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집

1화

제발 잘 돼라 이 소설.

4화 시작합니다.


9.

개학 후 일주일이 지났다. 너의 친구라는 애들에게 둘러싸여 첫날 같은 하루가 반복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의외로 저절로 해결됐다. 며칠이 지나자 다들 이쪽에 무관심해졌다. 정말 너랑 친했던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마 내가 너처럼 붙임성 좋게 굴지 못해서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피곤하게 늘 사람을 달고 다녔던 이유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불만이 있다면 빨리 돌아와 줘.


"그럼 이따 보자."


1교시가 시작하기 전, 현지가 말했다. 이 애는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하다. 매일 아침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함께 언덕을 걸어 오른다. 내가 묵묵히 걷는 동안 계속해서 말을 건다. 나는 가끔 대답할 뿐이지만 모든 이야기에 집중한다. 너무 혼자 떠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면 미안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러면 그 애는 그런 시시한 반응에도 기쁜 듯이 그렇지? 라고, 다시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몇 번 '응', '그래', '그렇지'가 오고 가면 우리는 교실 앞에서 헤어진다. 별것도 아닌 대화 같지만, 나는 그 애가 해주는 이야기로부터 너의 일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오늘은 교실 앞에서, 나는 무심코 살짝 그 애의 손을 잡아버렸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였나? 아니, 미안하다. 이게 무슨 짓일까... 여자애 손을 마음대로 잡다니 정신이 나갔나 보다. 나는 손을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친절한 말을 아무거나 했다.


"아... 좋은 하루."


현지는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웃으면서 대답해 줬다.


"응! 너도."


오늘 아침, 조금이지만 기운이 났던 건 이 바보 같은 해프닝 덕분이었을지도.


10.

"오늘 7일이니까 28번이 나와서 풀어 봐."


도대체 무슨 논리야.


"칠 사 이십팔이니까 28번이 나와서 풀어보자. 한세연 나와."


책상 위에 붙어있는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28번 한세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필이면...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 배우는 단원은 집합과 명제. 집합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식은 죽 먹기지.


"쌤, 한세연 수학 전교 2등이래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전혀 모르는 남자애였다. 얘도 한세연의 친구라는 놈일까. 그 녀석이 던진 한 마디가 재앙을 불렀다.


"선생님도 알지~ 전교 2등이니까 어려운 거 시킬 거야."


어지간히 어려운 문제를 고른 건지 나는 잠시 지문을 읽으며 고민했지만, 풀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머리가 멍해진 채로 서 있었을 뿐이지만. 유난히 문제를 오래 읽고 있는 전교 2등을, 교사는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진심으로 그걸 어려워서 못 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종종 있는 컨디션 문제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슬슬 칠판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 부끄러워질 타이밍이었다. 갑자기 옆자리에 앉아있던 녀석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제가 풀어보겠습니다."


내가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그 녀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윙크를 했다. 윽. 능글맞기도 정도가 있지. 이 반에는 정상인이 없는 건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은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오, 뭐야 흑기사야?"


교사의 질문에 녀석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이 학교 수학은 제가 짱먹을 겁니다."


교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녀는 잠시 출석부를 뒤지더니 말했다.


"아아, 너 전학생이구나. 도전적인 자세가 멋있다. 세연이는 긴장 좀 해야겠는데?"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싶었는데 전학생이었구나. 2학기 맞춰서 편입을 한 모양이다. 녀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칠판에 풀이를 적고 자리에 앉았다. 거기서 답이 틀렸다면 웃겼을 텐데. 아쉽게도 교사는 흐뭇해하며 칭찬 일색이었다.


"일부러 헷갈리게 낸 문제인데 안 속고 잘 풀었네. 자, 박수."


11.

그 전학생은 소위 말해서 '엄마 친구 아들'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부러운 녀석이었다. 키도 큰 편에 공부도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까. 특유의 능글맞은 언행만 빼면 한세연의 남자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만 되면 옆자리가 얼마나 북적대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야... 이 반은 참 재밌어 보이네. 우린 조용한데."


현지가 말했다. 그 애는 내가 다른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안 그러다가 요즘 들어 종종 찾아와서 말을 걸었다.


"그거 부럽네. 복도로 나가자. 바람 좀 쐬고 싶어."


현지하고 대화하는 것에도 익숙해진 나였다. 원래 네 친구지만 이제는 나한테도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린 잠시 복도에 있다가 3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전학생이 나한테 말을 건 것은 의외였다.


"한세연, 아까 걔 너랑 친해?"


"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학생도 자기가 한 말이 두서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엔 자기소개로 시작했다.


"나는 김도하. 이번에 전학 옴. 너는 한세연이지? 우리 친해지자."


싫... 아니, 일단 냉정해진다. 재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붙임성 좋은 너답게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필요 이상으로 까칠하게 구는 건 좋지 않다. 적을 만들어 봤자다.


"그래. 잘 부탁해."


아무래도 새로운 친구가 하나 생긴 것 같다. 말해두지만 나중에 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뭔가 이상한 녀석이 있다고 놀라지 말길. 멍한 채로 내 팔자를 비관하는 동안 3교시가 지나갔다.


12.

"어? 한세연!"


점심시간에도 끈질겼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최대한 이 이상한 친구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학교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어떻게 된 건지, 가는 곳마다 녀석이랑 마주쳤다. 그러면 어울리지 않게 앙탈을 부리면서 졸라댄다.


"야, 아까 걔 이름 뭔데? 말해 줘 봐..."


아무래도 현지에게 반하기라도 했나 본데, 안된다. 이 녀석은 잘 쳐줘서 공부 좀 잘하는 예쁜 쓰레기니까. 그 애에게 이런 폭탄을 떠넘길 수 없어. 그건 무책임한 짓이다.


"그렇게 관심 있으면 본인한테 가서 물어보던지, 이 스토커 자식아."


역시 이런 위험한 녀석은 내치는 게 맞다. 친구로 둬서는 안 되는 건데.


"너 설마 전교 2등 뺏길까 봐 견제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그냥 3등할게."


"관심 없어. 수학이든 국어든 너나 실컷 짱 먹어라."


내가 끝까지 철벽을 치고 방어하자 녀석은 비겁한 수를 꺼냈다.


"아까 수업 때 네가 쩔쩔매던 거 내가 도와줬잖아. 그 빚은 갚아야지?"


"어이가 없네."


"어이 어이, 설마. '어차피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었어' 같은, 비겁한 말을 하려는 거야?"


악덕 사채업자보다 더한 놈이군. 그때 그게 나라서 확실히 도움을 받긴 했다만, 진심으로 한세연이 그 문제를 어려워서 못 풀었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비겁한 수엔 비겁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네가 좋아하는 애 저기 있네. 남자답게 가서 말이나 걸어 봐."


물론 거짓말이었고 나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때마침 불어난 복도의 인파 사이로 숨어드는 건 좋은 전략이었다. 아예 보건실에서 쉬어버렸더니, 이번에는 진짜로 학교가 끝날 때까지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고.


"헐. 웬일이야? 세연이가 우리 반에 다 오고?"


나는 종례 시간에 맞춰 현지네 3반을 찾아갔다. 미행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좀 썼다.


"좋은 하루 보냈어?"


아니. 피곤한 일이 있었어. 굳이 얘기하진 않을게. 또다시 몇 번의 '응'과 '그래'가 오가는 동안 우리는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현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넌 내가 지켜."


"뭐? 갑자기 너무 설레잖아..."


"집에 조심히 가."


바닥에도 더 바닥이 있다고, 내 일상은 어디까지 피곤해질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이런 비일상도 차츰 일상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아이러니다. 한 달 반이 지나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더 이런 생활이 계속되겠지.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 아— 듣고 있나? 지금은 9월 7일 수요일... 날씨는 맑지만 상황은 절망적이다. 한세연 응답하라 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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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뭔가 심심해서 마지막을 제가 좋아하는 만화 <러프>의 대사에서 가져와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