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계하면서 활시위를 바짝 당겨쥐고 있는 엘프 여성의 긴장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인간과 엘프가 서로 싸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체적으로 엘프족은 호전적이지 않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어떤 종족과도 공존할 수 있는 종족이다. 

"엘프님? 혹시 이곳이 원래 엘프족의 땅인가요?"

엘프 여성을 여전히 활시위를 유지한 채 천천히 걸어왔다. 

"그렇지요. 원래는 이곳이 우리의 땅이었답니다."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저는 어머니와 이웃이 용의 세력에게 목숨을 잃으셨어요. 이곳에 온 것은 몬스터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죠."

엘프는 눈을 크게 떴다. 더욱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나의 이모저모를 훑어보았다. 

"혼자 원수를 갚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이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랍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뭐하시는 것이죠? 위험한 곳이라면서."

나는 다소 온화한 목소리도 마치 엘프를 걱정하는 듯 질문을 했다. 대답하는 엘프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저는 이곳을 정찰하고 있어요. 우리 종족은 옛 땅을 다시 찾기 위해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고 있거든요." 

엘프는 1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들려졌던 활시위는 이제 아래로 거두워졌다. 엘프는 아주 아름다웠다. 커다란 눈동자는 처다보기만 하더라도 빨려들어갈 듯한 빛을 지녔고, 오똑하면서도 아주 높지 않은 콧날과 적당한 크기의 입술, 하얀 뺨의 윤곽 등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잡힌 얼굴은 탁월한 미모를 자랑했다. 

나는 멍하니 엘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멍한 상태에 있는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그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 

"냄새를 보니 오크를 몇 마리 처치하셨군요."

"아, 오크 정찰병인가 봅니다. 아무래도 오크족이 또 다시 공격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 같았어요." 

"혹시 오크 마을 찾아 가려는 것이었나요?"

"예, 오크를 공격하려는 것이기보다는 상황을 먼저 파악하려구요." 

"저는 아리온이라고 합니다. 엘프 정찰병이죠."

"저는 피터라고 합니다. 인간 용병이에요. 저는 인간 남성입니다. 혹시 여성이신가요? 제가 엘프족은 처음 보는 것이라."

"제가 남성으로 보이나요?"

나는 아리온의 얼굴의 턱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기다 가슴께 봉긋 올라온 부분에서 머물렀다. 나도 모르게 예의를 차리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시선을 다시 옮길 줄을 몰랐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아, 아닙니다. 확실히 여성이시군요. 죄송해요."

아리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다.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 내가 이 세계에서는 막 18세가 되었을 뿐이지만 현실에서는 30대 중반이 아니던가? 그래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 했나 보다. 

"저도 인간 남성은 처음으로 보는군요. 물론 인간 여성은 아직 보지 못 했어요. 제 미적인 감각이 객관적이지는 않겠지만, 인간이 오크보다는 더 멋있게 생겼어요."

"감사합니다." 

"저도 주관적이지만 엘프 여성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보다 더 아름답게 생겼나 봅니다. 아니면 아리온 님께서 엘프 중에서도 아름다우신 축에 들겠지만요." 

아리온에게 아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솔직한 얼굴평이었다. 물론 얼굴에다 마음까지 좋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은 아니겠다. 역시 남에게 환심을 사는 것은 먹는 것을 나눠먹는 것이 아닐까? 아까만 해도 식사를 마친 상태였으니까. 

"혹시 점심을 드셨나요? 제가 고블린 고기를 갖고 있는데, 드셔 보시겠어요."

아리온은 즐겁다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 우리 엘프족은 육식을 하지 않는답니다. 나무의 열매나 채소, 곡물 등을 먹지요."

얼핏 들은 것 같다. 아무래도 엘프의 고결한 이미지와 육식은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혹시 오크 마을을 아시나요?" 

나는 아리온이 엘프 정찰병으로서 분명히 오크 마을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알아요. 그런데 혼자서 오크 마을을 상대하기는 힘드실 겁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보통은 50마리 이상이 거주하거든요." 

"가능하다면 이 근처에서 가장 작은 마을로 안내해 주세요. 오크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네요. 오크도 용의 졸개에 불과하니까요. 저는 몬스터에 복수를 할 겁니다." 

아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따운 아리온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오크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리온은 거침 없이 숲속을 전진했다. 평탄하다가 갑자기 굴곡이 지는 지형도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헤쳐갔다. 숲는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의 걸음을 방해할 관목이나 잡풀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새소리가 정적을 깨기는 했지만 사나운 짐승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끼와 고사리 정도가 뒤덮인 숲길을 별 무리 없이 갈 수 있었다. 

아리온의 발걸음은 보통 사람보다 적어도 2배 정도가 되는 듯 했다. 처음에 아리온은 다시 걸음을 늦추는가 했으나 내가 아무런 무리도 없이 따라붙자 자신의 평소 속도로 숲을 횡단한다. 나도 내가 이렇게 빨리 걸어갈 수 있게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전투훈련으로 로 일반인보다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는데, 고블린 고기를 먹은 후 민첩성이 많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내 가설이 옳다면 몬스터의 익히지 않은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고유한 특성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아리온은 말을 걸어왔다. 

"저는 인간의 민첩성이 우리 엘프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군요." 
"아, 아닙니다. 제가 조금 빠른 편이거든요. 전투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까 확실히 빨라졌어요." 

아리온에게는 굳이 고블린 고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가설에 불과하니까. 어차피 아리온은 고블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고, 아니 혐오한다. 

1시간 정도를 걸었다. 저 멀리 숲이 그치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하지만 나무가 없는 공간은 반경 100미터가 약간 안 되는 듯 했다. 오크 마을은 대략적으로 공터의 시작 지점부터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허술한 목책으로 둘러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곳이 오크 마을이군요. 혹시 오크 마을을 그냥 지나치실 건가요? 저 정도 수준이라면 우리가 잘만 한다면 부수어뜨릴 수도 있겠는데요." 

"오크들이 아마 사냥을 나갔을 겁니다. 여기에서 잠깐만 대기한다면 사냥을 나간 무리가 돌아오는 시간이 되지요. 지금이라면 오크가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테니 개별적으로 돌아오는 각개격파할 수 있겠군요."

아리온의 판단력이 옳았을 것이다. 나의 전투력으로는 오크 병사 2마리를 손쉽게 제압할 수준이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3-4명은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아까 활시위를 겨누는 자세를 보거나 숲을 신속하게 질주하는 것을 보거나 아리온은 나보다 전투능력이 월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혼자서 정찰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리온가 내가 합한다면 10마리의 오크는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20-30분 정도 기다렸을까. 아리온이 나의 오른팔에 손을 갖다 되면서 말한다. 

"저기 오크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이리로 오세요." 

엘프의 큰 귀가 괜히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인간보다 더욱 예민한 청각을 지녔다. 

나는 숨소리마저 죽이며 아리온을 따랐다. 100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 오크의 무리가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리온은 대뜸 활에 화살을 먹인 후 시위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줄을 잡아당기는 품이 여유가 있었다.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리온은 주저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활은 허공을 갈랐고 오크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졌다. 오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오크의 시력이나 순간적인 판단력은 아주 좋은 편은 아닌 듯. 하지만 그들도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아리온은 연속해서 활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100미터 이상의 거리에서도 적을 쏘아 거꾸러뜨릴 수 있는 활. 엘프족이 만드는 활은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고 하는데, 맞는 말인가 보다. 나도 오크가 60여 미터쯤 당도했을 때에는 화살을 잡아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걸린 화살의 연장선상에는 오크 용사의 가슴팍이 놓였다. 내 화살도 시위를 떠나 적의 가슴을 꿰뚫었다. 나는 다시 한번 화살을 시위에 먹었다가 놓았다. 이 번에도 명중했다. 내가 2회 정도 쏘았을 때 놀랍게도 아리온은 5회를 당겼다. 

나는 활을 놓고 장검을 꺼냈으며 아리온은 날렵한 동작으로 양손에 단검을 쥐었다. 단검이라고 해도 그리 짧지 않고 내 팔 정도 되는 길이였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크 병사는 7마리 정도였다. 우리가 이미 활로 처치한 놈이 7마리였으니 총 14마리였군. 

오크들은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겁을 먹기는 커녕 더욱 분노에 들끓어올랐는지 크어억 함성을 지르며 뛰어왔다. 나는 맨 앞에 달려오는 놈의 목을 노리며 장검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