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대장은 맹렬하게 전장을 누볐다.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는 기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나도 역시 오크 대장이 된 기분으로 전투를 즐겼다. 

오크 대장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장로가 되었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왕년에 지녔던 전투 재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힘과 민첩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는 작은 마을이지만 장로로서 주민을 보호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어느 날이었다. 오크 장로는 사냥을 나갔던 오크들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의 왼쪽에서 나무 울타리가 부서지더니 엘프 1명과 인간 1명이 넘어오는 것이 보인다. 장로는 자기 주민들을 몰살시킨 주범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분노로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장로는 방패와 장검을 들었다. 과거 전장을 누비며 많은 공훈을 쌓는 데 도움을 주었던 무구들은 이제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될 참이었다. 장로는 알았다. 이번 싸움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오크 장로는 자신의 부하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이제는 전장에 자신만 남을 것을 알았다. 특히 인간이 매우 교활하게 싸운다. 오크인 자신으로서는 도더히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크 장로의 비애감을 느꼈다. 자신의 종족이 모두 쓰러지고 자신만 남았을 때의 외로움과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크 장로와 싸우던 장면은 일순 사라졌다. 오크 장로의 얼굴이 화면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 대신 오크와 싸우는 인간의 얼굴이 클로즈 업된다. 오크 장로는 나에게 말을 했다. 


"인간, 자네가 우리 마을의 전사들을 모두 죽였나? 그리고 나의 살을 먹었는가?"

"그렇다." 


"우리 오크족은 강력한 적군을 싸워 이겼을 때에는 그 몸의 일부를 먹는 전통이 있었지. 그대의 판단을 존중한다."

"지금이 꿈이라는 것을 안다. 당신의 고기를 먹은 후 당신의 마음이 되어 종족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 이제서야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여, 이제 나의 능력을 자네에게 주겠다. 나는 자네가 내 능력으로 우리 종족과 싸울 것을 안다."

"그것은 내가 어머니와 이웃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다."


"나도 이해한다. 복수는 숭고한 것이지. 우리 모두는 복수의 의무를 지고 있다. 다만 자네가 여성 오크와 아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오크는 전쟁에서는 어떤 생명도 남기지 않았었지."

"여성과 아이들은 차마 죽일 수 없었다."


"자, 내 능력으로 우리 종족을 죽이더라도 여성과 아이들은 살려주기 바란다. 자 그대에게 내 능력을 주노니 이제 눈을 편안히 감고자 한다." 


나는  다시 온몸에 뜨거움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손끝과 발끝까지도 따뜻해졌고, 뭔지 모를 강인한 힘이 나의 몸을 가득 채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잠시 잠겼다. 아리온은 아침식사로 나를 초대했다. 양배추와 비슷한 채소였는데, 훨씬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과일과 빵도 먹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자 이내 전투훈련을 하고 싶었다. 


"아리온, 어제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아요. 빨리 전투훈련을 하고 싶군요." 

"피터, 어제도 많이 피곤했을 텐데요. 지금쯤이면 모두 모여 활쏘기와 근접전투 연습이 한창이겠네요. 함께 나가게요."


나는 오크 장로의 방패와 장검을 들었다. 아리온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터,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세요. 방패와 장검을 한 손에 들고 싸우기가 부담스럽지 않나요? 특히 그 장검은 한 손으로 마음대로 휘두르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군요." 

"아리온, 그렇지 않아요. 자 한 번 보세요."


나는 무거운 장검을 한 손으로 들어 빙글빙글 휘둘러 보였다. 장검은 내 손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돌아갔다. 아리온은 신기하다는 듯 말한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들고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 하던 것이 기억나는데, 어느새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셨군요. 좋아요. 함께 연병장으로 가요."


엘프 마을의 중앙에 있는 연병장에는 벌써 많은 궁수와 전사가 전투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아리온에게 전사로서 유능한 엘프 기사와 대련을 하겠다고 했다. 아리온이 전달하는 말을 들은 엘프 훈련대장은 자신감 충만한 내 모습을 다소 의아하게 처다보더니 이내 나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하겠다는 듯 굳은 결의를 다지며 대답했다.

"그대가 그렇게 전투를 체험하고 싶어한다면 그대의 능력에 걸맞는 상대를 붙여주도록 하지. 자 하룬!"

"대장님, 감사합니다."


나는 즉시 광장 중앙에 섰다. 방패와 장검을 각각 한 손에 단단히 쥐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내 앞으로 강인한 인상을 보이는 엘프 기사가 다가와 섰다. 엘프 전사는 강하게 검을 내려쳤으나 나는 가볍게 방패로 막고 바로 공격을 가했다. 나는 큰 부담 없이 엘프 기사를 연습장 외로 몰아냈다. 엘프 전사는 당황하며 다시 전투를 요청했다. 2회차에서는 더 짧은 시간에 엘프 기사를 무릎 굻게 했다. 


엘프 훈련대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점점 더 강한 기사를 호명했다. 나는 각각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전혀 힘든 기색도 하지 않았다. 나도 내 실력이 갑자기 상승한 것에 대해 내심 놀랐다. 내가 승리할수록 마을은 소란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마을의 엘프가 대련장으로 모였다. 


마침내 나와 대항할 엘프 기사는 없었다. 훈련대장을 크게 소리쳤다. 

"아리온, 당신만 남았군요. 자 인간 전사와 싸워보세요."

"대장님, 저는 거부하겠습니다. 피터는 제 집에 초대되어 온 손님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는 저보다 더 강한 전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인간 전사와 싸워야겠네요."

훈련대장은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방패와 긴 창을 들고 대련장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마을 엘프들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훈련대장의 창은 아주 날카로웠다. 방패를 뚫을 듯이 밀려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방패로 가릴 수 없는 얼굴과 다른 신체의 일부는 조그만 틈만 나더라도 창의 공세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일진일퇴를 반복했을 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나와 훈련대장의 전투는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었고 시간은 많이 흘러 이제는 체력 싸움으로 변했다. 상당히 배가 고파왔고, 온몸은 에너지 고갈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나뿐만 아니라 훈련대장 또한 상당한 체력 소모에 시달렸기 때문에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땅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두 사람에게 아리온이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무승부로 해야겠군요. 이 번 싸움은 아주 훌륭했어요.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은 두 분 모두에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겠어요."

"아리온, 너무 배가 고파요."


아리온은 급히 주변의 오크에게 사과 쥬스를 든 가죽부대를 가져오게 해서는 나와 훈련대장이 실컷 마시게 했다. 나는 사과 쥬스를 마신 후 한참을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어와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로 덮인 하늘은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벌써 저녁이 찾아온 것이다. 아리온이 내 어깨를 두르리며 말을 했다.

"피터, 오늘 저녁에는 장로님께서 모든 엘프 전사를 모아 회의를 합니다. 저는 회의에 참석할 테니 제 집에서 편안히 계세요."

"아리온, 혹시 저도 참석할 수 있을까요?"

"아직 인간이 엘프족의 회의에 참석한 전례가 없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인간이 엘프의 초대를 받아 마을에 온 적이 없이 때문이겠지요. 장로님께 특별히 부탁을 드려보죠. 피터, 당신이 엘프의 친구인 만큼 반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나는 충분히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리온과 함께 엘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엘프 장로가 나에 대해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온에게 회의 주제에 대해 물으니 이미 짐작하고 있었듯 내일 오크와 전쟁을 벌일 때 갖출 전투 대형에 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