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뛰어온 오크들은 대부분이 칼보다는 도끼를 들고 있었다. 맨 가운데에 있는 오크를 중심으로 기러기가 나는 형태의 대형으로 달려오는 중이다. 가운뎃 놈은 그 중 대장인 듯 품질이 비교적 좋아보이는 검을 들고 있었다. 

내 민첩성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전투기술 면에서는 나보다는 아리온이 훨씬 더 뛰어난 것으로 보였다. 순간 가운데 오크가 가장 전투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그 양옆에 있는 오크가 전투를 보조할 것이므로 섣불리 나섰다가는 상당히 위험하다는 판단이 되었다. 아리온에게 소리쳤다. 

"아리온, 가운데 맨 앞으로 뛰어오는 놈을 맞으세요. 저는 맨 오른쪽부터 공격할 테니까요." 

"그러지요. 제가 먼저 나갈께요."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있기는 하지만, 전투의 상황에서는 냉철한 판단력이 우선해야 한다. 

아리온은 날샌 몸놀림을 선보이며 기세 좋게 달려오는 중앙의 오크에게 붙었다. 아리온이 가진 단검은 오크가 가진 장검보다 훨신 짧기 때문에 아리온의 전략은 적의 일격을 피한 후 근접하여 승부를 보는 것이리라. 오크 우두머리는 날카로운 놀림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리온은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을 그리며 휘몰아쳐 내려오는 검신을 능숙하게 피하면서 놀라온 묘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크 대장의 오른쪽 옆구리를 왼 칼로 찌른 후 오른 칼을 휘둘러 오른 편에서 응원을 하던 오크의 목을 베어낸 것이다. 두 손에 든 검의 움직임은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아리온의 순간적인 움직임에 놀랠 겨늘도 없이 맨 오른쪽에 있는 오크의 가슴을 향해 칼을 뻗었다. 그 놈은 나보다 동작이 조금 느렸다. 나의 공격 동작을 보고 즉시 도끼를 높이 들어 내 어깨를 내려치려는 것이었지만, 내 검이 먼저 그 심장을 뚫었다. 내려오던 도끼는 내 어깨를 빗맞추었다. 나는 달려가며 녀석을 몸으로 밀었는데, 놈는 충격에 밀려 넘어지면서 가슴에서 검붉은 피를 뿜었다. 

아까 우두머리 오크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남아 있는 오크는 나와 아리온의 협공으로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왼편에 있던 3마리의 오크는 크게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순간적으로 4명의 동료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아리온과 나는 남은 3마리의 오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아리온이 2마리를, 내가 1마리를 각각 해치웠다. 

아리온의 전투력은 실로 놀라웠다. 이렇게 민첩한 동작을 보이고 격렬한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온은 숨을 크게 헐떡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며 주변의 정찰을 계속했다. 일상적인 사건을 대하는 듯 평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반면, 나는 전투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일순 풀리면서도 헐떡이는 숨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리온, 놀랍군요. 대단해요."

"일반적으로 엘프 전사는 인간보다 민첩성이 뛰어나다고 해요. 또 엘프족은 정찰병으로 일족에서 최정예 병사를 내보내곤 하지요."

아리온, 은근 자뻑이 심하군. 물론 아리온은 그럴 자격이 있다. 아리온은 냉철한 목소리를 말을 이었다. 

"피터, 이 방향에서는 더 이상 오크가 오지 않을 거예요. 마을의 반대편쪽으로 가게요." 

"잠시만요."

나는 오크 우두머리가 갖고 있던 검을 집어들었다. 내 검과 비교할 때 아주 약간 더 좋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리온은 자신의 화살을 회수했고, 오크가 가졌던 전리품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사실 오크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쓸모 있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크 마을의 반대쪽으로 가는 도중 또 다른 일단의 오크 떼를 만났고,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고 오크를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오크의 숫자는 14마리였다. 이 오크 마을에서는 대략 14마리씩 사냥 대형을 형성하는 듯하다. 

"쉿, 다른 오크가 이쪽으로 또 몰려오고 있군요. 마을의 크기로 보아 사냥을 나간 마지막 오크 떼로 보이네요." 

아니나 다를까, 오크 떼는 우리가 쉴 틈을 전혀 주지 않고 떼를 지어 쇄도해왔다. 이번에도 첫번째와 동일한 전략으로 움직였고, 역시 우리가 승리했다. 

나는 턱 아래까지 숨이 올라와서 격렬하게 헐떡거리다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연거푸 전투를 하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10여분 숨을 돌리니 이제는 한결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다. 

"과연 오크 마을에는 몇 마리 정도가 있을까요?"

"아마도 어른 오크는 10마리를 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오크 족장이 있을 테니 조심해야겠지요." 

나는 오크 족장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오크 족장은 오크 중에서도 힘이 세고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아리온, 혹시 오크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요?" 

"우리 엘프는 성인 오크 전사만을 죽여요. 아이들은 살리지요. 인간은 어떻게 하나요?"

"인간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새끼 오크들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피터, 그렇게 하죠. 잘 생각하셨어요." 

아리온과 나는 화살을 회수한 후 오크 마을의 가장 허름한 목책을 찾았다. 사실 오크족은 화살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목책의 용도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밤에 야생 맹수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마을을 두른 목책을 건너자마자 활시위를 당겨 두 마리의 오크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죽어가는 오크의 비명소리에 8마리의 오크가 모였다. 그 가운데 선 오크 족장으로 보이는 자는 큰 방패에 우수한 검을 들고 있었다. 

오크 족장은 나와 아리온 중에서 내가 더 만만해 보였던지 나를 향해 검을 날렸다. 나는 오른쪽 옆으로 빠졌고 그 틈을 비집고 아리온이 족장을 노려 공격하였으나 족장은 대단한 민첩성으로 아리온의 단검을 방패로 막아들었다. 

오크 족장을 먼저 상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리온에게 소리쳤다.

"아리온, 족장은 맨 마지막에 처치하게요." 

"싸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아리온은 맨 왼쪽으로 잽싸게 움직였고 나는 맨 오른쪽에 있는 녀석의 목을 노렸다. 5분의 전투시간이 지나자 나는 내 쪽에 있는 녀석들 3마리를, 아리온은 자기 쪽의 4마리를 해치웠다. 

오크 족장은 자신의 부하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아리온과 나는 족장을 향해 각각 검을 날렸지만, 족장은 검으로 밀어내고 방패로 막아냈다. 

아리온이 족장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이 나는 오크 족장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적이 180도의 가격으로 서 있으니 족장의 경계 범위가 대폭 확대되어 주의력이 분산될 것을 노린 것이다. 내가 족장의 뒤통수를 향해 칼을 날리니 오크 족장은 몸을 신속하게 회전하며 내 공격을 막아냈으나 이 틈을 노리고 달려든 아리온의 예리한 공격을 미쳐 막아내지 못 했다. 오크 족장은 옆구리가 찔리자 크게 광분하며 날뛰었다. 싸움은 우리에게 더욱 이롭게 흘러갔다. 몇 분만에 광분으로 지친 오크 족장의 체력은 바닥이 났고, 이번에도 나의 공격에 헛점을 노출한 족장의 목은 이리온의 단검에 잘려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즉시 배낭을 열어 고기를 손질하는 조그만 단검을 꺼내었다. 아리온은 모든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데 만족하며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아크 족장의 허벅지를 도려내는 것을 보며 아리온이 말했다. 

"피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아리온, 제가 실험할 것이 있거드요. 보기 역겨우시다면 잠시 딴곳을 바라보세요."
"그러지요. 역겹지는 않으니 궁금해서 물었던 것뿐이니까요."

아리온이 오크족 암컷들과 새끼들이 숨어 있는 건물의 문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동안 나는 오크 족장의 양쪽 허벅지를 완전히 도려내어 포를 떴다. 

"이제 다 되었어요. 우선 전리품을 확보하게요."

"저는 딱히 필요한 것이 없군요."

"그럼 오크 족장과 검은 제가 가져갈께요." 

사실 지금의 내 힘으로서는 오크 족장의 검을 한 손으로 들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제법 강력해 보이는 무기가 탐이 났을 뿐만 아니라 나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것들은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피터, 오크와 용에 대항해 싸우신다니 제가 우리 마을로 초대하고 싶은데, 저와 함께 가실래요?" 

"아리온, 감사해요. 원래부터 엘프 마을을 방문하고 싶었거든요."

아리온은 기운을 온전히 회복하자 오크 마을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더니 다시 숲으로 향해 걸어들어갔다. 아주 빠른 걸음이었지만 나로서는 큰 무리가 없었다. 

숲속을 한 참 걸으니 아리온은 나에게 물통을 건네주었다. 

"입은 대지 않고 마셔 주세요."

한 모금 마셨다.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뭔가 달콤하고 독특한 향기가 나는 과일 쥬스였다. 나는 물통, 아니 쥬스통을 아리온에게 건네며 물었다. 

"와, 맛 있군요. 이것은 도대체 무슨 쥬스예요?"

아리온은 두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아, 이것은 인간의 사과와는 다른 맛이 나겠지만, 엘프 족의 사과 쥬스지요." 

"인간의 사과보다 훨씬 더 맛있군요. 엘프 족은 아주 훌륭한 원예가들이군요." 

"우리 엘프족은 인간들처럼 다양한 품종을 억지로 개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답니다. 이를테면, 사과를 기르더라도 자연 상태대로 자라도록 하지요. 다만 엘프족은 숲을 오가며 방대한 지리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가장 품종이 좋은 과일의 씨앗을 얻을 수 있었던 거지요." 

"아리온, 엘프족은 겉모습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롭게 살려고 하는 마음까지도 갖고 계시군요."

"그것은 엘프족이 자연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지요. 자연은 파괴할 때보다 제대로 가꾸고 보호할 때 우리에게 더욱 많은 혜택을 주니까요." 

우리는 숲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엘프족의 외모와 품성을 칭찬할 때마다 아리온은 빙긋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했다. 

어느덧 어두운 숲에는 저녁이 일찍 찾아왔다. 사위는 어두워 점점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내가 아리온을 보자 그 눈빛에서 연한 빛이 흘러나왔다. 

"피터, 두려워 하지 마세요. 엘프족은 아주 어두운 밤에도 물건들을 잘 분간할 수 있는 눈을 지녔거든요."

"아리온, 엘프족의 눈은 고양이의 눈처럼 밤에도 빛을 내는군요. 신기해요. 무섭지는 않았어요. 아리온이 저를 해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니까요." 

아리온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피터, 제 손을 잡으세요. 제가 당신을 마을까지 안전하게 인도할께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리온의 손을 덥석 잡았다. 빠른 속도로 숲길을 걸은 때문인지 아리온의 손은 따뜻하고 전투에 능한 여성의 손 답지 않고 부드러웠다. 

"아리온, 당신은 엘프족에서도 가장 유능한 전사가 맞나요?"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아리온, 당신의 손은 너무나도 부드럽군요. 전투에 능한 손이 이럴 수 있나요?" 

"우리 엘프족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아주 빠른 회복능력을 보이지요. 손에 상처가 나더라도 아주 빠르게 회독될 뿐만 아니라 거의 흔적이 남지도 않아요. 일반적으로 엘프족의 경우 여성의 손이 남성의 것보다 더 부드러운 편이지요. 뭐 불만이 있으세요?"

아리온의 목소리에는 황당함이 묻어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뒷수습에 나섰다. 

"아니에요. 우리 인간족의 여성은 부드러운 손을 아주 부러워한답니다. 인간족 남성은 여성의 부드러운 손을 좋아하거든요. 저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리온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손을 뿌리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그냥 내 손을 쥔 채 앞으로 나아갔다. 

"아리온,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리온이 이렇게 저를 인도해주셔서 무척 감사하고 있어요." 

아리온은 걸음을 빠르게 하여 마을로 향했다. 나는 아리온의 손이 더욱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