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황산에 가지 않기로 했다. 춘천시 효자동, 60번 고속도로 끝자락에 나란히 있는 그 묘지가 왜 황산이라 불리우는지는 황산에 십몇년째 들락거리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내 할아버지의 부모님, 또 내 할아버지의 조부모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매 명절마다 들르던 그 곳에 이번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황산에는 증조, 고조할아버지 외에도 많은 박씨 집안 사람들이 모여있다. 누구는 조선시대에 높은 벼슬을 했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선비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무덤은 아주 크게 조성돼 있고, 저마다의 앞에는 대문짝보다도 더 큰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비석은 왜 저기 있고, 또 무덤은 왜 저리 크게 지었을까. 아마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표를 최대한 많이 남기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우러러보며 자신이 존재했었음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렸다. 아니면 그들의 자녀들이 자신의 소중했던 사람이 잊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만든 것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실재했다는 몇 안 되는 증표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이 관계의 본질은 결국엔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욕망에 있다. 결혼과 출산은 그러한 욕망이 가장 극대화됐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사람은 같은 동물인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불확실한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린다. 그 불확실함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더욱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하고, 그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래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미래의 다른 지성체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것은 필연이자 본성이다. 내 자아로 행한 사유와 내 몸으로 해낸 행위가 미래에 남았으면 하는 것은 욕망이자 본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년 가는 황산으로의 성묘는 내 선조들의 소박하면서도 웅대한 바램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미래에 나를 기억해줄 사람도 내 작은 바램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지명이랑 성씨는 일부러 실제와 다른 것으로 수정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