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칭 주인공 시점.]
어릴 적 나는 사고 뭉치였어.
한번 눈에 띤 건 무조건 만져보거나 아니면 입에 갖다 댈 정도로 궁금중이 많았던 난 어릴 적부터 엄마한테 혼나는 게 일수였지.
우리 가족은 썩 잘사는 쪽은 아니었어.
부모님 둘 모두가 바쁘셨고 어머니는 늘 저녁 늦게 오시거나 아버지는 주말에 들어올까 말까 한 수준 이였으니까.
그러던 도중 외할머니께서 오셔서 우리 형제들을 돌봐 주시기 생각했는데 그 때 기억이 참 오래가더라.
대다수의 할머니들이 손녀, 손주들을 아끼시고 어리광도 잘 받아주지만.
우리 외할머니는 그런 모습을 거의 보여주시지 않았어.
늘 쉰 목소리로 나랑 형을 호통치거나 야단치기 일수였지.
외할머니는 엄한 사람이셨어.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하시고 늘 자제하고 선을 지킬 주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지.
몸에 좋은 약이 쓴 것처럼 외할머니는 어린 나에게는 아주 쓴 약을 주는 약사 같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어렸을 적 외할머니와 보냈던 시간 중 대부분이 혼난 기억 밖에 없는 것 같아.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이들이 있는 것 같더라.
쓰기만 했던 약 같은 기억들 중 가끔은 그때의 단 사탕 같은 추억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더라.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난 받아쓰기를 잘 못했어.
지금도 받아쓰기 시험을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난 뒤 채점 하는 과정에서 반 애들끼리 바꿔서 맞추고 그랬어.
근데 앞서 말한 것처럼 난 받아쓰기를 잘 못해서 늘 시험지에 소나기가 내리는 게 일수였지.
난 외우는 게 서툴렀고 연필을 잡는 방법이나 글씨체도 엉망진창 이였고 그걸로 놀리는 애들 때문에 자존심도 많이 떨어졌던 적이 많았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가방에 분 풀이 하듯 쑤셔 넣은 찌그러진 시험지를 보신 외할머니가 거실에 있던 나를 불렀어.
손에 쥐고 계신 시험지를 본 순간 난 죽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외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어.
방에 들어오자 방 안에는 책상이랑 받아쓰기 표랑 여러가지 책이 있었어.
"오늘부터 하루 10번 표에 있는 거 쓰고 외울 거다. 나도 같이 옆에서 공부 할 거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난 억지로 할머니와 같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하기 싫다며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 때마다 날 붙잡고서 외우게 시키는 외할머니 탓에 반정도 포기한 채 시키는 대로 공부했지.
할머니는 늘 날 붙잡고 내 곁에서 공부했는데.
그게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집중이 더 되고 모르는 걸 물어보기에 편했지.
그리고
"니 글 꼬라지가 그게 뭐냐, 다시 써."
마치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내 글씨도 할머니의 끊임없는 지적에 점점 직선처럼 올곧게 쓰여지기 시작했어.
그 덕분일까?
몇 일 안돼서 20개의 받아쓰기 문장들 중 7~8개만 틀리게 됐어.
남들이 보기에는 별일조차, 아니면 이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그때의 내게 느꼈던 건 단순하게도 그냥 기쁨 이였어.
'늘 3~4개만 맞았던 내가 이제는 이 정도나 맞출 수 있다니.'
만점만 받는 애들이 보기에는 그냥 썡쇼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가 느끼는 이 느낌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시험지에 내리는 비 줄기가 약해질수록 맑아지는 하늘 마냥 풀어지시는 할머니의 표정은 내 기분도 맑아지게 했지.
그리고 한번은 내가 만점을 받아왔을 때.
할머니는 날 꼭 안아주시며 날 칭찬해주셨어.
'잘 했다. 내 새끼."
그냥 칭찬 한번 밖에 안 해주셨지만 그래도 그 칭찬이 난 그때의 나에게는 큰 선물 이였던 것 같아.
그 이후로도 내가 만점을 받아 올 때마다 외할머니는 내 칭찬을 잊지 않고 해주셨지.
쓴 기억들 속에서 이 추억 만큼은 앞으로도 잊혀지진 않을 것 같아.
난 아직도 내가 다 큰 건지는 잘 모르겠어.
내 마음은 아직도 여리고 상처 입기도 쉽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 같으니까.
하지만 큰 나를 안으실 때 마다 이제는 두 팔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날 할머니는 다 컸다면서 다독여주셨어.
이제는 만날 수도 없게 되었지만.
만약 만날 수 있다면 말하고 싶어.
어른이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