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이야기



3부끝 (아님)

저번화


*



[캬아악!]



큰 뱀이 기어코 야광문어괴물의 손아귀에서 탈출하였다.



[독물로 담가버리겠다고 말했을 터다.

약속대로 해주마. 한 놈 빠짐없이!]



큰 뱀은 머리를 위로 향하고 포효했다.


저거 방금 그건데.


독 뿜어낼 때 그 움직임.


벼룩의 간만큼 남은 도력으로 뭘하랴 싶었지만 자세를 잡았다.


다행히, 독은 날아들지 않았다.



[뎃?]



뱀은 몇번 더 시도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나리가 넌지시 물었다.



"뭐냐? 놈은 왜 저러는 것이느냐?"


"우리가 힘이 바닥 났으니 놈도 그런 게 아닐까요?"


"치려면 지금이 기회인 게 아니오?"


"오호, 일리가 있구나."



우리 눈매는 초식동물의 눈에서 육식동물의 눈으로 변했다.


뱀은 그 모습에서 공포를 느낀 듯 했다.


[제길!] 이라며 뱀은 달아났다.


놈과 우리의 보폭 차이가 컸다.


쫓아보았지만 따라가지 못했다.



"기력 보충부터 하자꾸나."


"요괴는 어쩌고 말이오?"


"어차피 산 속으로 도망쳤을 테니 이 이상 피해가 나진 않을 게지."


"이미 요괴 때문에 저주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빨리 요괴를 처치해, 해주하지 않으면 큰일일텐데."


"그러니 내일 아침 해가 밝자마자 말을 몰아서 추격해야지."



역에 있는 역리들도 심야라 졸고 있을 터.


그것까지 감안한 계산인 듯했다.



"그러죠 그럼."


"다만...."



나리가 내 눈치를 봤다.



"그... 아마 놈을 쫓다보면 옆마을이고 옆옆마을까지도 갈지 모르는 일이니라."


"그게 뭐 어쨌단 게요?"


"여행이 길어질 수 있단 뜻이니라."



아.



"자네는 나를 따라 봉남까지 갈 생각은 없다 했잖느냐."



그러고보니 그런 비슷한 말 했었지.



"괜찮겠느냐? 이쯤에서 헤어져도 이해하마."



말로는 괜찮다면서도, 나리는 입이 삐죽 나와선 고개를 숙였다.


삐죽 나온 입이 둥근 찐빵의 꼬투리 부위 같았다.


예상보다 사려가 깊으신 나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리 참 치사하시구료.

낮에 그런 걸 보여줘놓고서 손 뗄 박정한 인간이 어딨소?"


"그, 그러하느냐?"



어린 나리가 활짝 웃었다.



"무엇보다, 고되다고 도중에 사냥을 멈추는 사냥꾼이 어딨겠소?

남자가 한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자넨 여자잖느냐?"


"도사님은 여자잖아요."



아차차, 말실수가.



"남자나 여자나 비슷한 게요.

어쨌건, 난 갈 테요.

당신은 어쩔 것이오?"


"저도 어사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물어야 하는 것도 있고."


"결정났군.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함께 움직이는 게요."


"고맙네, 정말 고마워!"



특유의 시건방지고 얄미운 말투도, 한순간 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리가 웃을까 울까 망설이는 복잡한 낯으로 기뻐했다.


나리가 고맙다며 손을 잡았다.


나리의 손이 원체 작은지라 나는 손 대신, 손가락을 쥐여주었다.



*



우린 약속대로 아침에 결전을 치뤘다.


산에서 뱀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큼직한 덩치인데 누워서 떡먹기지.


문제는 뱀을 쓰러뜨리는 일이었다.



[캬아아!]



뱀이 날 잡아, 몸으로 조이려 들었다.



"와라!"



후방에 있던 나무 한 그루를 내 자리와 교체했다. 


나 대신 휩쓸린 피해자, 아니 피해목木은 가엽게도 일격에 생을 달리했다.



'와지끈'



저거 내가 맞았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세상에.



"도사님 기력은 어느 정도 있으세요?"


"아직 몸놀림에 지장이 갈 정돈 아니외다."


"도술을 쓸 수는 있겠어요?"


"그건 곤란하겠소. 슬슬 도력이 바닥을 보이니."


"무당 자네, 큰 기술이 있다 했지? 얼마나 남았느냐?"


"한참 남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반각半刻 정도...?"



1각이 15분이니까 반각이면....


7분?


망했군. 맙소사.



"반각이면 저 요괴 녀석이 우릴 전멸시키고도 남을 시간이거늘, 반각이라고?"


[그렇지, 반각이면 이 몸이 너희를 전멸시키고도 남을 시간이지.]



문제가 이거였다.


놈의 기력 회복이 우리의 기력 회복보다 빨랐다는 점.


나물 캐던 사람이라도 잡아먹었나, 어찌 6시간 만에 기력이 전부 충전된다더냐.


난 아침에 깼을 때도 도력 절반 정도 밖에 회복 안 됐었는데.


그때, 위에서 어느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머리들 식이소! 돌 굴러가니께!"



곧바로 거대한 암석이 굴러 떨어졌다.


뱀 뒤쪽, 절벽 위에서 날아온 돌이었다.


피할 틈새도 안 주고 던지네. 맞으면 어쩌려고.


아니나다를까, 희생자가 생겼다.



[캬악, 아아아악!]



우리로선 당해주는 쪽이 더 기쁜 희생자였다.


뱀이 크게 몸부림쳤다.


어지간히 아팠구나.


절벽 위에서의 신원불명의 사람이 다시금 외쳤다.



"고대로 가마이 식이고 있으소!"


"뭐냐? 무슨 일이냐?"



나리가 상황을 보려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절벽 위를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래봤자 안 보일 텐데.


바로 호통이 떨어졌다.



"거기 빨강 계집 꼬맹이! 대팍에 구넥 나봐야 말 들을 게냐?

하란 대로 안 혀?"



'대가리에 구멍 나봐야 말 들을 거냐' 라니, 나리 상처 입겠다.


나리가 "히잉" 이라며 쭈그려서 고개를 숙였다.



"고대로 있으소! 고대로!"


'타앙-!'



요란스런 굉음이 등장했다.


총?


이 굉음, 총 아니야?


됐다. 총이면 낙승이었다.



[캬아악! 아아아아악! 눈이!!]



뱀의 용태를 보니 눈에 적중한 듯 했다.


뱀의 오른눈에서 벌컥벌컥 피가 나오고 있었다.



'치이이익....'


"아직 고개 들지 마소! 아직!"


'퍼엉-!'


[키아아악!]



두번째 건 조금 소리가 달랐다.


다른 총인가?


이번 건 왼눈에 맞았다.


나리가 혀를 내둘렀다.



"누군지 몰라도 총으로 눈을 맞추다니 실력이 굉장하구나."



뱀이 마구잡이로 절벽 위를 공격했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 시야로 맞출 리가 없었다.


한방도 맞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먼지가 많아 절벽 위 전황을 확인하진 못해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야, 죽었으면 뱀도 공격을 멈췄을 테니까.



"이보시오 이름 모를 처자!

반각만 시간을 끌어주시오. 반각만!"


"다 됐어요. 이제 반각까지 필요 없어요."



무당 여인이 가슴에서 부적을 꺼내 날렸다.


그렇게 꺼내지 말라니까....


부적은 하늘하늘 날다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언뜻 보니 천둥 뢰雷가 3개 새겨진 부적이었다.



"응당 노릇노릇 구워질 테니까요."


'콰르릉'


'우르릉'



구름이 심상잖은 소리를 낸다 싶더라니 바로 벼락이 떨어졌다.



'콰앙-!'


[꺄옹!]



전기가 오른 뱀은 경련을 일으켰다.


바들바들 떨던 뱀의 위로 한번 더 벼락이 떨어졌다.



'콰앙-!'



무당 여인의 말대로였다.


두번이나 벼락을 맞은 뱀은 검고 맛있게 구워져있었다.


뱀은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완전히 죽었군.


나리가 땀을 닦았다.



"해치웠나?"


"해치웠나보오."


"다행이구나. 한때는 암울했는데.

잘했네. 무당 자네 덕분일세."


"저 이름 모를 사수님 덕분이기도 하지 않소.

이보시오! 내려오시오. 감사를 표하고 싶소!"


"그보다, 이런 강력하고 화려한 술법이 있었으면 어제 쓰지 그랬느냐.

문어보다 훨씬 믿음직하거늘."



안심과 화목함이 넘치던 대화에, 무당 여인이 찬물을 끼얹었다. 



"앗,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긴 뭐가 안 되느냐?"


"방금까지는 저 요괴 녀석이 꼿꼿이 허리를 세웠잖아요."


"그렇지?"


"절벽 위도 보일 정도로 꼿꼿이 세웠소.

그 놈 키 한번 훤칠하더만."


"그러니 낙뢰도 높이가 높은 쪽으로 몰렸는데,

지금 저게 바닥에 쓰러졌잖아요."



다음에 치면 저 놈이 아니라 사람한테 칠 수도 있단 건가.


돌이켜보니 전생에 tv에서 본 적이 있다.


번개는 재질보다는 높이에 끌리는 경향이 크다던가.


나리가 무쇠 칼을 들어도, 벼락이 뱀을 더 선호했던 건 그런 까닭일 테다.



"그게 뭐 어때서 그렇느냐.
번개는 다 끝났는데."


"아닌데요...?"



그러고보니 그 부적, 천둥 뢰雷가 3개 쓰여있었다.


한자 쓰인 갯수만큼 벼락이 떨어진다고 가정하면

지금까지 두번 내리쳤으니까....


무당 여인이 내 계산에 확증을 더해주었다.



"아직 한번 남았어요...."


'쿠콰앙-!'



번개가 한번 더 떨어졌다.



"으갸아악! 으그그그, 으깨애액!"



절벽 위로.


필시, 절벽 위에 있던 저격수의 비명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달려라!"


"이럇!"



뱀과 싸운다고 나무에 묶어뒀던 말에 올랐다.


말은 나리가 마패를 써서 역에서 빌린 것이다.


가보니 파란 머리의 여성이 총을 잡고 쓰러져있었다.


여성의 외면은 멀쩡했다. 그을음도 없었고.


한데 이 여자는 산 중에 왠 밀짚모자를 쓰고 왔담.


농사 지을 것도 아니고.



"이, 이보게!"


"이보시오. 눈 좀 떠보시오."


"저기요. 정신 차리세요."



벼락 맞고 정신 차리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포기 않고 여성을 깨웠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살인은 싫어.


얼마 안 있어 푸른 머리 여인이 신음하며 일어났다.



"으으, 아으, 대굴빡 터질 거 같으네...."



다행이었다.


식겁했네.


여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기, 여기가 오디당가?

당신들 뉘기고."


"산회와 봉남 사이에 있는 산이오."


"우린 방금 사수님이 뱀에게서 살려주신 사람들이고요."


"뱀?"



벽발 여인이 뱀이란 단어에 반응해 무당 여인을 보았다.



"힉 괴, 괴물! 괴물!!"



벽발 여인이 무당 여인을 보고 뭔갈 떠올린 걸까.


총 두 자루를 챙기고 후다닥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남은 우리는 뻘춤해져서, 한참동안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셈이냐?"



어사 나리가 뱀의 꼬리 끝을 잘라 보자기에 넣었다.


내 기력이 회복될 때까진 책에 봉인할 수 없지만, 방치하기에도 불안하여 내놓은 절충안이었다.


나는 나리의 질문을 짐짓 모른 척했다.



"뭐가 말이오?"


"나야 전하의 명이 있으니 봉남으로 가야하는데,

너희는 우선 이 뱀 요괴를 처단하는 게 목적 아니었느냐."


"뭘 자꾸 물으시오. 우린 간다니까.

어명 그거, 다른 요괴들도 잡으란 거 아니오?"


"비슷한 게지."


"가겠소. 뱀이야 잡았지만 뭐 어떻소.

어쨌든 가기로 정한 거요."


"무당 자네는 어떤가."



무당 여인이 눈을 감고

얼굴을 마을 쪽으로 향하더니 대꾸했다.



"여기서 보니 병에 걸렸던 마을 사람들은 다 완치된 모양입니다.

그래도 갈 생각입니다. 할 일이 있으니."



알았다 끄덕이며 일제히 말에 올랐다.



"가자꾸나. 봉남으로."


"저쪽이 남쪽 같소. 따라오시오."


"응? 남쪽은 이쪽이 아닌가?"



나리와 내 의견이 갈렸다.


얌전하던 무당 여인에게 물었다.



"으음, 당신 생각은 어떻소?"



무당 여인은 내가 지시한 쪽을 가리켰다.



"점을 쳐보니 남쪽은 저쪽이네요.

저리로 가죠."


"내가 지시한 쪽이 남쪽 맞다, 이 말이오?"


"예. 분명합니다."


"무당 여인이 이리 말하니, 내가 틀린 것 같소.

나리 말이 맞구려.

나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도록 하겠소."



"틀림없이 저쪽이 남쪽인데" 라며 무당 여인이 투덜거렸다.


"봉남이라, 김치찌개가 있어야 할 텐데" 하고 나리가 중얼거렸다.


뜬끔없이 무슨 찌개?


김치찌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허기가 져서 그런가하고 넘겨버렸다.




*



저녁이 되어서 도착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무당 여인을 설득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헤메지는 않았다.


나리의 방향감각을 믿은 덕택이었다.


배가 고팠던 지라 우선은 국밥집을 들렀다.


무려 국영 국밥집이다.



"크으으으 시으어언하다!"


"고기가 많아 좋네요."


"크으으으 뻑예!"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나리, 무당 여인, 나' 다.



"이 야채가 참 맛이 독특하구나."


"그러게 말이오. 칼칼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뭘까요 이게?"


"어디선가 맛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오."


"후후."



옆 자리에 모인 여성들이 조용히 웃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나그네신가요?"


"그렇소."


"며칠 전까진 산회 마을에서 머물렀다가, 이 마을에는 막 온 참이니라."


"그렇군요. 저희 조원 마을 특산품이랍니다, 그게."


"많이 먹고 가세요. 조원이 다른 건 몰라도, 먹거리는 일품이니."



조원.


조원?


불쾌한 데자뷰였다.



"지금 '조원 마을' 이랬소?

조원? 정말로?"



이런 씨, 나리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꼬맹이 말을 내가 미쳤다고 믿었지.


무당 여인이 머리를 싸맸다.



"그러게 제가 이쪽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아앍!!"


"희안하네. 이쪽처럼 보였는데."


"세 분, 어디로 가려 하셨는데요?"



누군가는 분노를 섞어서

누군가는 한탄을 섞어서

누군가는 울분을 섞어서

일제히 대답하였다.



"봉남!"

"봉남...."

"봉남!!"


"봉남 이 개똥 같은 마을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있는 거요!"


"전하께서 왜 소식이 없는지 염려하고 계실 터인데... 이런 곳에서 시간을 축이다니...."


"제 말을 들으라 했잖아요!"


"아니, 당신이 말하니까 믿기가 어려웠단 말이오."


"도사님은 대체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저기요 나그네 아씨들."



파티 결렬 5분 전.


옆자리 처자의 한마디는 파티의 미래를 안정시켜주었다.



"여기가 봉남이에요."


"봉남? 진짜요?"


"몇년 전에 이름이 바뀌었어요.

조원으로."



마을이... 개명을 해?


기이한 일이었다.


여간 큰 사건이 아니면 그럴 일은 보통 없는데.



"역적이라도 났소? 마을 이름이 바뀌게."


"그런 건 아니에요."


"마을의 분위기가 뒤집힌 사건이야 있었지만."



역적에 비견될 사건이라?


궁금증이 일었다.



"읊어보시오. 무슨 일이었는지."


*


산회편 끝
조원편 시작

다시보니까 급하게 쓴 흔적이 자꾸만 눈에 밟히네.

이번화 원작은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