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자네는 이 책을 읽어본 적 있나?”

 

 “이 책은 이스마엘 멜빌의 모비 딕 아닙니까?”

 

 모비 딕, 이 책은 이스마엘 멜빌이 포경선 선원이었을 적의 경험을 살려 쓴 책이라고 한다.

 

 호손이 이스마엘을 고평가했다고 해서 한 번 읽어보았던 적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허먼 멜빌이네.”

 

 “허먼 멜빌?”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이름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 모비 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그래. 다른 세계의 멜빌이 쓴 모비 딕이지.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에이해브가 누군지는 아나?”

 

 “피쿼드호의 선장 아닙니까?”

 

 에이해브, 모비 딕에 대한 복수심과 분노에 불타는 선장이었다.

 

 선원들을 이끌고 선동하며 모비 딕을 사냥하기 위해 바다를 항해했지만 결국 모든 선원들과 함께 수장되었다.

 

 단 한 명, 이스마엘 멜빌을 제외하고.

 

 그가 수장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래. 모비 딕과 멜빌처럼 에이해브도 수많은 세상에 존재하네.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단순한 창작물의 형태부터 진정 숨 쉬는 한 명의 인간의 형태까지. 하지만 그 수많은 에이해브들은 전부 똑같지.”

 

 “결국 다 거기서 거기라는 소리군요.”

 

 기사는 워해머를 쥔 손을 꽉 쥐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모두 복수심에 불타는 광인들이지. 동시에 제 그릇도 모르는 아둔한 자들이기도 하네.

 

 하지만 그 어느 에이해브들도 서로의 경험과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아.

 

 각자의 에이해브는 고유한 존재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던 기사는 나를 향해 시선을 낮췄다.

 

 “당신도 마찬가지고.”

 

 “네?”

 

 “세상 어디에도 당신의 기억과 경험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어. 다른 세상을 둘러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대화의 초점이 에이해브에서 나로 옮겨졌다.

 

 “그것부터가 이미 당신이 특별하다는 증거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경험들은 오직 당신만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네.”

 

 기사는 모비 딕을 다시 책장 속에 집어넣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낮춰보지 말라고.”

 

 “네.”

 

 “그리고 굳이 장편소설에 집착할 필요도 없어. 사람마다 각기 가진 재능은 다른 법이야.

 

 당신처럼 누구는 단편을 잘 쓰고, 누구는 장편을 잘 쓰고, 또 누구는 장황한 서사시를 잘 쓰는 것처럼.

 

 물론 연습하면 더 나아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자신 없는 분야에만 매달리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지.”

 

 난 어느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자신 있는 분야에 열중했다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어.”

 

 “좋은 조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일면식도 없는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하하,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지.”

 

 기사는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옛날 생각?”

 

 “사람은 수고하는 한,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통 받으며 좌절하는 것을 반복하지.”

 

 기사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구절을 변형해 인용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홀로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데다, 오히려 더욱 깊숙이 빠져드는 경우도 있으니까.”

 

 기사는 마치 이미 다 직접 겪어보았다는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그때 우리는 타인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법이야.”

 

 “예전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신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래. 그녀 덕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

 

 “그녀?”

 

 “육체는 연약해도 마음은 철벽같은 사람이야. 그것만 알아둬.”

 

 대충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결국 깨어나서 이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위로들이 무슨 소용인가?’

 

 무의미한 일일 텐데도 이렇게 조언을 해주는 기사를 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제가 잠에서 깨어나면 이 위로들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내가 말했듯이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다만 깨어나서 떠올리지 못할 뿐이지.”

 

 “그러니 이미 변한 마음가짐은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

 

 “아, 이제 슬슬 떠날 시간이네.”

 

 “예. 정말 감사했습니다.”

 

 “잠깐, 떠나기 전에 혹시 자네가 쓴 단편소설들을 말해줄 수는 없겠나? 나중에 따로 찾아보려고 하는데.”

 

 “일단 ‘크리스마스 선물’부터 ‘황금과 사랑의 신’, ‘마녀의 빵’….”

 

 그러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이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도 밖으로 나가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타자기 앞에서 난 눈을 감고 다시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박학다식한 늙은 노파가 수업하던 모습과 장작이 되어 불타버린 에드거의 책들을.

 



 (작가의 말)

 이야기를 쓰면서 대체역사물 요소도 섞었는데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에게서 모티브를 따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