가 달려 있고, 거의 사람 하나를 그대로 덮을 정도의 길이였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용물이었다. 오르막을 올라오며 벌어진 망토는 그 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있었다. 그녀는 망토 아래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단지 속옷이 있어야 할 자리를 붕대로 조여매고 있을 뿐이었다. 사샤는 헐떡이며 올라오는 저 아가씨의 의복 상태가 어떤지 파악하자 마자,눈을 둘 곳을 찾아 헤맸다. 결국 그는 올라올 때까지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희끄무레했다.

 차도 한 잔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검은여자는 사샤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손발의 움직임이 없어지자 그제서야 그녀를 덮은 망토가 제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사샤는 그제서야 미심쩍은 눈길로나마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되었다. 그의 마음 한 켠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지나갔다. 그녀는 분명히 가만히 있으면 단아한 아름다움이 자리잡은, 러시아에서는 보기 힘든 동양형 얼굴의 미인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고산준령을 넘는 동안 썩을 대로 썩은 그녀의 표정은 그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은 숨이 달려서 창백해진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눕고 싶다라는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분명히 그 뒤에 무언가를 더 이야기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흡이 따라주지 않는 듯 했다. 한 두 번정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야,여자는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사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