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 마을에는 모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큰 회관이 있었다. 엘프 마을에서 장로의 권위는 독재국가에서 절대권력자가 갖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민주국가 의회의 의장이 갖는 권한과 비슷했다. 물론 지금과 같이 오크족과 전투를 벌이는 전시상황에서는 장로는 평소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곤 했다. 하지만 전시에 장로가 행사하는 권력은 마을마다 달랐고, 아리온이 속한 마을의 장로는 다른 마을보다 더욱 민주적인 편이었다. 


엘프 장로는 마을 회관이 거의 모든 마을 주민이 보인 것을 한 눈으로 쭉 훑어보더니 연설을 했다. 

"여러분, 내일 있게된 오크족과의 전쟁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엘프족은 5개 마을이 연합을 해서 오크족의 20개 마을 연합체와 전쟁을 벌일 예정입니다. 우리의 전력은 700명 정도가 될 것이고 적의 전력은 우리보다 7배가 많은 4천900명입니다. 오크와 엘프의 개인적인 전투력을 감안할 때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크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승인한 것이고요."

모든 엘프 전사들은 소리쳤다. 

"장로님, 맞아요. 우리는 충분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을은 진영의 맨 중앙에서 서서 좌우익을 맡는 다른 마을보다 앞서 적에게 나아가 적의 중군을 돌파할 예정입니다. 그런 만큼 우리 마을 전사의 역량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쐐기 역할을 것입니다. 우리 마을 최전방에는 훈련대장과 그 엘리트 기사단이 할 것입니다. 이에 이의가 없으시죠?"

"예, 맞습니다. 엘리트 기사단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강인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당연하지요." 


그 때 아리온의 옆에 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장로님, 저도 이번 전투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크족을 무찔러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저한테 기회를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피터, 감사합니다. 우리 엘프의 일원이 아니시면서 이렇게 전투에 참가하신다니 더없이 감사합니다." 

"장로님, 저는 전투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엘리트 기사단과 함께 최전방에 서고 싶습니다. 제 전투력에 대해서는 훈련대장님께서 증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장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의 몸집과 궁술 등을 종합할 때 그리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훈련대장님, 과연 그런가요? 인간 피터의 전투력이 엘리트 기사단에 필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로님, 이 인간의 전투력은 저와 대련을 해서도 조금도 물러남이 없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저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면 충분히 최전방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훈련대장의 인정을 받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아리온이 소리를 쳤다. 

"장로님, 저는 방패를 든 기사 타입이 아니라 최전방에 서지는 않지만 그 바로 뒤에서 전투에 임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장로는 아리온의 굳은 결의를 보고 허락했다. 우리는 저녁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빵, 과일과 채소를 먹었다. 잠을 잔 후 아침에 깨었을 때는 평소보다 더 상쾌한 기분이 들어 오크와의 결전의 날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오크 장로에게서 얻은 방패와 장검을 장만했고 혹시 오늘 있을 전투에서 얻을지도 모르는 나만의 "전리품"을 대비하기 위해서 가벼운 배낭을 등에 매었다. 


엘프족은 숲 깊숙한 곳에서 집결하여 전장으로 속속 진격했다. 엘프와 오크는 숲이 아니라 대규모 회전을 하기에 적합한 넓은 평원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대치하였다. 


오크는 숫적인 우위를 무기로 삼아 엘프족을 포위 섬멸하는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보였다. 오크의 진영을 엘프의 진영보다 더 넓게 퍼졌다. 엘프의 중군이 적을 강력하게 무찔러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숫적인 열세 때문에 오크의 좌우 병력에 의해 쌈싸먹히기를 당해 전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개별적인 전투능력으로 보면 엘프가 오크보다 월등했지만, 다수의 오크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어 보였다. 이 경우에는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속도가 문제였다. 돌파한 후 신속하게 벌어진 오크 진영의 측면을 연거푸 격퇴한다면 적의 숫적 우위를 압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크족은 활을 사용하지 못한다. 사실 오크가 쏘는 활은 아주 조합한 것이기 때문에 사정거리가 짧아 거의 유효한 원거리 공격수단이 되지 못했다. 전투는 오크의 뿔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오크의 전사는 신속하게 뛰어 적과 칼과 칼을 맞대는 근접전을 펼치는 전법을 구사했다. 엘프족은 오크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최대한 화살을 퍼부었다. 맨 앞줄이 큰 방패를 높이 처들고 진격해 왔지만 그 뒷줄부터는 방패가 없었기 때문에 엘프의 화살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또 오크는 빠른 속도로 뛰어왔기 때문에 화살을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 했다. 


나는 최전방에서 엘프의 엘리트 기사단을 이끄는 대장 옆에 섰다. 모든 오크는 사정거리가 긴 활을 쥐고 연거푸 화살을 쏟아냈지만 나는 오크가 가까이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화살은 역시 나의 특기가 아니었다. 오크들은 엄청난 인해전술에 따라 화살 공격의 피해를 충분히 감수하면서 바로 수십 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는 우리도 뛰어나아가 적의 중군 돌파를 시도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엘프 대장은 소리쳤다. 
"지금이다. 돌격하라."


나는 엘프 대장의 오른쪽으로 해서 방패를 앞세우며 달렸다. 나의 방패와 오크 전사의 방패가 부딪혔다. 내 몸의 충격으로 적의 방패가 순간 밀렸다. 오크 방패가 밀려 틈이 벌어지자 나는 몇 걸음 전진할 수 있었다. 내 왼편으로는 엘프 대장에 적을 튼튼하게 방어하고 있는 사이, 내가 몇 걸음 전진했기 때문에 내 오른편에는 오크 병사가 노출되었다. 나는 측면이 노출된 오크 병사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적의 목은 일격에 잘려졌다. 나는 즉시 쓰러진 오크의 빈 공간으로 몸을 날리며 내 방패를 밀고 있는 방패의 주인인 오크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런 연쇄작용으로 오크의 최전방이 뚫리기 시작했다. 


엘프 대장도 앞을 막고 있던 오크 병사를 서넛 처리했다. 앞을 보니 오크군의 사령관을 호위하는 엘리트 병사의 무리가 보였다. 엘리트 오크들은 보조 병사가 건네주는 단창을 들어 수차례 우리 쪽으로 던졌다. 우리는 쏟아지는 단창에 일순 당황했지만 방패로 몸을 가리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엘리트 오크는 단창 공격의 효력이 없자 방패와 대형 도끼를 뛰어왔다. 서너 명의 오크가 내려치는 도끼들의 세례에 방패가 마치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나는 방패와 함께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오크의 방패와 방패 사이에 있는 틈을 찾아내어 교묘히 장검을 찔러넣었다.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장검은 엘리트 오크의 배를 파고 들었고 내가 장검을 빼내자 배가 뚫린 오크가 쓰러졌다. 


나는 엘리트 병사들 사이에 생긴 틈으로 파고 들었는데 내 바로 뒤에서는 아리온이 양손에 단검을 들고 따라왔다. 아리온는 방패 사이를 뚫고 엘리트 병사의 틈에 섞이게 되자마자 현란한 검무를 추면서 순식간에 서너명의 엘리트 오크를 쓰러뜨렸다. 아리온을 따라 엘프 양손 검객들의 신속한 솜씨는 대단했다. 방패의 진이 뚫린 이상 한 손에 방패를 들고 다른 손에 도끼를 든 엘리트 오크는 날렵한 양손 검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엘리트 오크의 숫자가 거의 줄어들었을 즈음 이를 지켜보던 오크 사령관이 장검을 양손에 들은 채로 뛰어들어왔다. 오크 사령관은 육중한 몸집에 맞지 않게 엄청난 민첩성을 보여주었다. 엘프족 중에서 가장 날렵하다고 하는 아리온의 민첩성에 맞먹는 속도로 휘둘리는 장검의 긴 리치가 힘을 발휘하자 오크 사령관이 한 번씩 몸을 놀릴 때마다 엘프 양손 검객은 하나 둘씩 쓰러져갔다. 아리엘은 오크 사령관의 긴 장검의 궤적 안으로 들어갔다. 오크 사령관은 일순 당황했지만 바로 다른 검을 휘둘러 아리엘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아리엘은 머리 위에서 단검으로 오크 사령관이 후려치는 장검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몸으로 지탱할 수가 없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아리엘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오크 사령관이 장검을 들어 넘어진 아리엘을 내려치는 순간 나는 몸과 방패를 날려 그 장검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제 적의 수장은 나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양손에 들린 장검은 무지막지한 속력으로 내 좌우로 내리찍었지만 나는 방패와 검으로 맞서며 앞으로 전진했다.  오크 사령관이 장검으로 방패를 내리찍을 때 이를 막는 동작과 동시에 오른손의 장검을 뻗어 적의 옆구리를 찌르는 척했다. 적은 움찔하며 옆으로 돌았으나 나의 검은 즉시 방향을 바꾸어 적의 옆구리를 스쳐 올라가자마자 적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오크 사령관의 측면으로 3미터쯤 전진해서 멈추었다. 오크 사령관은 종아리가 잘려 땅으로 구르며 마구 검을 휘둘렀지만 나까지 닿지 못했다. 그는 나를 향해 장검을 던졌지만 나는 방패로 막아낼 수 있었다. 나는 발버둥치는 그에게 다가가 나머지 한 손에 들린 장검의 공격을 막자마자 검을 휘둘러 목을 베어냈다. 


나는 즉시 아리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리온,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피터, 당신이 제 생명을 구했군요. 고마워요. 저는 칼에 베인 상처는 전혀 없어요.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어요."


아리온은 두 발로 일어서 다시 전투에 임했다. 나는 아리온과 동행을 하면서 오크 전사와 싸웠다. 아리온은 여전히 멋진 검무를 추며 오크족을 하나 둘씩 쓰러뜨렸다. 


오크 사령관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황은 급속도로 엘프쪽으로 기울었다. 엘프의 엘리트 기사단은 중앙을 완전히 돌파한 옆 방향으로 지나가며 오크 병사들을 도륙했다. 오크 병사들은 전황이 불리해진 것을 깨닫자 대대적인 후퇴를 했다. 적의 후퇴가 개시됨과 동시에 전투는 1대 1의 공방전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륙으로 변모되었다. 다만 엘프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지는 못했을 뿐이다. 


엘프족의 전사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던 반면, 적은 절반 이상이 사망했고 그  나머지의 태반이 부상을 입고 멀리 도망쳤다.  오크가 완전히 도망치자 엘프는 더 이상 오크를 추격하지 않았다. 전투가 의외로 빨리 결론났기 때문에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엘프족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모였던 장소에 다시 모여 함성을 지르고 마을 단위의 부대별로 흩어졌다. 나는 아리온에게 말을 했다. 

"아리온, 제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는 오크 사령관의 주검이 있는 곳에 잠시 갔다올 테니까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우리 엘프족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주 험오스러운 일을 하시려는 거군요. 하지만 각 종족마다 관습과 삶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저는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다녀오세요."  


마을의 엘프 전사들은 떠났고 아리온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오크 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가 그의 두 장검을 습득했고 허벅지의 살을 조금만 베어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몬스터의 신체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데에는 많은 양의 살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온에게 되돌아갔을 때, 아리온은 내가 오크 사령관에게서 전리품을 취한 것이 별일도 아니라는 듯 천진스럽게 내 얼굴을 보더니 말을 했다. 

"피터, 오늘 평소보다 훨씬 잘 싸우셨군요. 전투력이 매우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시네요. 혹시 이런 전투력 상승이 우리 종족이 이단시하는 어떤 행위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항상 지지하니까요."

"아리온, 엘프족은 남녀가 모두 전사의 기질을 지니고 있더군요. 엘프 여성의 검무는 아름다움과 날카로움을 겸비하고 있어요." 


엘프 마을에 귀환하니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고 마을 전체가 승리의 기쁨으로 들떠있었다. 마을에 닿자마자 전장의 피로가 온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리온이 마련해준 방의 침대에 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에는 말린 오크 사령관의 살은 섭취하여 과연 전투력이 얼마나 상승하는지 실험을 해보았다. 급격한 상승은 아니었지만 힘과 민첩성에서 조금씩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크 장로보다는 오크 사령관이 더 잘 싸웠고 만약 전장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가 오크 사령관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는 이것에서 멈출 수 없었다. 용을 이기기에 충분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