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드디어 일어났네?"


내가 드디어 미쳤나보다.

자취하고 있는 내 방의 의자에 한 미소녀가 앉아 있는걸 봤기 때문이다.


".....?"

"뭐야 재미없네. 반응 좀 해봐."


잠이 덜깼는가. 하지만 아직도 잠에 취했는데도 이렇게 생각을 진행시킬 수 있는 걸까?

우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미소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따뜻한데?


"...저.. 저기.. 대담하네?"


미소녀는 부끄러워 하는 듯 하면서도 빼지는 않았다. 환상도 뭐도 아니다. 진짜다.

나는 기겁하면서 몸을 뒤로 물렀다.


"누구세요?"

"아.. 그냥 반응이 한템포 느린거였구나."


미소녀는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는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꼬고는 아주 자기 집인 것처럼 나를 꼬라봤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었나? A 군."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맹세코 이 미소녀를 만난적은 없었다.


"누구냐니까 너. 이거 불법침입인건 알고 있어?"

"아, 신고하려면 신고해보든가."


뭐지 이 당당함은?


"근데 A군 한테는 이 상황 좋지 않아?"


그러면서 우쭐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래. 예쁘다. 미소녀이기는 하다. 하지만, 독버섯 같이 화려한 것은 잘못 집어 먹으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덥썩 집어 먹을 수는 없었다.


"됐어. 얼른 내 집에서 나가."

"니 집인가? 집주인은 따로 있잖아?"

"아니 긁지 말고 나가라고!"

"아, 긁을 생각은 없었는데."


짜증났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까지 불쾌하지는 않은 것을 보니, 이게 예쁘면 용서된다는 그거인 모양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나 좀 해보자.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서."

"뭔 이야기를 해? 범죄자랑 이야기 할 건 없어."

"내가 범죄자면 너도 범죄자겠네?"

"불법침입한 건 그쪽이라고. 내가 아니라."

"부모님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한 거라도 범죄라고 하면 범죄일 수 있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찌르듯이 훅 들어오는 여자의 말에 나는 여자를 보았다. 싱글생글 웃고 있었다.


"뭔 말이야?"

"초등학생때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을 사고 싶어서 부모님의 지갑에서 지폐를 빼쓴 적 있잖아?"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런 일 없어."

"단풍잎 딱지 바위 골렘 에디션 아니었나?"

"....."


아주 구체적인 상품 이름을 들으니 불현듯 떠올랐다. 생긴 것도 기억이 났다.


"그건...."

"그리고 그렇게 손에 얻은 딱지로 친구들과 놀다가, 형들에게 삥뜯겼지? 그치? 2살 이상 많은 형들이었지."


맞다. 그랬었다.


"...너 누구야? 뭐하는 인간이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더 중요한건 말이지. 당신은 아직도 그런 것들을 삼키고 있다는 거지."


여자는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했다.


"그 때 그 아이와 함께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번호를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 때 그 과를 선택했으면 좋았을 텐데.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어때. 기억나지?"


여자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비단같은 흑발이 스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건데?"

"딱히? 말을 듣고 싶은게 아냐. 그냥. 털어놓으라는거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달라지지 않지."

"그럼 뭐하러 해?"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됐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폰을 들었다. 신고할 생각이었다. 이런 헛소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가 내가 든 폰을 뺏었다.


"야!"

"후회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여자는 폰을 뒤로 숨겼다. 내가 그것을 되찾으려고 하자 여자는 내 몸을 밀어냈다. 여자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쌨다.

어떻게 하면 힘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저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후회할까봐 더 이상 아무것도 안하는 건 제일 나쁘지."


나는 낑낑대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여자는 여유만만이었다. 마치 힘조절을 해서 내 힘에 딱 맞추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힘이 빠져서 힘으로 되찾으려는 시도는 포기했다.


"에휴, 평소에 운동도 좀 해야지 안그래? 매번 생각만 하고."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참, 개같은 일이었다.


"A군. 생각을 해보렴. 네게도 기회는 있었지? 남들보다 잘나진 않았어도 그래도 비슷한 팔자였을거야."


알고 있다. 환경탓이 아니다. 내 능력탓도 아니다. 그저, 조금만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저 포기했기 때문에. 순전히 모두 내 탓이라고 받아들이고 삼켰을 뿐이었다.


"아주 기초적인거지? 삶의 목표 같은 거창한게 아니더라도, 잘먹고 잘살고 싶다는 건 본능이잖아?"


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표정으로 네까짓게 그래봐야 뭘 할 수 있냐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걸 포기하는 건 결여되어 있는 거지. 아,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건 아니야.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있거든?"


여자는 내 얼굴에 손을 댔다. 여자의 온기.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결여 되어 있다고 포기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건, 생물의 의무를 포기했다고 볼 수 있는거지. 그렇지?"

"나도 하려고 했다고!"

"아 네이네이. 그러셨겠죠."


여자는 비아냥댔다. 화가났다. 여자에게 들이박아 보지만, 여자는 가볍게 다시 나를 돌려놓았다.


"소용없어. 화풀이를 하고 싶거든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디지털 소녀들에게나 하렴?"

"네가 뭔데 잘난척인데? 어?"


나는 제압당한 상태로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발버둥칠 수 있잖아."


그 모습이, 여자에겐 퍽이나 마음에 들은 모양이었다. 흡족하게 웃어보였다.


"그게 올바른 삶의 모습이지. 그렇게 사는 사람더러 모두들 뭐라고 하는지 아니?"


여자가 얼굴을 가까이 한다. 여자는, 참 숨막히게도 예뻤다. 티 하나 없는 피부, 찰랑거리며 옅은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 누군가 이상적인 여성을 직접 만들어놓은 듯한 만듦새.


"야 너 참 열심히 살았구나. 라고 박수를 쳐준다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예뻐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삶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기는 하지. 인간이니까 선택할 수 있는 거기도 하고."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돌린 내 얼굴을 잡고 다시 돌렸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동정은 줄 수 있겠지만 박수를 쳐줄까? 혀를 차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남들이 무슨 상관인데!"


나는 여자의 팔을 쳐냈다. 여자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자기만 만족한다면야 남들 시선이 어떻든 상관 없지. 그렇지만, 보편적 가치라는건 다수가 인정해야만 생기거든."

"그딴거 누가 인정해달라고나 했어?"

"응. 했잖아."

"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자는 피식 하고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력서를 내는건 내 채용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거잖아?"

"그 딴건 말장난이잖아!"

"어머, 그게 끝일거 같니?"


여자는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고백했다는건 나를 네 애인으로써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거고, 학교에 지원 했다는 건 네 학업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거 아니겠니?"

"웃기지마. 이런식으로 나를 괴롭혀서 얻는게 대체 뭐야?"

"괴롭혀?"


그러더니 여자는 깔깔 웃었다.


"괴롭기는 진작부터 괴롭지 않았니? 이제와서 괴롭지 않았던 척 하는거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아까부터 대체. 뭐라는지 모르겠어."

"쯧쯔 이젠 생각하기도 포기한거니?"


나는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하지만, 여자가 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곤 나를 밟았다.


"어때? 이런게 괴로운거 아닐까?"


여자는 내 몸을 꾸욱하고 밟았다. 숨쉬기가 괴로웠다. 아무리 그 발을 치우려고 해도 소용 없었다.

발버둥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서 이제 곧 발버둥은 그만두었다.


"어머, 벌써 끝이야?"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도 없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여자는 그제서야 발을 치웠다.


조금 편해졌다. 그렇지만 곧바로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지쳤다.


"A군. 삶의 엔딩은 죽음이라고 생각해?"

"....."

"의견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죽음이 엔딩이겠지."

"....."

"그렇다면 말이야. 아직 목숨이 붙어있으면 엔딩이 나지는 않았다는 말이지. 엔딩이 예상가더라도 확정은 아니잖아?"

"....."

"베드 엔딩인가 해피 엔딩인가는 한끗차이라는거 알고 있잖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미연시에서도 잔뜩 나오지 않았니?"

"....."

"사실 너도 다 알고 있고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야. 서울대 가는 방법을 누가 몰라?"


.....아직도, 지쳤다.


"왜 나타난거야. 너는."


이 여자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까 이 여자가 말한 것처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말했잖아? 털어놓으라고."

".....할 이야기는 더 없어."

"괜찮아. 그럴것 같아서 내가 털어줬잖아?"


그 때서야 여자를 다시 봤다. 여자는 싱긋 하고 웃었다.


"....지랄하네 진짜."

"맞아. 참, 옘병떨지."


하하하핫, 하고 웃었다.


"진짜 정신병자 같네."

"그렇더라도, 뭐 어때."


그 때 하고 싶은게 생각이 났다.


"....너는 만질 수 있었지?"

"응. 근데 네가 상상하는 그건 안해줄거야."

"뭔 줄 알고?"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거야, 역겨운 씹덕 망상이란건 다 뻔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