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이 나간 천진호는 굳게 닫힌 야율세가의 문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무언가 잘못 말했나?

여기가 야율세가가 아닌가?

 

이곳은 천마가 죽은 이후 야율세가의 후손이 기다리는 안가일 터였다.

야율세가를 찾아가 신이 돌아왔다 전하라고아버지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있을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까 마교의 정보 조직을 찾으라거나하오문에 야율세가에 대한 의뢰를 넣으라거나 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텐데.

저 사내는 뭐지?

 

-똑똑똑!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천진호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조금 더 힘을 실어서.

 

벌컥!

 

길게 뻗친 산발에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살이 붙지 않아 움푹 패인 볼과 푹 꺼진 눈두덩이가 합쳐져 야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돌아가라고 했잖아!”

내가 당대 천마인데가긴 어딜 가란 거지?”

어디로든 꺼지라고.”

여긴 야율가의 안가가 아닌가네가 야율의 후손이라면 나를 맞이할 의무가 있을 텐데.”

 

으득.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야율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문을 활짝 열고커다란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새까만무저갱을 연상시키는 눈동자그와 반대로 해를 본 적이 없는 듯 창백한 피부전체적으로 사나운 독사 같은 인상을 보아 천가의 후계자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나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기대를 품고배반당하고다시 희망을 가졌던 기간이 너무도 길었다.

 

선대가 이곳에 은거하며 남긴 기록들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그들은 천마의 귀환을 기다리다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했다.

야율주의 아버지도조부도증조부도.

그들은 모두 범죄자였다천마를 믿고 따랐다는중죄를 저지른.

그래서 이 손바닥만 한 뇌옥에서 평생 갇혀 지내며볼품없는 인생을 사는 형벌을 받았다.

 

야율주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마교는 잊혀진 이름과거의 영광도충성도 묻어두고 정파에 빌붙어 새로 시작하면 되지 않았나왜 천마란 이름에 목을 매냔 말이다.

그건개죽음이었다.

 

그는 늘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았지만 다 버리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이제 와서 도망치기엔 저승에 가서 세상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조상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아니사실은 그도 알고는 있었다.

나약한 자신이 지친 마음에 그저 포기를 택했다는 것을.

그가 원하는 것은그저 이 굴레를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대에서 끊는 일이었다.

선조들은 언젠가 천마가 돌아와 영화를 되찾는 일을 기대했지만야율의 후손이 몇 명이나 더 희생당해야 형벌이 끝나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또 나타나 자신이 천마라고?

보상받지 못하는 희망에 매몰되었던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야율세가는자신은 이미 꺾여버렸는데 이제 와서 천마니 마교니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더 이상 얽매이기 싫었다이자가 정말 부활한 천마라 해도야율주에겐 이자를 도와 박살난 마교를 재건할 기운도 없고충심도 없을뿐더러신앙도 없었다.

 

야율주는 천진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목에선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목소리가 떨려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백 년이다마도천하를 꿈꿨던그래거의 성공했던 전대 천마의 무림박해 이후로 자그마치 이백 년이 지났다.”

그렇지.”

그동안 야율가의 문을 두드렸던 자칭 천마가 몇 명이었을 것 같나?”

천마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았나정파가 그 역사를 남겨뒀다고?”

 

야율주가 코웃음쳤다.

 

분명 무림에서 마교는 지워졌다.

정파의 치욕을 발설하는 자는 얼마 안 가 영문 모를 사고로 죽거나 실종되었다내공을 가진 무림인이 오래 산다 한들이백 년을 버티는 자도 없었다마교와 손을 잡았던 황실의 기록마저 불태워졌다.

 

천마라는 존재가 있었단 사실도십만대산이 무림의 금지로 지정된 이유도이백 년 전 무림이 어떤 꼴이 났었는지도.

지금에 와선 그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이도 손에 꼽을 터였다.

 

끽해봤자 정파의 대가리들 정도밖에 모르겠지.

그들끼리도 쉬쉬하며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짓밟혀 마도천하가 열릴 뻔했다는 사실을 알리기엔 부끄러울 테고입이 늘어날수록 새어나가기도 쉬워지니까.

하잘것없는 체면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들.

 

그러나.

 

천마를 기억하는 마교의 생존자들천마의 자격이 없는 천가의 방계들스스로 구심점이 되어 마교를 제 발밑에 두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던 정파의 간자들까지참 다양하게도 자신이 천마라며 찾아왔지.”

그들은 어떻게 했지?”

어떻게 됐겠나?”

 

야율주가 음산하게 되물었다.

 

내가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들이 무슨 일을 당했든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과욕을 부린 대가다.”

.”

 

야율주는 여유롭게 대답하는 천진호를 비웃었다.

정말로 이자가 기나긴 기다림의 끝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이번에도 가짜일 터였다.

가짜여야만 했다.

 

또다시 찾아온 거짓된 희망을 베어넘기고야율가의 마지막을 지킬 것이다.

그런 뒤에저승에 가서 천마의 멱살이라도 잡을까.

너 때문에 마교는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만족하느냐고속이 시원하냐고.

 

아니다.

차라리 실컷 비웃어주는 게 낫겠다.

신이라 자부했으면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게 참으로 꼴이 좋다고.

 

너무 늦었다너무늦어버렸어야율가는 끝이다헛된 희망이란 극악한 독에 중독된 내 선조들은 천천히 죽어갔다그들이 내게 남긴 건 이 허름한 안가 하나뿐이지.”

상관없다나는 천마고내가 곧 마교이니.”

그렇게 잘났으면혼자 해라!”

 

소리를 지르는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천진호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네가 천마고너만이 마교라면마교의 재건도 스스로 해내라야율가는 어째서 너를 기다려야만 했나그 좆같은 의무책임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야율가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 아닌가?”

이런 썅당연한 게 어딨냐고!”

 

야율주가 악을 썼다.

천진호가 보기엔나는 이만큼 힘들었는데어째서 내 고통을 알아주지 않느냐는 투정에 가까웠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떨구고 양 손바닥으로 눈을 비빈 야율주가 붉어진 눈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천마심공을 익힌 천마는 모두가 다르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다.”

그래맞다천정우의 아들 천진호로서의 자아가 가장 강하지만전대 천마들의 기억들도 가지고 있지.”

그럼 네 명령 때문에 죽은 이들이 수없이 많고너를 믿으며 죽어간 이들은 그보다 훨씬 많단 것도 알겠지?”

물론.”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너를 위해 목숨 바친 신도들은 뭐가 되나!”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나?”

?”

 

야율주가 황당해 입을 떡 벌렸다.

천마란 건 원래 저렇게 뻔뻔한 놈인가?

 

내가 그들을 알고 있다아직도 그들을 기억한다그러면 족하지 않은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반대로 묻지너는 신을 믿은 대가를 바라나?”

그야.”

 

말문이 막혔다.

 

당연한 것 아닌가?

인간이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 놓고기억해 주니까 충분하다고?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불가해의 괴물.

 

야율주가 탄식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자는죽어간 선조들이 그리도 고대하던 천마가 맞는 것 같았다.

인두겁을 뒤집어썼으나 어긋난 생각을 가진 이런 자가 천마天魔가 아니라면다른 누구도 천마를 칭할 수 없으리라.

 

낡은 족쇄가 돌아와 맹약을 강요하는구나.”

족쇄?”

 

거슬리는 호칭에 천진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불쾌하군.’

 

아직 정통성을 입증하지 못한 반쪽짜리 천마라도자신의 신도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려선 안 됐다.

 

야율주는 도망치고 싶었다.

족쇄.

족쇄였다자신을야율세가를마교를모조리 사지로 몰아넣은 끔찍한 족쇄.

 

천마의 무림박해 탓에 마교가 끝났다.”

신의 의지라면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니던가?”

천마 때문에마교를 믿고 따르던 신도들도사대 마가도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해야만 했단 말이다!”

내가 사과해야 하는가?”

 

천진호의 물음에 야율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정녕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른다고무림박해 이후 이백 년이다무려 이백년을우리 야율가는 야율가란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이곳에 숨어살았고쥐를 잡아먹으며 인간이 자연히 누려야 할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고!”

마교의 일원이었던 사실을나를 따랐던 과거를 후회하나?”

후회한다사무치게 후회한다천마의 야욕이 아니었더라면무림일통을 시도했다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십만대산에서 풍족하진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꺼져라.”

?”

 

악을 쓰던 야율주는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들었다.

천진호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찼다.

쓰레기를 보는 것처럼경멸이 서린 눈이었다.

 

이백 년을 참았던 야율가의 선조들은 안됐군이딴 놈이 돌아온 천마를 맞이한 후계자라니과연 너희의 선조들이었다면 후회했겠는가?”

당연히...!”

 

천진호는 야율주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아니너희는 천마를 신으로 믿었고신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신의 뜻을 거스른다면오히려 그것을 더 후회했겠지신의 명령이라면 초개처럼 제 목숨을 바치는 신도들이 가득했고그들은 하나같이 신이 자신의 목숨을 원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미친 소리!”

그것을네놈이 알량한 원망을 품고 무의미한 희생으로 치부한 것이다내 마교에 그런 한심한 작자는 필요 없다꺼져라야율세가의 마지막 후계야어디 써먹을 곳도 없겠구나.”

 

그건광신이잖아.

 

문지방을 밟고 멍하니 서 있던 야율주가그를 밀고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가는 천진호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성대를 잃은 기분이었다자신의 안가를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그를 멈춰세우려 손을 뻗었다.

허무하게도힘없이 들어올려진 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야율주는 여태까지신을 부정해 왔다.

신이천마가실재한다면 야율세가는 이리도 처참하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천마를 믿은 선조들을 한심히 여겼다멍청하니까 천마 따위를 믿고공허한 믿음의 대가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나가능성을 본 지금이대로 천진호에게 부정당하고 내쫓긴다면야율세가가 허비한 시간은 무엇이 되는가?

속에서 반발심이 마구 휘몰아쳤다.

 

나는 아직야율세가의 후계로서너를 천마로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엔 작았다가점점 커진 목소리는 좁은 안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안가에 무엇이 있나 확인하던 천진호가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스스로 포기해버린 놈이입은 살았구나.”

시험을 치러 자격을 증명하지도 않은 네가 주인인 양 행세하지 마라!”

 

천진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심지가 다 되어 꺼진 양초 같던 놈이다시 미약한 불씨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길래 홧김에 나가라 말하긴 했지만확실히 이대로 야율세가의 후계를 잃는 것은 마교에 큰 손해긴 했다.

아마 불경을 저지른 것도여태껏 천마가 돌아오지 못한 적은 많았어도 마교가 완전히 박살나 잊혀진 옛이야기 정도로 몰락한 상황은 처음이라 그랬을 터.

한번은 더 기회를 줘 볼까.

 

나는 야율세가의 후계자야율주다네가 그리도 천마를 참칭하고자 한다면증명할 기회를 주지.”

좋다.”

 

천진호는 야율주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나는 12대 천마천진호다.”

 

그리고너의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