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온의 밝은 눈은 칠흑 같은 숲길을 거침 없이 뚫고 지나갔다. 나는 아리온의 손을 꼭 잡고 놓치지 않았다.  아리온의 손을 잡고 걸어가서인지 내 시간 감각은 무디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숲길을 걸었던 것일까?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인간이 나무나 석탄을 태워서 내는 빛과는 사뭇 다른 어딘지 모르게 아주 자연적이지는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빛이었다. 

"피터, 저 빛을 보세요. 아름답지 않나요?"

"저곳이 아리온의 마을이군요. 빛이 몽환적이군요. 마치 꿈길을 걷는 것 같아요."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내가 꿈속에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모든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 꿈을 매우 현실적이게 꾸고 있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아리온, 이제 다 왔군요. 이렇게 안전하게 저를 인도해주셔서 감사해요." 

"피터, 저도 기뻤어요. 자 저와 함께 마을 장로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갑시다. 저의 정찰 보고를 기다리실 거예요. 또 피터를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야겠군요." 

아리온은 나를 데리고 은은한 빛의 계단을 올라갔다. 엘프의 마을은 말 그대로 숲이었다. 나무를 자르지 않고 숲의 자연상태를 최대한 이용한 건물의 집합체였다. 아니 숲의 일부가 마을로 이용되고 있었다. 나무의 생명력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아람드리 나무의 속을 파내어 사람이 거할 수 있게 만든 집들이 있었고, 어떤 집은 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특수한 식물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한 것도 있었다. 숲은 온전히 어둠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마을의 정확한 모습은 날이 밝은 뒤에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리온은 장로의 거처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하더니 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장로의 하인인 듯한 엘프 여성이 나와 우리를 환대했다. 처음 인간인 나를 보고 잠시 놀란 듯하였지만 이내 아리온의 늠름하고 의연스러운 태도를 보고 크게 안심하며 앞서 걸어 거실로 보이는 방으로 안내했다. 정문과 거실 사이의 거리는 짧았다. 

장로는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별다른 요동도 없이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리온은 장로의 의자에서 2미터 정도 되는 자리에 섰다. 나도 그 옆에 섰다. 아리온은 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장로의 눈빛을 바라 보았다. 

"장로님, 이 인간은 제가 오크 마을을 공격할 때 도와줬던 사람입니다. 저와 함께 작은 오크 마을을 격퇴하고 오크 족장을 처단했습니다." 

"아리온, 정찰 귀환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져서 걱정했는데 마을까지 공격했었구나. 어디 정찰 임무는 모두 마쳤나?" 

"장로님, 제가 정찰한 바로는 오크들은 대규모 습격을 준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정착한 곳에서 충분히 숫자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려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때 재차 침입해올 것으로 보입니다. 오크 마을들의 대략적인 위치는 모두 파악했습니다."

"그래, 잘 했다. 아리온. 이 인간이 오크와 싸웠다니 다행이군요."

"이 사람의 이름은 피터입니다. 원래 인간 용병이었는데 그만 두고 어머니와 이웃의 복수를 위해 몬스터를 처단하고 용을 퇴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나는 장로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로 했다. 

"제 이름은 피터입니다. 저는 용이 산다고 하는 니콜하임 골짜기를 목적지로 해서 숲을 헤맸는데, 아리온이 제 길을 찾게 도와주었고, 제 원수를 갚는데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터, 오히려 우리가 자네에게 빚을 지게 되었군. 오크족은 우리 영토를 침범해온 우리의 적인데, 자녀가 아리온을 도와주었다니 참으로 고맙네. 많이 피곤하였을 테니 우리 마을에서 편히 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장로님."

아리온은 장로 방을 나가서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아리온은 정문을 나와 마을 중앙을 가로질저 자신의 집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고 아담하게 생긴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간단하게 아리온과 밤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엘프족의 방은 잠들기에 충분한 정도의 밝기로 은은한 등불이 비추고 있었다. 이 등불은 마치 반딧불이가 자연스럽게 내는 빛을 닮았다. 

엘프족의 침대는 나무로 만든 사각형 틀에 탄력성이 있는 가르다란 등나무 줄기가 가로 세로로 촘촘하게 얽어져 있는 형태였다. 이불으로서는 솜처럼 생긴 하얀 뭉치가 내 몸을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침대 옆에 있는 조그만 항아리에는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간단한 양치와 세수를 하고 가벼운 복장으로 솜털 이불 아래 몸을 뉘였고 물 흐르듯 잠에 들었다. 

아침에 아리온은 나를 깨워 거실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게 했다. 식사는 빵과 비슷한 음식과 어제 마셨던 사과 쥬스로 이루어졌다. 나는 빵을 맛 보며 물었다. 

"이것은 인간 마을의 빵과 비슷하군요. 다만 오븐에 구운 것이 아니라 특수한 식물의 열매로 보이네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맛도 인간의 빵과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저는 아직 인간의 빵은 맛보지 못했군요." 

"맞아요. 딱 인간이 먹는 빵 맛이네요." 
"우리는 이 빵을 만들기 위해 밀을 빻는다거나 이스트를 넣어 불에 굽는다거나 할 필요가 없어요. 나무의 열매 자체가 잘 익으면 우리 엘프가 소화하기에 적합한 음식이 되어주니까요."  

나는 심지어 빵을 구울 필요도 없이 낭만적으로 사는 엘프의 삶에 매료되었다. 역시 엘프는 노동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아주 편안한 삶을 사는구나. 

"좋으시겠군요. 저희 인간은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라치면 땀 흘려 일을 해야 하니까요."
"저희도 이러한 음식을 얻기 위해 숲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채집활동을 한답니다. 또 인간처럼 무지막지하게 인구를 증가시키지 않고 우리가 가진 영토가 부양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를 유지하고 있어요." 

"엘프 마을은 온통 숲으로 뒤덮여 있군요. 마을이 마치 숲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져요."
"우리는 항상 자연과 조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아리온, 혹시 이 집이 있는 나무의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와도 될까요?" 
"인간의 집은 숲속에 없겠군요. 혹시 나무 아래에 있으니 햇볕을 보고 싶으신 게로군요." 

"맞아요. 한참 어두운 숲의 그늘에서만 다녔더니 벌써부터 햇볕이 그리워졌어요. 저 혼자 올라갔다 올 테니 허락해 주세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나는 아리온에게 양해를 구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랜만에 온전한 햇빛을 몸으로 맞이하니 숨통이 틔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배낭에는 오크 족장의 고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잘 잘라져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넓은 나무 꼭대기에서 햇볕이 잘 드는 곳마다 고기를 널었다. 잘 마려서 과연 오크 족장의 고기가 나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나 흥미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 오크족에 대한 잔인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강해져야 원수를 갚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불가피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하다고 마음 먹었다. 

고기를 다 넌 다음에는 신속하게 나무를 내려와 아리온이 기다리는 거실로 갔다. 아리온는 나를 보자 반갑게 말했다. 

"햇볕을 충분히 쬐셨나요? 그럼 우리 함께 마을을 돌아보도록 해요." 
"기대되네요." 

엘프 마을에서는 한참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크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는 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엘프의 궁수들은 과녁에 아주 정확하게 화살을 꽂아넣었다. 대부분이 백발백중의 명사수들이었다. 나는 유별나게 아리온이 활을 잘 쏜다고 생각했었지만 모든 엘프는 타고난 궁수였다. 

엘프 전사 또한 매우 날렵한 동작을 선보였다. 엘프는 끈기와 힘을 요구하는 공격보다는 민첩함이나 정밀한 기술에 특화된 공격을 구사했다. 몇몇 남성 엘프는 방패와 검을 조합하여 방어와 공격을 병행했지만, 대부분은 아리온처럼 단검을 양손으로 휘두르며 현란한 무용을 선보인다. 

궁수와 전사의 훈련 모습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아리온에게 부탁을 했다. 

"저도 엘프족이 만든 활을 하나 구할 수 있을까요? 엘프족은 아주 우수한 활을 만들 줄 알고 신묘한 궁술을 보여준다고 들었거든요.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저한테도 남아 있는 활이 있어요. 제 활을 드리죠." 

아리온의 활은 역시 아주 훌륭했다. 나는 엘프 궁수에 섞여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내 화살은 과녁을 맞추었지만 힘차게 박히지 못하고 떨어졌다.

"아리온, 저는 당신들과 똑같은 활로 똑같이 활시위를 당겨 쏘았지만 화살이 훨씬 못 미치게 나갔네요. 저한테 문제가 있나요?" 
"피터, 엘프족은 항상 자연과 함께 살아가다 보니 수렵에 특화된 삶을 영위해 왔다고 합니다. 활과 친하기 때문에 인간보다 활을 더 멀리 나가게 하는 엘프만의 에너지가 충만하다고 하는군요."

"혹시 엘프족만큼 활을 잘 쓰는 몬스터가 따로 있나요?"
"몬스터와 싸우실 예정이시니 궁금하시겠군요. 사티루스가 우리와 비등한 실력으로 활을 다룰 줄 안다고 하는군요. 피터, 사티루스와 싸울 때는 특히 조심하셔야겠어요." 

"앞으로는 오크 족장에게서 얻은 방패를 쓸 생각입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돨 거예요." 

나는 활쏘기가 아주 유용한 전투기술임을 인정하지만 엘프족과 솜씨를 겨루는 것의 무용함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숲속에서의 하루는 짧았다. 해는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아리온에게 말했다. 

"해가 다 지기 전에 당신 집이 있는 나무의 꼭대기에 다시 가보고 싶네요. 저녁 노을이 아주 장관일 것 같아요. 이번에도 저 혼자 갔다 오고 싶어요." 
"그렇게 하세요. 해가 완전히 지면 조심해서 내려오셔야 해요?"
"알겠어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리온 집 나무 꼭대기에 오르니 오크 족장의 고기는 충분히 말라 있었다. 육포를 급히 거두어들여 배낭에 넣었다. 저 멀리 황혼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고,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산 너머로 주저주저 넘어가는 해를 보았다. 

단순히 내가 원하는 꿈을 꾸려고 하는 것이었는데, 어느덧 나의 모험은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것이 되었다. 과연 나는 용을 물리치고 나의 현실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해가 산을 넘어감과 동시에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와 아리온의 거실로 갔다. 아리온은 아침에 먹었던 신기한 빵은 물론 다양한 과일을 대접해주었다. 나는 빵과 과일을 조금씩 맛보았다. 

"피터, 많이 드세요. 배 고프셨을 텐데요."
"아리온, 인간은 채식만 하지 않거든요. 조금씩은 육식도 해야 한답니다."

"혹시 고블린 고기를 드실 생각인가요?"
"아, 아니랍니다. 다른 고기를 먹으려구요. 아리온이 대접해준 빵과 과일은 너무 맛있어요. 내일 아침에는 충분히 많이 먹을게요."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씻은 다음 오크 족장의 육포를 씹어먹었다. 몇 조각을 먹자 노곤함과 함께 온몸을 화끈하게 덥히는 뜨거운 느낌이 찾아왔고 이내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는 많은 오크들이 서로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크는 아주 번식이 빠른 종족이므로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 자주 싸웠다. 어떤 늠름하게 생긴 오크 대장은 부하를 이끌고 적진을 뚫고 들어갔다. 그는 사방에서 에워싸 달려드는 오크 무리를 향해 검을 넓게 휘둘렀다. 그의 휘두름에 대여섯의 적은 쓰러졌다. 쓰러진 오크를 넘어 무수한 검과 창이 들어왔다. 오크 대장은 방패를 들어 다수의 무기를 막아냈으며 파고들어오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대장은 다시 검을 길게 휘둘렀다. 대장의 얼굴은 가깝게 클러즈업되었다. 나는 순간 그 오크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 오크는 뒤따라오는 부하를 향해 소리쳤다. 

"적이 무너진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