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의 발자취를 역추적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졌다. 그렇찮아도 어두운 숲은 저녁 나절이 되기 한참 전부터 칠흑 같은 어둠에 휩쌓였다. 


이렇게 된 바에야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잠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배가 고팠지만 지금처럼 적에게 둘러쌓인 상태에서 불을 피운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으리라. 상당히 굵직한 나뭇가지로 올라가 걸터앉았다. 배낭에서 잘 말린 고블린 고기를 꺼냈다. 


마을에서 고블린 고기를 말리기 전에 얇게 포를 뜨면서 기생충이 있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살폈기 때문에 말린 고기를 잘 씹어먹는다면 크게 문제가 없을 성 싶다. 고블린이나 다른 몬스터에게 어떤 바이러스성 질환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블린 고기를 씹고 있자니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나뭇가지에 몸을 눕히고 헝겊으로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견딜 수 없는 졸음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화끈거림이 퍼졌다. 그 화끈거림은 신경을 거스리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몸을 덥히며 밤 공기의 차가움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몸에 찾아온 졸음도 평소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었다. 도저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힘이 없었다. 이내 정신을 잃고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이 가상의 중세시대를 꿈꾸는 동안에는 잠을 자더라도 바로 눈을 뜨면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하지만 이 날 밤은 꿈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어둠속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는 고블린의 민첩한 움직임. 갸악갸악 울부짖는 징그러운 고블린의 얼굴이 크로즈 업되었다. 하지만 어떤 역겨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고블린이 마치 동료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고블린은 몸집이 왜소하고 힘이 약하지만 상당히 민첩한 몬스터였다. 보통 생각하더라도 사람보다는 훨씬 민첩한 동작을 보인다. 몸은 민첩하지만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 힘겨운 상대는 아니다. 


고블린들은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을 둘러싸고 빙빙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떤 놈은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했다.  나도 그런 고블린에 섞여 춤을 추었다. 흥겨운 노랫소리가 귓가를 울리면서 만족스러운 듯 환성을 부르짖고 모닥불 앞에 주저앉아 고기를 물어뜯는다.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만족스러운 포만감에 잠을 잔다. 


꿈속의 고블린이 잠을 자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이상하게도 몸이 조금 더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고블린 고기를 먹고 뭔가 화끈거리는 것을 몸으로 느꼈던 기억이 났다. 마치 고블린 고기에 사람을 취하게 하는 알코올 성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은근하게 온몸을 화끈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자마자 다시 고블린 고기를 먹었다. 잘근잘근 씹어먹는 것에는 특별한 맛은 없었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맛 또한 나지 않았다. 고기 조각을 몇 개 먹자 또 다시 졸음이 쏟아지면서 몸이 나른해지고 여지없이 화끈거림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의 꿈속에서 고블린은 들판을 마구 뛰며 곤봉을 휘두른다. 토끼나 노루와 같은 짐승을 쫓아 잽싸게 날린다. 놀랄 만한 민첩함으로 토끼를 따라잡아 머리에 맞추면 기분이 좋아 크륵크륵 웃는다. 그런 경쾌한 웃음과 함께 눈을 떴다. 이상하게도 더욱 한결 가벼워진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연거푸 잠을 두 번 잤다. 고블린의 고기에는 졸음이 오게 하는 성분이 있나 싶었다. 아니면 모든 몬스터의 고기에는 특수한 성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운한 기분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왠지 모르게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시험삼아 숲길을 달려보았다. 확실히 몸이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민첩해졌다. 달리는 속도가 예전보다 확연하게 빨라졌다. 나는 상쾌한 기분과 함께 뭉클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야호 하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곳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 없으니 들뜬 마음을 자제하는 수밖에 없다. 


배낭을 지고 다시 오크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어두운 가운데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신경을 쓴 때문인지 오크의 흔적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당황했지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꾸준히 탐색하는 수밖에 없다. 몇 시간을 정신을 집중하며 주변을 배회했다. 나의 목표는 오크 마을의 위치를 파악해서 녀석들의 동향에 따라 대응을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오크 마을을 찾는 것은 고사하고 막연하게 숲길을 헤매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참 정신을 집중하고 걸었더니 몇 시간 걸은 것치고는 상당히 피곤해졌기에 점심을 먹을 겸 나무 아래에 앉아 쉬기로 했다. 이번에는 말린 오크 고기를 그대로 먹을 것이 아니라 불에 구워먹기로 했다. 숲이라 다소 오두운 편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무의 틈새로 햇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물론 주변의 밝기가 숲 밖 들판에서의 환함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밤에 불을 피우는 것보다는 다소 안전할 것이었다. 


불을 피우고 걸터앉아 고블린 고기를 구웠다. 노릿노릿하게 구워진 것이 식욕을 돋우웠다. 입에 넣으니 그냥 마른 고기를 씹을 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몇 조각을 먹었지만 졸음이 온다거나 온몸으로 퍼지는 화끈거림의 느낌도 없었다. 불기운이 몬스터 고기에 담겨진 이상한 성분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땅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다. 다만 기분 좋게 잠을 잔 후 찾아오는 산뜻하고 가벼운 몸의 느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 떠날 차례가 되었다. 불을 끈 후 배낭을 매려는 찰라, 휙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화살이 내 얼굴을 지나 뒤의 나무줄기에 박혔다. 잔뜩한 긴장한 채로 잽싸게 나무 뒤로 가서 숨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크가 화살을 쏜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정보였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너는 인간인데, 여기는 왠 일로 온 것이지?" 


그 목소리의 임자를 찾아 눈을 들었다.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하였으되 일반 여성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희고 너무나도 여성스러운 얼굴을 보고 말았다. 더구나 관자놀이께로 은빛 머리카락을 뚫고 양 옆으로 살짝 치솟은 귀는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초록빛 옷감으로 제작된 옷은 숲의 푸르름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연출했다. 이 여성이 책에서 읽었던 엘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엘프 여성은 나를 향해 활시위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눈빛에는 한치의 허술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맞다 나는 인간이다. 너는 엘프인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