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은행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도착하자마자 외투는 의자에 대충 걸어놓고 타자기와 종이를 찾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타자기를 앞에 두고 고민하면서….”

 

 일단 뭘 추가로 덧붙이면 좋은 소재가 될지 고민하면서 내 과거를 떠올렸다.

 

 난 은행원 아버지와 시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내게 풍요롭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금전관념부터 회계학, 세상의 흐름을 보는 법 같은 것들을.

 

 그렇게 난 아버지를 따라 은행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덕분에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법, 좋은 시와 글의 가치 같은 것들을.

 

 어머니는 내게 좋은 글들을 많이 읽어볼 기회를 주셨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그리고 에드거의 시와 같은 다양한 글들을.

 

 덕분에 나는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라나면서 소년의 티를 벗기 시작하자 엄한 선생님 밑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그 박학다식한 노파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보다도.

 

 선생님은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어서 아무리 말썽꾼이라도 절대 매를 들지는 않았다.

 

 좋은 선생님이긴 했지만 내가 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노파에게 음악과 문학, 예술이라는 것은 사치였다.

 

 아버지는 어른이 될 때까지 조금만 참고 선생님 뜻을 따르자고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못했다.

 

 또 어머니는 에드거의 시는 몇 번 보여준 적은 있었지만 결코 그의 소설을 읽게 하지는 않았다.

 

 이유를 물어봐도 ‘읽을 가치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와서 내 호기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는 ‘고자질쟁이 심장’, ‘검은 고양이’와 같은 작품들을 직접 용돈으로 구매해서 몰래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게 책들은 고자질쟁이 심장의 주인공처럼 바닥을 파내 만든 빈 공간에 숨겼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들키게 되었다.

 

 그날 난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고, 숨겨놓았던 에드거의 책들은 모두 벽난로 땔감이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시절이 아닐까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른이 되어서는 은행원 일을 병행하며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고 간단한 시부터 시작했다.

 

 좋은 소재가 떠오를 때마다 하나씩 쓰면서 점점 분량을 늘려나갔다.

 

 그리고 아솔을 만날 즈음에는 적당한 소재를 찾아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이야기부터 돈으로 사랑을 사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소재로 나름대로 단편을 써냈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아솔과 직장동료들은 내가 시와 단편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쓴 글에 흥미를 보였고, 내가 직접 보여주자 한 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우리끼리 보기 정말 아깝다며 한 번 신문사에 투고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난 그들의 말에 따라 한 번 시와 단편들을 신문사에 투고했다.

 

 처음에는 별반 반응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의외로 내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은행 업무 중에 날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길 가다가 누군가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인세도 나쁘지 않게 받았다.

 

 편집장이 아예 연재를 하면서 더 많은 인세를 받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로 하는 일이었던지라 거절하고 지금도 계속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도 글을 보내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편집장은 내가 올 때마다 반가워한다.

 

 하지만 겨우 시나 짧은 단편 따위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셰익스피어나 단테와 같은 거장이 될 생각도 없다.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고.

 

 하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희미하게나마 기억해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장편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뭘 써보려고 하다가 금세 흐지부지되고, 재밌는 소재들을 단편으로 쓸 수는 있지만 장편은 물론, 중편도 힘들었다.

 

 ‘솔직히 내가 장편 소설을 못 쓰는 게 아닌가?’

 

 일단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무시하고 계속 글에 집중한다.

 

 “으음, 나쁘지 않아. 조금 다듬으면 좋은 소재가 될 것 같은데?”

 

 가난한 시인을 소재로 삼아 어떻게든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지만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든다.

 

 혹시 과거의 기억들을 헤집어 더 덧붙일 만한 게 없을까 고민했지만 오늘도 한숨만 나왔다.

 

 결국 수많은 고민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 누웠다.

 

 머릿속이 점점 흐릿해진다. 수많은 생각들이 안개처럼….

 

 

 

 문득 또렷한 정신으로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눈앞에 수많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들이 가득하다.

 

 “뭐야? 여기는 내 방이 아니잖아?”

 

 난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분명 정신이 몽롱해졌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아, 아무래도 그때 잠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난 침대에 누워서 잠들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꿈을 꾸고 있어.’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니까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 꿈속의 도서관의 규모는 정말 거대한 것 같다.

 

 책장 하나의 높이만 어림잡아 10m는 되어 보이고, 주변은 온통 책과 높은 책장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건가?’

 

 물론 꿈인데 사람 한 명 없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쿵!

 

 갑자기 누군가의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