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오천가의 생존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소!”

뭣이!”

 

개방주 곽충이 정도맹의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소리치자모여 있던 십이파 삼방의 수장들이 기겁했다.

 

천가의 생존자라면 분명 선대에서 씨를 말리지 않았소?”

귀주의 작은 현에서 소작농으로 위장하여 살고 있었다 하오!”

당장 병력을 보내야 하네!”

 

무당파의 호원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천가라면 분명과거 존재했던 마교 교주의 가문이던가?”

맞네정확히는 대대로 마교의 신인 천마를 배출하는 가문이지.”

그게 다른 건가요?”

다르지.”

다르고 말고.”

그런데 천가의 핏줄이 남아있다 한들이미 묻어버린 마교를 홀로 부흥시키지도 못할 텐데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지요?”

모르는 소리천마는 마교의 중심일세마교 없는 천마는 있어도천마 없는 마교는 있을 수 없단 말일세신이 없는 종교가 유지될 수 있겠나?”

신도 없는 신이 무엇을 하겠어요불안에 떨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여령멍청하면 티 내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네형산의 장문인은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모르니 아예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화산파의 현진이 면박을 주자 모산파 여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저를 모욕하신 건가요?”

모산파는 천마에 대한 기록이 없나이래서 구파일방에도 못 들었던 근본 없는 문파는… 됐네지금 중요한 건 천가를 없애는 일이니.”

대답하세요!”

조용히 하게천마가 부활할 가능성을 삭초제근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야!”

 

정파가 마도에 짓눌려 구파일방으로 불리던 시절천마의 위험을 기록한 선대의 경고를 봤던 이들은 천가의 핏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여령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일인 줄도 모르고 내뱉는 헛소리를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현진에게 자신이 모욕당했음에도 다른 이들이 오히려 자신을 타박하자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무어라 말도 못 하고 부들거리다 회의실을 나갔다남은 이들은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신경은 썼지만 천가의 생존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기분이 상한 것보다 중요한 안건이었다.

 

***

 

천진호는 항상 아버지 천정우가 자신을 보는 눈이 이상하다 느꼈다.

후회와 미련이 질척하게 담겨오롯이 천진호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겹쳐보는 듯한 눈.

천진호는 그 눈이 싫었다.

아버지의 눈에 있는 감정 중 가장 짙게 배인 건다름 아닌 미안함이어서.

 

그래서였다.

천진호는 최대한 천정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굳이 눈을 보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지장은 없으니까.

그들이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적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소작농인 천정우는 새벽같이 나가 밭일을 하고, 달이 뜨면 돌아와 잠들었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러리라 믿었던 일상.


그러나 일상이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밭일을 하던 천정우는 곡정현 초입에 무인들이 잔뜩 들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올 것이 왔다.

 

그는 농기구를 내팽개치고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방 안에서 서책을 읽던 천진호가 해도 지지 않았는데 벌써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분히 설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천정우는 마루를 들어 그 안에 숨겨두었던 검을 꺼내며 말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외우라 한 것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

 

천정우가 무엇을 묻는지는 뻔했다천진호가 그를 아버지가 아닌아빠라고 부르던 때부터 외워야만 했던 무수히 많은 구결들외우다 지쳐 한 번은 무림인이 되어야 하냐며이건 대체 무슨 구결이냐 물어본 적도 있었다.

천진호의 질문에 아버지는 그런 의문을 가질 시간이 있으면 한 자라도 더 외우라며 말했다.

평범한 소작농이 어떻게 이런 복잡한 무공 구결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궁금했지만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천진호가 차라리 밭일을 돕겠다며 따라나서면 아버지는 집에서 나오지 말고 구결을 잊을 일 없게 계속 보라며 돌려보냈다.

 

책등이 한 자는 될 정도로 두꺼운 서책이 무려 스물일곱 권에 달하는 구결들은 끝까지 읽기만 해도 나흘이 걸린다.

한 권을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열 곱절은 걸렸다.

그마저도 완벽히 외웠다 말하긴 힘들었다.

세세한 부분이라도 틀리지 않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전부 외우고 있습니다.”

 

천진호는 자신 있게 답했다.

그가 구결을 외우는 데 쓴 시간이 얼마나 되던가앉으나 서나밥을 먹거나 용변을 볼 때에도 서책을 손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다그는 이제 자다가도 3권의 107쪽 82번째 줄에 어떤 구결이 적혔는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었다.

책에서 눈을 떼고 허공을 보아도 구결의 한자들이 환각처럼 맴도는 지경이었다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쏟고도 외우지 못했다면 지능에 하자가 있는 것이다.

 

이름을 버려라.”

?”

 

뜬금없는 말에 천진호가 왼쪽 천장을 기어가는 벌레에서 눈을 떼었다.

천정우는 당황한 천진호의 얼굴을 잡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들의 눈은이다지도 검었던가.

이젠 보지 못할 얼굴.

이리도 허무하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자주 볼 걸 그랬다.

지나온 날들이 새삼 아쉬웠다.

천가는 남김없이 죽임당한 것처럼 위장했고잘 속여넘겼을 텐데 어떻게 찾아내었는지.

집요한 것들.

 

힘을 되찾기 전까진 네가 천가의 피를 이었음을 들키지 마라저 아래십만대산의 야율가에 찾아가신이 돌아왔다 전해라그 뒤는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천정우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결지를 만들어 천진호의 이마에 대었다.

그의 입에서 형태는 갖추었으나새외 오랑캐의 말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고단숨에 소화하기엔 불가능한 정보의 홍수가 천진호의 뇌리에 강제로 각인되었다눈을 감고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던 천진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천정우가 사라진 후였다.

멀리서 병장기 여럿이 부딪히는 굉음이 들렸다.

 

천진호는 머릿속에 집어넣은 구결이 적힌 서책들을 화로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그의 인생이었던동시에 그의 세상이었던 서책이 불타오르는 광경은 후련하면서도 어딘가 해선 안될 짓을 하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천진호는 집을 나서기 전마지막으로 화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새겨진 정보를 되새겼다.

아버지가 세뇌시키듯 외우길 강요했던왜 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구결들은-

 

천마신공의 단초였다.

 

 

 

천마신공.

그런 이름으로 알려졌던 무공의 이름은 사실 천마심공이었다.

애초부터 천마신공이 만들어진 이유는사마외도의 무공에 대한 기억을 넘겨주기 위함이었다초대 천마가 후계에게 마교를 물려주려 창안한천마를 걸어 다니는 마공 백과사전으로 만드는 심공.

성능이 과하게 좋아천마심공을 익힌 이의 경험까지 함께 전수하는 전무후무한 심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따라서 신공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이것이 신공이 아니라면 무림엔 신공이라 불릴 무공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마심공 때문에 천마는 그 자체로 마교의 신이었으며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불세출의 무력을 선보였다.

 

천마신공을 이어받은 천진호도 마찬가지였다.

만사신검잔혼비섬검천마군림보수라파혈권마라혈해공산무귀흔영 등등.

사마외도의 무공이라면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혈교의 무공이나후계를 찾지 못한 일인전승 문파의 실전된 무공까지 전부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정파의 간자를 처단하거나황궁과 결탁하여 마도천하를 이루거나정사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제3세력으로 끼어들어 정사가 합심해 무림맹이 세워지는 계기를 제공한 일 등무림을 몇 번이고 넘봤던 전대 천마들의 다양한 경험도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알고 있는 무공과 경험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그를 뒷받침해 줄 내공은 오롯이 수련을 통해 쌓아야만 하는 것을.

과거의 천마들은 천마를 이어받자마자 부족한 내공을 마교에 산처럼 쌓인 영약을 먹어 때웠었다게다가 마교가 융성하던 시절에는 기틀을 다질 마공으로 내공을 미리 축적하기도 쉬웠고.

 

아버지의 명을 따라 숨어 살던 천진호는 그럴 여유가 없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에겐 오랜 세월 십만대산을 샅샅이 뒤져 하수오 한 뿌리까지도 캐내 모아둔 마교의 본단도자신을 대신해 영물의 배를 갈라 내단을 꺼내올 심복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마 역대 천마 중 가장 약하리라.

 

천진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나섰다.

아버지가 검은 마기를 줄기줄기 흩뿌리며 무인 여럿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 길을 나서면더는 마주칠 수 없겠지아버지는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벌써부터 힘에 부치는지검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도 그의 몸엔 잔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무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오솔길로 돌아 곡정현을 나왔다.

아버지의 눈이 이쪽을 잠시 스친 것도 같았다.

 

가장 먼저 야율세가를 찾아가야 했다.

십만대산 아래에 있을 야율세가로 향하는 길은 천진호에겐 생소한 풍경이었다.

비단 그가 평생을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천마신공의 구결만 외웠기 때문이 아니라전대 천마의 기억에 있는 귀주는 대부분 관도가 이어져 개발되기 이전의 낙후된 마을이었던 탓이다.

천마신공의 계승자였던 천정우 역시 곡정현을 벗어나지 않고 남들의 눈을 피해서만 무공을 수련해와 이 길을 실제로 걸어보는 천마는 이백 년 만이었다.

 

아버지가 타고나기만 했더라면.”

 

천마로 인정받기 위해선 시험을 치러야 했다.

천마의 가장 충직한 칼이자자격 없는 자를 걸러내는 감시자사대 마가의 수장이었던 야율세가의 후계자에게.

 

천마의 자격은 천가에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첫째천씨의 아이 중 무를 익히기에 가장 완벽한 육체로 태어나야만 했다.

무림은 그것을 천무지체라 부른다.

 

천마는 사마외도의 무공을 한몸에 익혀 무엇이든 사용하는 존재.

다양한 무공을 구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당연히 천무지체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지 않거나천가가 아닌 정파나 사파의 인물이 천무지체를 지녔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천마의 자리는 그대로 공석으로 비워두었다.

 

둘째로초대 천마의 마공이 깃든 신검을 쥐어야 했다.

그것은 십만대산의 봉우리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천가의 피를 잇지 못한 정통성 없는 이가 신검을 함부로 쥐었다가는마기가 전신의 혈도를 난도질해 죽을 테니까.

 

마지막 셋째는시체의 방이었다.

시체들이 널브러진 방에 갇혀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구일 밤낮을 버텨야 한다.

 

천무지체를 두 세대가 연속으로 가지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천마에서 다음 대 천마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계승은 행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야율세가의 감시자를 찾아가야 했다.

 

대대로 대호법을 맡을 정도로 천마에게 가장 충직한 가문.

당대 천마의 자격을 심사하고불합격한 이를 처단하는 마교의 검.

그에게 인정받아야 진정한 천마로서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천무지체를 타고나는 것에 비하면 나머지 두 시험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천정우도 천무지체가 아니어서 마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눈에 담긴 미안함은그래서였으리라.

어려서부터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시간이 후회되었다.

 

차라리 천진호에게 재능이 없었더라면천정우를 따라 곡정현에서 소작농으로 살다가 후대에 천마신공을 넘겨주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

그의 재능이 하늘에 닿아 다시 인세에 내려온 신으로서마교를 부흥시킬 사명을 갖고 천마가 되어야 할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온전한 나의 인생을 살지 못할 미래를 짐작한 아버지의 미안함을.

 

그리고그는 일생을 바쳐서 당대 천마의 계승을 이루어내었으니.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마교를 부활시킬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야율세가의 감시자와 만나봐야겠지.

 

-똑똑.

 

허름한 문을 두드렸다.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고곧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초췌해 보이는그러나 눈빛은 날카로운 사내였다.

 

“...누구지?”

당대 천마다.”

돌아가라.”

 

!

 

야율가의 문이 닫혔다.

천진호는 어안이 벙벙해 눈을 꿈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