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왕이었다.


그의 기념비적인 첫 일생은, 서쪽으론 자국의 왕과 왕가의 본거지를 잃은 나라와 적대하였고, 북쪽으로는 땅을 잃은 나라와 적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왕을 잃은 나라와 혈맹인 나라와 적대하는 사면초가의 나라의 군주로서 시작했다.


서쪽으로 더 멀리 가 천하에서 가장 큰 나라의 힘을 빌려 왕을 잃은 서쪽 나라를 멸하고 땅을 잃은 북쪽 나라를 멸하였고, 다시 그들을 집어삼키려 든 가장 큰 나라까지 무찔렀다.


그렇게, 일국의 군주로써 크나큰 치적을 남긴 그는, 후회없이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뜨니, 이번엔 전생에 그가 무너뜨린 북쪽 나라의 유민으로 환생했다. 


호화롭던 이전의 삶을 잃고, 노예로써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은 고되었으나, 결국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되었다.


그러던 중, 가장 큰 나라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이 반역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 무너진 북쪽 나라의 유민들은 그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여 다시 그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왕은 북쪽 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된 노예 생활로 망한 북쪽 나라 유민의 설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오, 둘째로는 이들에게 나라를 만들어 주어, 다시는 망국의 설움을 겪게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험난한 길을 가며, 큰 나라의 추격군에 그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아버지를 잃었고,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으니, 지금은 추격군과 싸워 최후의 일전을 치를 때였다. 험준한 하늘의 문 고개로 추격군을 유인해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지며 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였다.


마침내 그들을 몰아내니, 마침내 나라를 세울 만한 땅에 당도하였다. 사슴과 돼지를 잘 돌볼 수 있고, 땅도 기름지며, 지형은 험준하였으니 마땅히 일국의 도읍으로 삼을 만한 땅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렇게 새로 건국돤 북쪽 나라의 시조로써 기틀을 다져 가던 왕은, 결국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무(武)가 담대한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준 후에 세상을 떠났다. 후회없이 떠난 지난 생과는 달리, 저 담대한 아이가 과연 어찌 될까 하는 그런 근심 속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그의 전전생의 조국이었던 곳에서, 해상 무역을 담당하는 이의 아들로써 환생하게 되었다. 집안이 부유하고 융성하였기에 노예로 시작한 지난 삶보다는 나은 시작이었으나, 수십여 년간 이곳에서, 그리고 더 북쪽 땅에서 군주로 살았던 것이 갑자기 신하가 되니 역시 적응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런 고민은 사소하게 여겨질 만큼 더없이 끔찍한 난세였다. 하다못해 두 번째 생에서 그가 싸웠던 그 장소나, 바로 전전생에서 3국이 엉켜 싸웠던 반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난세였다.


나라 곳곳에서 도적이 들고 일어나고, 중앙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방의 귀족들은 서로 쟁투를 벌이며 다시금 이 땅을 통일하고자 하는데도 그의 옛 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중앙의 보위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정적을 죽이기 위해 서로 다투고 싸우는 중앙의 귀족과 통일 직후의 강력한 권위를 잃어버린 무능력한 왕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더는 아니되었다. 그의 옛 조국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바로 그가 그리 만들 것이었다. 이 나라를 통일해, 이 난세를 끝내고, 그가 첫 번째 생에 그리했던 것처럼, 다시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을 배불리 살찌우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장대한 포부와는 별개로, 그의 가문의 힘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큰 세력 둘이 맡불을 때 어느 한 편을 들면 다른 편이 불리해지는 정도의 힘은 있었으나, 큰 세력과 정면으로 맡붙을 정도의 강한 힘은 없었다.


그러던 중 이번 생의 왕의 아비는 세력이 큰 애꾸눈 스님에게 귀부를 하였는데, 그 스님은 비록 애꾸였으나 무언가 귀한 자인 듯한 풍채를 풍겼고, 베짱이 두둑하고 그릇도 커 가히 이 땅을 통일할 그릇이었다. 


왕실의 서자였으나, 왕후가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고, 그나마 유모에 의해 살아남아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간다 했다. 애꾸가 된 것은 그를 받던 유모가 실수로 그의 한쪽 눈을 찔러 그 눈이 실명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 애꾸눈 스님에게 귀부한 덕에 왕은 스님의 세력 내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여러 전공을 세우며 마침내 2인자인 시중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왕이 내리는 관직이었던 자리에 왕이 오르게 되었으니, 참 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즈음 그의 주군인 애꾸눈 스님은 미쳐가고 있었다.


자신이 구원자의 환생이라며 스스로 경전을 써 불교를 적으로 돌리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수 있다며 여러 신하를 반역했다며 목을 베어 죽였다. 급기야는 자신의 왕후가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며 끔찍한 방식으로 죽이고, 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까지 죽여버렸다.


자신의 주군이 미쳐가는 꼴을 보는 것운, 정말 그가 겪어본 그 어떤 고통보다도 압도적으로 끔찍했다. 총명했던 주군은 점점 탐욕과 망상으로 눈이 가려진 어리석은 암군으로 변했고,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겸손하였던 주군은, 점차 병사는 커녕 장수들과 만나지고 않게 되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마침내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왕을 향했다.


왕은 주군에게 자신은 불순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며, 주군은 자신의 마음을 알지 않냐며 거의 울다시피 했다.


그리고, 주군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뒤로 돌아섰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때 누군가가 붓을 떨어뜨리더니 인정하라고 조언했다.


하지 않을 것을 하였다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으나, 드디어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 말하자 주군은 기쁘게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예전에 보여주었던, 밝고 순수한 선인의 미소는 아니었다. 교만에 빠진 타락한 암군의 비열한 웃음이었다.


더는 그를 이 나라의 임금으로 둘 수 없었다. 더 이상 이 교만한 자는 통일을 이룩하고 백성을 보살필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젠 그가 나서서 다시 통일을 이룩하고, 백성을 보살피겠다고 선언했다.


한번 결단이 서자, 이제 민심은 왕에게 넘어왔다. 교만한 중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주하였으나, 보리 이삭을 베어먹던 중 농민들에게 죽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왕이 되었다. 새 나라의 이름을 첫 번째 생의 북쪽 나라의 이름으로 고치고, 다시금 통일을 이룩하고자 나아갔다. 이번엔 북쪽 나라의 통일이지만.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그의 옛 조국을 평화적으로 흡수하고, 그의 오랜 호적수를 무너뜨려, 마침내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번에는 그의 두 번째 생의 나라의 유민까지 받아들인, 첫 번째 생의 반쪽짜리 통일이 아닌 진정한 의미로써의 통일이었다. 


끔찍한 전쟁이 끝났으니, 이젠 전후 관계였다. 통일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방의 수많은 크고작은 귀족들과 정략혼을 해서, 다음 후계자의 입지가 불안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백성을 잘 돌보려면, 내전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그의 가장 신임하는 신하들을 동궁의 후견인으로 붙이고, 전쟁 동안에는 동궁과 같이 전쟁에 나가 동궁의 입지를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했음에도 동궁의 후계자로써의 위치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신히 평행을 유지한 것이었고, 심하면 여전히 부족한 것이었다.


핵심적인 것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럼, 이 나라가 정말로 공중분해되어 버릴 테니까. 그걸 알았기에, 왕은 결코 핵심을 찌를 수도, 그렇다고 동궁을 안정시키지도 못 하며 다시금 근심 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번에 왕은, 바로 세 번째 생의 나라에서 공신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못생긴 얼굴은 더없이 부끄러웠으나, 지난 생에서 동궁의 지위를 확립해주지 못한 것만 하겠냐며 애써 달랬다.


35세에 시험을 보아 장원급제하였으나, 60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이부상서에 오를 만큼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던 중, 다시 그들이 왔다. 


왕의 두 번째 생에서의 나라를 멸망시킨, 그 가증스러운 적들 말이다.


왕은 세 번째 삶에서도 그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삼켰는데, 이제 그 가증스러운 적들은 왕이 세 번째로 세운 나라까지 무너뜨리려 한다.


두 번째로 그가 세운 나라는 지키지 못했으나, 세 번째로 세운 나라는 반드시 지킬 것이다.


두 번째로 세운 나라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손자가, 결코 망국의 임금으로 기록되게끔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