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아빠, 이거 먹어!”


“이것도!”


“고기 다 구웠어요!”


“얘들아, 아빠 괜찮으니까…”


-우으…


“아, 아하하… 알겠어, 먹을게, 먹을게! 자, 아~”


내 딸들은 참 기특하다.


나이 30 쳐먹고 혼자서 염병쌩쇼하다가 다친 아비를 쪽팔려하긴 커녕 걱정해주고, 챙겨주잖아?


티 하나 없는 고사리 손으로 꼬마 메이드들은 고기를 굽고, 꼬마 여우들은 안마를 해주고, 꼬마 레이디는 포크에 음식을 꽂아서 아빠 입에 넣어주고, 나머지 꼬마들은 아빠를 철통같이 지킨다. 완벽한 역할분담…인가?


뭐, 완벽하다면 완벽한 게 카리나는 저 철통보안 덕에 나랑 손을 잡고 왔음에도 입구컷을 당했다.


“얘들아… 아빠 간호해줘야 돼애…”


“안 돼요 카린 씨! 아무리 카린 씨여도 지금은 아빠한테 갈 수 없어요!”


“카린 씨는 방금 전까지 아빠 옆에 있었으니까 이젠 우리 차례야!”


“맞아맞아! 우리 아빠라구!”


“제바아아알… 지휘관니임…”


“미안해 카린. 한번만 양보해줘…”


“으으으으…!”


언제부터 ‘나쁜 언니’ 대신 ‘카린 씨’라는 호칭을 쓰기로 한거지? 얀순이한테 당했던 그 날부턴가?


예전보단 친해졌다는 증거이긴 한데… 음… 여전히 거리감이 있긴 하다.


“아~ 헤헤, 맛있죠?”


“이제 어깨 안마 해줄게 아빠!”


“안마… 시원하세요…?”


“응. 아빠는 여한이 없다… 우리 공주님들이 벌써 이렇게 컸다니…”


“나도 안마할 수 있단 말이야… 얘들아, 딱 한 번만…”


“안 돼요!”


그렇게 1시간 동안 난 아내를 앞에 두고 딸들에게 서비스를 잔뜩 받는 못되먹은 놈이 되었다. 이거 누가 아동학대로 신고해도 할 말 없겠네.


식사를 끝마치고, ‘양심이란 게 있으면 정리는 내가 해야겠지’ 하면서 일어나려던 순간, 


“으악!”


“안 돼! 아빠는 가만히 쉬고 있어. 우리가 다 치울게!”


“저희가 그릴 치울게요!”


“우린 테이블!”


“그럼 우리가 설거지할게!”


“나랑 언니는 아빠한테 모래찜질 해줄거야!”


“선글라스랑… 선크림…? 선크림도 필요해…?”


“괜찮은데…”


“어, 음… 아빠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하자!”


“???”


꼬마 여우들이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눕혀버린 뒤 일어나지 못하게 하반신에 모래를 열심히 퍼붓는다.


스노우볼이 제대로 굴러가는구나. 왜 나대다가 처자식 힘들게 만드냐 새끼야.


그렇다고 아이들이 제 고집을 꺾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걸국 자포자기하고 몸을 뉘인다.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결례이거늘, 선글라스를 끼고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신선놀음을 즐긴다.


“야… 날씨 좋다…”


“됐다!”


“으음… 음… 하암…”


“아빠, 졸려요…?”


“응… 밥도 먹고 햇빛도 받으니 몸이 나른해지네…”


“그러면… 저흰 먼저 들어갈테니 푹 쉬다 오세요.”


“힝, 아빠랑 좀 더 있고 싶은데… 알겠어, 가자, 언니! 카린 씨랑 재밌게 쉬다 와 아빠!”


“응… 조심히 가…”


“지휘관님!”


“안녕 카린… 수영복 예쁘네…”


“정말, 방금 일 다 봐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왜애…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졸음과 함께 눈치도 차츰차츰 없어진다.


마침내 다시 만난 카리나는 내 상처와 아이들의 방해로 기분이 꽤 상한 듯 하다. 뭔가 말은 해주고 싶은데, 식곤증의 기세가 너무 세다. 그러면…


“자, 누워…”


“네?”


“미안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이젠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자…”


“장난치시는 거에요?!”


“장난이 아니라… 정말 피곤해서…”


“정말… 아직 다 풀리진 않았으니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으응... 미안…”


팔을 옆으로 빼서 팔베개를 만들어준다. 되게 별 거 없지만 의외로 효과는 매우 좋다.


저렇게 틱틱대면서도 천천히 팔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참, 내 와이프는 너무 귀엽다.


“잘 자… 카린…”


“전~혀 안 졸리거든요!”


“응… 미안해…”


“미안하면 다… 에휴, 사람 놀라게 하고… 진짜…”


“다음부터는, 절대 용서 안 할 거에요…”


“Zzz…”


호놀룰루에 왔으면, 해변에서 낮잠 한 번 자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사로운 햇살, 맑은 바닷물과 파도소리, 시원한 바람, 낮잠자기 딱 좋은 환경이지. 


일단 1시간 정도만 자면서 가족들과 놀기 위한 체력을 보충하자.



.



.



.



.



.



.



.



-쏴아…


“으음…”


-쏴아아…


“아, 어우, 으~ 잘잤다… 몇 시, 딱 한 시간 잤네…”


“카린, 어, 카린?”


자연 알람과 함께 일어났을 땐 나 혼자 덩그러니 해변에 놓여있었다.


카리나가 누워있던 자리엔 쪽지 하나가 있었고,


“먼저 들어갈게요. 저녁 약속 잊으시면 안 돼요!”


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혹시라도 잊어먹으면 대판 깨질테니 단단히 챙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점심때부터 쭉 누워있었던 탓에 허리가 쑤신다.


주변을 둘러보자 상점가를 오가는 사람들과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야자수, 푸른 바다, 아까 날 도와줬던 구조대원 형님누님들 등등 전형적인 미국 해수욕장의 아이템들이 있다.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해변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클리셰까지.


누군가의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있던 화단에서 빨간 무언가가 빠르게 사라지면서 잎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다가 멈춘다.


-스윽


“?”


-......


“허어… 기분탓인가…”


-스륵!


“는 무슨, 너 누구야?!”


곧바로 달려가 화단과 그 주위를 샅샅히 뒤졌지만 콘크리트 보도블럭만 휑하게 있을 뿐이다. 옆에서 지나가던 사람들도 ‘정신나갔나’ 싶은 눈빛으로 쳐다보니 쪽팔려 죽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며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아아아! 저저저, 저 놈 잡아라!!”


“진짜 미친놈인가봐!”


“이봐! 허튼 짓거리할 시간에 정신과나 가!”


“야 이 새끼야! 눈깔 똑바로 뜨고 다녀!”


“죄송합니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야! 거기 안 서!”


저 멀리서 빨간 머리칼의 누군가가 날 잠시 보다가 다시 사라진다. 그리고 골목 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눈이 정확히 마주쳐서 의심의 겨를도 없다. 저 놈이구나!


숨 고를 새도 없이 우사인 볼트가 빙의한 것처럼 온힘을 다해 녀석을 쫓아갔다. 물론 사과는 빼먹지 않는다.


“야! 너 뭐하는 놈이야!”


“......!”


“...여자야? 여잔데 저렇게 빠르다고?? 남자의 자존심도 걸렸으니 꼭 잡는다…!”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면서 빨간 트윈테일의 여인이 그 윤곽을 드러낸다. 


외모만 보면 요크타운, 호넷, M16, SOPII는 물론이고, 요즘 수상쩍은 짓을 하는 뉴저지와 얀순이도 제외된다. 하긴, 걔네들이었으면 나한테 일이 있을 때 그냥 전화를 하지, 이런 깽판을 만들진 않는다.


일단 빨간 트윈테일 하면 딱 한 명이 생각나긴 하지. 근데 걔가 여기 있을리는 없을텐데?


거기에 내가 떠올린 그 사람하곤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주력으로 호놀룰루의 상점가를 이곳저곳 들쑤시니까 더 믿기지 않았다.


“꺄악!”


-와장창!


“아니! 젊은 아가씨가 눈이 삐었나?! 뭐하는 짓이야 이게!”


“으… 아파…”


“허억… 허억… 죄송합니다… 야, 누구, 진, 진짜 너였어?!”


“...지휘관…!”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네?


마침 녀석이 알아서 길가의 가판대에 걸려 넘어진다. 혹여나 도망갈까봐 얼른 잡아서 얼굴을 살피자, 설마가 사람을 2연타로 잡아버린다.





















지금 밟고 있는 땅에서 이름을 따온 그녀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그녀가 맞았다.


악연에서 피어오르는 분노 대신 ‘왜 얘가 여깄지?’로 시작하는 황당함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호놀룰루에서 호놀룰루와 추격전, 라임 미쳤네… 


“하아… 결국 들키잖아… 이래서 안 된다고 했는데…”


“아, 머리야… 야, 어딜 도망가려고?”


“앗, 아니…”


“후우… 이리 와. 할 얘기가 많지?”


“으, 응…”


다리 곳곳에 생채기가 생기고, 옷도 좀 찢어져 몰골이 말이 아니다.


박살난 가판대 때문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저씨는 정중한 사과와 100달러 지폐 두 장으로 돌려보냈으니, 호놀룰루의 손목을 붙잡고 으슥한 공터로 가서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황당함과 분노는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를 추궁한다.


“솔직하게 말해야 될거야. 안 그러면 뉴저지처럼 될 수도 있으니까.”


“뉴저지처럼 된다니…?”


“좋은 꼴은 못 볼거라고.”


“......”


“첫번째, 어떻게 794에서 탈출한거야?”


“엔터프라이즈의 명령을… 받았어. 지휘관이 호놀룰루에 있으니, 내가 가서 추적하라고…”


“하, 미친년…”


“으…”


“아니, 너 말고, 아, 그러니까, 이유는 알겠는데, 어떻게 왔냐고. 넌 경순이라 자력항해도 힘들 거 아냐.”


“그건… 독일에서 밀항편을 마련해줬어…”


“참나, 염병을 하는구나.”


저 나라는 총감님 돌아가시고 완전히 먹혔나, 범죄자들이 이렇게 떡하니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제재가 없네?


슬 황당함은 잦아들고, 분노가 차오른다. 이번 일이 얼마나 커진건지 감이 전혀 안 잡힌다. 일단 심호흡을 통해 열을 잠시 식히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두번째, 네가 여기서 쓰는 신분과 거처, 이런 거 싹 다 불어.”


“아무것도, 없는데…”


“수작 부릴래?”


“진짜야…!”


“그러면, 아무런 대비 없이 몸만 왔다고? 말이 돼?”


“가명도, 거처도, 위장도구도, 이 카드 던져주고 알아서 구하라고 했다고…”


“...멍청한건지, 꿍꿍이가 있는건지…”


호놀룰루가 주머니에서 검은 카드를 꺼내든다.


미국의 모 유명한 은행에서 발급하고, 가진 자는 곧 부자라는 증명서도 겸할 수 있는 그 카드다. 누구 말대로 유치원 수십개 굴릴만큼 돈이 많은가보네.


그런데 범죄를 벌이면서 추적이 용이한 신용카드를 쓰는 건 무슨 판단일까? 어쨌든 이 카드는 증거품으로 압수하고, 다음 질문으로 가보자.


“세번째,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도 모른다고… ㄷ, 다짜고짜 하와이에 지휘관이 있으니 추적하라고 했다니까…”


“아, 미치겠네 진짜… 너 혼자 왔어?”


“......”


“말 안 해?”


“...루, 루이스도…”


“걘 어딨는데?”


“상륙하자마자 헤어져서, 몰라…”


얜 아는 게 뭐야. 어쨌든 둘이나 잠입을 했다라… 음, 엔터프라이즈는 여기서 아주 큰 실책을 세개나 범했다.


첫번째로 세인트루이스는 그렇다고 해도 입이 매우매우 가벼운 호놀룰루를 잠입시킨 것.


두번째로 얀순이가 히캄에 떡하니 있는데 얘네들을 보냈다는 것.


세번째로 가뜩이나 얀순이가 벼르고 있는 중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명을 재촉했다는 것. 


“네번째, 네 본래 계획.”


“우선 당신을 쫓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하아,  나도 오기 싫었는데…”


“당신을 만나봤자 좋은 소리를 들을리가 없는데, 결국 소심한 내가 강제로 떠밀려진 거나 다름없단 말이야…”


“말 돌리지 마. 본론부터 말해.”


“읏… 그, 러니까, 아까 그 카드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정보도 구하면서 작전의 질을 높여라, 라고 말했던 것 같아...”


“작전이 뭔데.”


“나도 똑같이 물어봤는데 디데이 때 알려준다고 무시당했어…”


“...다섯번째, 디데이는 며칠 뒤이고, 세인트루이스는 무슨 일을 맡았지? 겨우 이딴 짓거리 하는데 두명을 쓰진 않을텐데?”


“지금으로부터 5일 후였던가… 그리고 루이스는 공군 인사들을 낚으라고 했었나…? 어, 아니었는데…”


“아, 미인계 요원 그런거야? 놀고들 있네.”


더이상 양질의 정보를 얻긴 힘들 것 같다. 추궁은 여기까지만 하자.


“...뒤로 돌아. 얼씨구, 권총도 가져왔어? 칸센들한테 소화기 사격은 전혀 안 가르쳤는데.”


“이, 이 정도 총은 나도 쏠 수 있거든?!”


“시끄러.”


최대한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몸수색으로 무장을 압수한다. 의장은 저 멀리 독일에 있을테니 전개할 수 없을거다.


허벅지의 홀스터에 45구경 권총과 단검까지, 어디서 본 건 있네. 


단검은 바닥에 버리고 권총은 장전해서 내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뒤에서 뭐하냐?”






“어머, 들켰네? 오랜만이야, 지휘관 군. 이번엔 운이 없었나봐.”


호놀룰루의 눈동자에, 같이 하와이에 기어들어온 세인트루이스가 타이밍 좋게 비춰진다. 뒤를 돌아보자 손에서 주사기를 들고 아주 태연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낸다.


곧바로 권총을 꺼내 그녀에게 겨누고, 권총의 원주인은 목덜미를 잡고 벽에 쳐박아 제압하며 대치 상황에 돌입했다.


“크흑…! 지휘과안… 아, 파아…”


“내가 아는 지휘관 군은 이런 폭력적인 남자가 아니었는데♪ 설마 해서 와봤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네?”


“누가 날 폭력적으로 만들었을까? 손에 든 거 뭐야?”


“이거? 지휘관 군과 따뜻한 밤을 보낼 때마다 썼던 약이잖아. 기억 안 나나봐?”


“아~ 이게 그 약이야? 내 딸들이 저딴 쓰레기 같은 방법으로 태어났구… 나… 아…”


저 주사기를 보자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느껴졌다.


의식은 모르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기억하는건가? 요즘 약은 눈으로 보기만 해도 효과가 생기나? 정신줄이 조금씩 잘려 나간다…


“어라, 아직 꽂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응이 오네?”


“지금, 이야…”


“으윽…”


“다행이야. 힘을 쓸 필요는 없겠어.”


“루이스…! 빨, 리…!”


“지휘관 군의 몸은 이 약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네… 그럼, 안부는 좀 이따가 물을까?♡”


-또각, 또각…


“어억…”


“거의 다, 됐… 어…!”


“쉬이… 잠시 따끔할거야…”


세인트루이스의 손가락이 내 입술에 맞닿고, 반대손이 천천히 주사기를 들어올린다.


호놀룰루는 결박을 풀기 직전이고, 권총을 통해 그녀의 손길이 느껴진다. 잠시 후 권총의 슬라이드까지 잡히려고 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윽!”


-퍼억!


“!”


“꺄악!”


“허억, 허억… 미친년들이… 어딜 개수작이야…”


주사바늘이 꽂히기 직전에서야 상황파악을 마치고 더러운 마수를 거세게 잡아치운다.


호놀룰루는 아까보다 2배는 더 세게 제압하고, 반은 뺏긴 총을 탈환해 그녀들에게 겨눴다. 


하마터면 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갈 뻔 했어… 저게 뭐라고 쫄아. 어? 정신 바짝 차리라고 새끼야.


“아쉬워라. 다 된 밥이었는데…”


“켁… 지, ㅎ… 콜록! 콜록!”


“아직도 미안한 마음 따윈 없나봐…?”


“잘못한 게 있어야 미안하겠지?”


“쳇, 하, 그래,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보다.”


사람 속 터지는 걸 원하는건가, 아주 순수하게 질문을 한다.


‘난 너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그녀들을 상대할 때면 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된다. 짐승한테 사람 말 해봤자 그게 쇠 귀에 경을 읽는 거 아니겠는가?


“뒤지기 싫으면 당장 비켜.”


“싫다면?”


“끅… 지, 휘과, 안… 잠ㄲ…”


“너와 얘 머리에 총알이 박히겠지.”


“흐음, 경순양함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조그마한 45구경 탄환으로 칸센을 죽이려는 거야?” 


“내가 너흴 10년 가까이 보면서 안 사실이 있는데, 의장 없는 칸센은 그냥 인간이나 다름없어.”


“글쎄, 직접 쏴보면 알지 않ㅇ”


-타앙!


“히잇?!”


“이미 소화기에 맞은 비무장 칸센을 한 번 봤는데, 당연히 아주 잘 알지.”


그래서 사람 말 대신 행동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답했다.


하와이의 햇살이 거의 비치지 않는 주차장에서 크게 울려퍼진 총성, 0.45인치의 탄두는 세인트루이스의 뺨을 스쳐지나가 그 너머에 있던 폐차체에 박혔다.


“아, 생각보다 아프구나.”


“다음은 이마야. 당장 길 트고 꺼져.”


“귀, 귀가… 안 들… 려…”


찰나의 순간, 늘 여유를 놓치지 않던 그녀가 뺨에 흐르는 붉은 선혈을 손으로 훑으며 정색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찰나일 뿐, 다시 그 특유의 은은한 미소를 되찾고 손을 들어올리며 천천히 몸을 낮춘다.


“OK, 항복~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 호놀룰루, 항복하자.”


“아, 들린다…! 으, 응… 지휘, 윽!”


“뭐? 항복? 이것도 수작일 게 뻔해. 당당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놓고 이렇게 쉽게 항복한다고? 뭔 속셈이야.”


호놀룰루를 세인트루이스 옆에 던져 나란히 투항시키고, 이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둘이서 날 추적하려고 하와이에 잠입했는데, 상륙 당일날부터 대놓고 돌아다니다가 들키고, 심지어 만난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항복한다? 이건 대체 뭔 경우일까? 


“속셈이라, 사실 우리가 지휘관의 스파이를 원하고 있었다는 게 속셈이라면 속셈이겠네?”


“스파이? 니네 대가리들은 애진작에 너희들이 나한테 들킨 걸 알아차렸을텐데, 스파이가 퍽이나 통하겠다. 응?”


와중에 잃을 거 없다고 되도 않는 소리를 하네. 맷돌 손잡이가 하와이의 해류를 타고 떠내려간다.


마음 같아선 얼굴 앞에서 중지를 치켜들고 싶지만 애새끼처럼 그러지 말고, 어른답게 해결해보자.


“우후후, 과연 그럴까? 운이 좋다면 한번쯤은 모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엔터프라이즈가 허튼 짓 하면…”


“니네 기함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몰라? 걔가 이런 경우의 수도 생각을 안 했을까? 아, 요즘은 좀 멍청해졌긴 하지.”


“운이라는 건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나오는 법이야, 지휘관 군.”


“예예, 그러시겠죠. 자, 아가씨들, 하늘을 봐봐. 지금 이 순간에도 니네 나라가 쏴재낀 수많은 위성들이 이 지구를 돌고 있어.”


“그 얘기를 왜…?”


“그 위성들 중엔 GPS용 위성도 있을텐데, 난 M4가 GPS 시스템을 게임처럼 가지고 논 것만 수십번을 봤거든. 정말로, 걔네들이, 나랑 만난 걸, 모를까?”


“흐음… 그럴수록 더 운에 기대고 싶어지는걸?”


“상황파악이 전혀 안 되네. 헛소리는 감방 가서 해. 경찰 부른다.”


“경찰…!?”


“흥, 정말 이대로 끝낼거야? 아쉽지 않아?”


“전혀.”


“그러면, 긴급 신고는 911, 알지?”


“뭔 소리하는 거야?! 우리가 잡혀가는 처지인데 그걸 말하면…!”


“호들갑은… 예, 경찰이죠? 제가 794에서 도망쳐온 옛 친구들을 잡아놨거든요. 예예, 장관님이 직접 명령을 했다고, 잠깐, 공군인 애가 왜 경찰한테 명령을…?”


내가 모르는 사이 얀순이의 힘이 하와이 경찰까지 뻗었다. 군의 일원이, 엄연한 별개 조직이자 라이벌인 경찰한테, 직접 명령을… 어이구…


얀순이의 손바닥을 벗어나는 건 다음 생에서나 생각해봐야겠네. 일단 신고부터 마무리하자.


“아, 별 거 아닙니다. 빨리 오십쇼. 휴, 야, 작별인사는 아직 하지 말까?”


“지휘관 군, 이런 쪽으로는 판단이 아쉽네. 만약 우리가 아이를 가지고 있다면 어떡할거야? 난 헬레나처럼 되기 싫은걸.”


“만약이잖아. 가정으로는 세계정복도 가능하지.”


“헬레나는 출발 직전까지 지휘관 군과 아이를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어. 엔터프라이즈에게 수십번이나 우릴 따라가겠다고 요구했지만 결국 반려당했지.”


“나보고 어쩌라고?”


“헬레나의 말로처럼,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이거, 마지막 선물이야. 호놀룰루도 있다구?”


“으… 부끄러운데…”


“아이고, 어쩐지, 배가 예전보다 조금 불렀다 했어. 에휴, 이 염병할 가랑이가 문제야. 빨리 묶던가 해야지.”


감성팔이를 하든 말든, 임신공격은 질리도록 당한지라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안 든다. 


아니나다를까 또또또 염병할 두줄의 임신테스트기를 건내주는데, 어떻게 발전이 단 하나도 없을까? 이러면 같은 길을 걸은 선배의 최후를 알려줘야지.


“뉴저지가 나랑 약속을 하나 했어.”


“뭔데…?”


“자기가 내 아이를 낳은 후에는 뭘 해도 상관하지 않겠대. 즉 9개월 후에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걘 산후조리도 못하고,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젖도 못먹이고 바로 감옥행인거야. 물론 출소해도 나랑 아이 얼굴은 영원히 못보는거지.”


“대신 걔는 장관님과 협상을 해서 그 9개월 동안 제한적인 자유를 보장받았거든. 아까는 저기 해변에서 놀고 있었는데, 너희들도 그럴 수 있을까?”


“......”


“루이스, 경찰… 왔어…”


“알아. 그럼, 우린 여기서 끝인가 보네.”


“빨리도 오셨구만.”


“지휘관… 나, 할 말이 있는데…”


“뭐.”


“...당신을… 좋아, 해… 이제, 더이상 못 볼 것 같아서…”


“...그래.”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답해줘서 고마워…”


-덜컥!


“용의자 두명 확보! 체포해!”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지금부터 하는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한심한 물개놈들, 제대로 흘러빠졌구만.”


“수고하십니다.”


“오, 지휘관님! 794 일로 고생이 많으실텐데 하다하다 용의자들이 제발로 들어왔네요. 제가 경찰일만 20년 째인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저라고 오죽하겠습니까. 살다 살다 저것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고 생각은 하겠어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저 빨간머리 용의자가 총을 소지하고 있어서…”


“애가 그래도 성격이 소심해서, 저한테 들키니까 바로 꼬리를 내리더라고요. 아, 여기 총과 같이 압수한 카드와 약물입니다.”


“예? 약물도?! 아휴, 죄송합니다! 저희가 더 빨리 왔어야 됐는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다음부턴 이런 나쁜 짓 못하게 민중의 지팡이로서 엄벌해주십쇼.”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리라. 호놀룰루의 사랑 이야기가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차에 힘없이 실리는 그녀들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아하하, 아까 그 사람인데요… 다름아니라, 아까 그 여자애랑 얘기 끝내고 왔는데 목이 말라서요.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만 주세요.”


“아이, 아닙니다. 이, 내가 유명한 분을 몰라뵜네… 미안해요.”


“아뇨아뇨, 유명하니까 더 혼나야죠. 제가 더 죄송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거스름돈은 아까 그 가판대에 보태세요. 수고하세요.”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어. 기분도 꿀꿀하니, 아까 가판대를 부숴먹은 아저씨네 가게로 가서 한번 더 사과하며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직 카리나와의 시간은 멀었으니, 좀 쉬면서 성에 안 찬 휴가를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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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