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그 장소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

 

뒤져보는 내내 서로가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둘 다 얼굴을 붉힌 채였고,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거리도 미묘하게 멀어져 있는 채였다. 

 

“저, 엘리...? 여기에 뭐가 있는거야?”

 

먼저 입을 뗀 것은 주린 배를 견디다 못 한 나였다. 우리가 여길 뒤적거리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먹을 수 있을 법한 음식을 찾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이 곳은 식량창고나, 그 비스무리한 곳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펴본 바로, 여긴 성에 흐르던 마력을 제어하는 장소인 듯 했다. 

 

방의 한 가운데 있는 단상이 그 증거였다. 단상의 중심부에는 사과정도 크기의 마석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축으로 원 형태의 마법진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석이 머금은 마력의 경우, 내가 처음 성에 발을 들일 때 까지는 아슬하게 견디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그 이외에 색감이 좀 바랜 커다란 초상화가 줄지어 있었고, 자잘한 공예품이나 썩어가는 종이다발 같은 것들이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꽤나 중요한 방인건 틀림없어 보였지만... 도저히 위장에 들어갈 만 한 것들은 아니다. 

 

“독특한 마법이... 여기.”

 

벽면을 짚으며 방을 빙 돌고 있던 엘리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그곳으로 다가간 나는 엘리가 서 있는 벽면을 실눈으로 찬찬히 뜯어보았지만, 내 눈에는 여느 벽면과 다름이 없어보였다. 

 

“특별할거 없어 보이는데, 뭔가 있는거야?” 

 

엘리는 설명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엘리가 벽면에 손바닥을 대고 서 있자, 잠시 후 푸른색의 불꽃이 발했다. 마력의 방출. 어릴 적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었다. 

 

불이 옮겨붙듯, 짙고 선명하게 방출된 마력이 서서히 벽면을 뒤덮으며 타올랐다. 번져가던 불꽃은 어느 지점에서 전진을 멈추더니, 점차 특정한 형태를 그려나갔다. 마력이 선과 각을 형성하며 벽면 위로 직사각형을 이루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마력으로 뒤덮인 벽이 점차 일그러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열기에 녹아내린다기엔 조금 이질적이었다. 일그러짐의 균열이 점차 심해져, 원래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던 차에, 파스스- 하며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엘리는 마력을 거둬들였다. 마력의 불꽃이 사라진 자리엔, 대신 커다란 문이 남겨져 있었다.

 

문에는 알 수 없는 마법 술식같은 것들이 빼곡했다. ‘보존 마법...’ 엘리가 곁에서 그리 혼잣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 오묘한 문자들을 보며 눈동자를 굴리던 나는, 문짝에 손을 짚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특별힌 손잡이 없이 철제로 된 문이었기에 미는 것에 다소 힘이 들었다. 

 

하지만 얻게 된 수확은, 잠깐의 수고로움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허, 굉장한데?”

 

이 성 전체가, 시간의 흐름을 상당히 비껴나간 것 같다는 인상은 받고 있었지만, 

 

“이런게 가능하다고?”

 

내가 보고 있는 공간은, 말 그대로 비상식적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었다. 

 

문 너머는, 말 그대로 다른 세상이었다. 

 

처음 보이는 것은, 여느 성에 있을 법 한 메인 홀이었다. 특징점이라면, 바로 직전까지 누군가 관리한 것처럼 말끔한 상태였다. 천장 위 샹들리에의 촛불들은 이제 막 타오른 것처럼 길이가 일정했고, 테이블엔 먼지 한 톨 없었다. 내부에 금속이 쓰인 부분들은 광이 났고, 심지어 딛고 서 있는 바닥을 바라보니 내 얼굴까지 반사되어 보였다. 

 

현실감각이 혼란했던 나는 아까까지 있던 공간을 뒤돌아 보았다. 다행히 내 기억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개를 똑바로 돌리니, 유리와 금속 장식품들이 뿜어내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마법같은 광경에 엘리조차 다소 놀란 듯 했다. 물론 나는 더더욱 놀라고 있었다. 워낙 화려하고 정돈된 공간이라 주인 없는 곳임에도 초라한 행색을 한 내가 발을 들이는 게 괜히 낯부끄럽기까지 했다. 나는 쭈뼛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있을만한 건 다 있는 것 같네.’

 

내부 시설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본 결과, 여긴 일종의 방공호 비스무리한 곳이라 결론내릴 수 있었다. 홀, 개인실, 식당, 보건실, 서고등 방공호치곤 사치스럽긴 하지만, 정의를 내리자면 그랬다. 

 

1000년 가까이 성을 지탱한 마석이나, 그만한 시간을 아무렇치 않게 견뎌내는 방공호나... 대체 성의 원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일단 먹고 생각하지 뭐’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도 좋지만, 본래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뭐든지 배가 불러야 일이 잘 풀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이웃사촌 딜런씨의 뜻을 새기며, 나는 식량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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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부럴... 이 놈은 몇 번째 퍼지는거야?”

 

“시동이 잘 안걸린다 싶긴 했는데... 공방 같은곳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프레드 아저씨?”

 

“공방은 지랄, 이런건 정비소로 가져가는 거다. 멜빌, 가까운 도시에... 아니, 도시로 가도 이걸 만질 줄 아는 기술자가 있을지...”

 

숲길의 한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사내와 호리호리한 사내가 멈춰버린 자동차를 두고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주유...는 방금 전에도 했고, 근데 이 검은 물 같은게 진짜 연료에요? 석탄 태우는 것도 아니고.”

 

“이제 하다하다 석유가 뭔지 모르는 세대가 왔냐? 이게 내연기관이라는 건데... 아니다, 너랑 뭔 얘길 하겠냐. 시동이나 계속 걸어.”

 

무어라 항변을 하려 했던 멜빌은 목전까지 올라왔던 말을 집어삼켰다. ‘허구한 날 까이는게 내 처지지.’ 화풀이를 하듯, 멜빌이 애꿎은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야, 이거 존나 귀한건데 살살 안다뤄?’ 당연하게도 프레드의 일갈이 무섭게 날아왔다.

 

“쉽지 않은데 이거... 대체 그 윌이라는 꼬맹이가 뭘 했길래 비번들까지 쫙 풀어선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거에요? 듣기로는 가문쪽 뱀파이어들도 제발로 뛰고 있다던데.”

 

달아오르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레드가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거 말이냐?” 그러고는 성냥을 태워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듣기만 하고, 얘기 퍼트리지 마라. 모기들 귀에 들었다가 유언비어 퍼트렷답시고 짤라 버릴수도 있으니까.” 

 

담배잎의 풍미를 한 껏 음미하던 프레드가, 후- 하고 밤공기 사이로 연기를 뱉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그 꼬마가 레이스트가 영애의 식탁 위에 올려졌다는 건 들었지?”

 

“예, 거기까지야 뭐, 레퍼토리 흔하잖아요? 그대로 겁먹고 영지 밖으로 뛰쳐나가는거.”

 

“그리 단순한 일이 아냐.”

 

익숙한 손동작으로, 프레드는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었다.

 

“그 영애... 루시아라는 아가씨는 혼자서 느긋하게 피를 빠는걸 좋아했다더군. 사람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야. 취향도 지랄 맞아선... 여튼간에 그 날은 이런 점을 감안해도 평소보다 유독 식사가 오래 걸렸다는거야. 노크를 하고 이름을 불러봐도 반응이 없길래 의아하게 여긴 하녀가 문을 열어봤는데...” 

 

“쓰러져 있었다더군, 그 아가씨가.”

 

“뭐라고요? 그럼 그 영애는 죽은거에요?”

 

멜빌은 놀란 나머지 시동을 걸고 있던 손동작까지 멈춰 버렸다. 

 

“아니, 죽지는 않았어. 골골대다가 얼마 전에 일어났다던데.”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프레드가 쯧- 하고 혀를 찾다. ‘너 손 멈추지 마라.’ 짜증섞인 한 마디는 덤이었다. 

 

“아무튼 거기서 끝이 아냐. 장로 암살사건이라고 기억하냐? 이제 10년 좀 안 된 일인데.”

 

“아...! 알고말고요. 그때 온 사방이 다 시끄러웠는데.”

 

“장로 암살사건 이전에, 근 100년 동안 귀족 이상의 뱀파이어가 뒈진 일이 없었어. 그마저도 위험한 마법에 심취해서 폐인이 돼 죽거나, 같은 뱀파이어들끼리 죽이는 일 정도만 있었다더군. 인간에게 살해당한 경우로 좁히면... 거의 수백년 만에 일어났던 일이야.” 

 

“그 사건에 이번일 까지... 겨우 10년 주기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니, 의심병 도진 모기 새끼들이 쉰 떡밥을 문거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들은...”

 

“어어, 시동 다시 걸렸어요, 아저씨.” 

 

골칫거리였던 자동차가 다시 힘찬 시동음을 내뿜자, 프레드는 더 이으려던 말을 끊었다. “...고생했다.” 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쾅쾅 밟기까지 한 프레드는, 턱짓으로 멜빌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멜빌은 군말없이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그 쉰 떡밥이라는게 뭔데요?”

 

“이따가, 가면서 차차 말 해 줄게.” 

 

운적석에 앉은 프레드는 레버를 돌려 차의 창문을 올렸다. 가속 패달을 밟자, 거대한 철덩이가 서서히 무거운 몸뚱이를 움직였다. 

 

“하...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큰 사고가 터지는지 모르겠어요.”

 

“어련히 하다 보면 익숙해 져.”

 

“글쎄요. 진짜 익숙해 질지 어떠련지...”

 

멜빌은 뒷말을 잇기가 말성여졌다.

 

“사람이 같은 사람 잡는 일이잖아요...? 배신자 소리도 많이 듣고.”

 

“...무시해. 너랑 네 가족만 생각해라.”

 

둘은 그 뒤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자동차가 엔진음을 내며, 어두운 숲길 사이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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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불을 줄여도 될 것 같아.” 

 

“응...”

 

엘리의 손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그릇을 달구었다. 용기의 담긴 죽은 기포를 내며 끓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나 혼자 힘으로 해결을 보고 싶었지만, 가스레인지에 익숙해져있는 사람이 고전적인 화로와 아궁이로 요리를 하는게 여간 일은 아니다. 결국 낯선 주방기구 속에서 얼만 타고있던 나를 보다못한 엘리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었다. 

 

“좋아, 완성됐어.”

 

완성된 죽의 상태는... 일단 겉보기엔 양호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혼자 사느라 요리할 일은 많았지만, 실력에 큰 자신은 없었다. 남자 혼자 하는 요리라 해 봤자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 나쁘진 않네.”

 

검증을 위해 한 입 떠먹어보니, 그런데로 먹을 만 했다. 주린 배에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하니, 굶주림 탓에 점차 손을 움직이는데 속도가 붙었다.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죽을 선택한 건 정답이었다. 

 

“...”

 

허겁지겁 스푼을 뜨는 내 모습을,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엘리가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배를 채우는데 정신이 쏠려 있었기에 뒤늦게야 그 시선을 눈치챘다.

 

분명 죽을 먹고 있는데 괜히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찌나 가까이 있는지, 엘리의 회색 눈동자를 통해 입 안에 음식을 잔뜩 머금은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맛있어...?”

 

“응, 오래 굶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이야.”

 

죽이 담긴 그릇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예상치 못 한 말을 꺼냈다. 

 

“먹어 봐도... 돼?”

 

“이걸? 그치만 넌...”

 

당연하게도, 인간이 먹는 것들은 뱀파이어의 허기를 채우지 못 한다. 음식의 맛도 전혀 느낄 수 없다. 유흥 삼아서 한 번쯤 먹어 보거나, 개체에 따라 오히려 즐기기도 하는 독특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쪽인 걸까? 

 

“나야 상관은 없어. 기다려 봐, 스푼을 하나 더 들고 올게.”

 

“아니.”

 

“얼마 안 걸릴거야. 잠시...”

 

“먹여... 줘.”

 

자리에서 일어 나려던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잘 못 들은 걸까? 바라본 엘리의 얼굴은 홍조를 띄고 있었다. 

 

“내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잘 못 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으나...

 

“먹여 줘.”

 

내 귀가 이상하게 들은게 아닌 모양이었다.

 

“윌이.”

그녀의 입술이 재차 달싹였다.

 

“나를.”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쩌다보니 우리 둘은 테이블 사이에 대치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이건 내 침도 뭍어 있어서 더럽...”

 

“상관없어.”

 

저렇게까지 강하게 의지를 피력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녀도 나름대로의 고집이나 주관 같은 것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왜 이런 일에서?

 

잘 모르겠지만, 저런 요청을 받아들여주는건 무리였다. 이유야 당연히, 부끄럽지 않은가. 

 

“저기 엘리? 미안하지만 이런 건 좀... 아무래도 서로 부끄럽잖아?”

 

‘혹시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걸까?’ 나는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까 건 못 들은걸로...”

 

이어지던 내 말을 끊으며, 그녀가 한마디 말을 입에 올렸다.

 

 

 

 

 

 

 

 

 

 

 

 

 

“싫어?”

 

단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감각.’ 여러 소설에 줄곧 등장하는, 아주 흔해빠진 표현. 그러나 묘사를 착안해 낸 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알지 못 할 감각. 

 

하지만 지금,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아주 확실하게. 온 몸의 모든 신경이 기립해 옷이 쓸리는 감각마저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감각을, 오로지 그 한마디로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의 시선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혈관이 급격하게 수축하고, 온 몸이 독을 삼킨 듯 경련했다.

 

왜 엘리가 갑자기 저런 태도를 취하는지, 그런 것을 고찰할 심적 여유조차 없었다. 몸이 보낸 신호는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경고하고 있는 것은 일관적이었다.

 

“싫어...?”

 

지금 눈 앞의 있는 것은,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찢어발길 정도의 괴물이라고.

 

시야가 모자이크를 보는 것처럼 흐렷지만, 나의 시각은 단 한가지의 신호 만큼은 잡아 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박힌, 방금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보석같았던 두 눈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을.

 

그 색은, 피의 바다속 심연을 연상케 할 정도로 짙디 짙었다. 

 

“엘리...”

 

주변 환경이 어둑해졌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일전의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며, 커다란 홀을 게걸스럽게 잠식해가고 있었다. 불길해보였지만 무해했던 여태까지와는 다르다.

 

그림자가 기울어지듯이, 새하얀 식탁보가 검게 물들었다. 연기와 같은 힘의 파편들이 혀를 낼름거렸다. 나는 그 감각을 외면 할 수 없었다. 

 

“윽... 끄아악!”

 

잠깐의 이물감, 그리고 고통이 분출된다. 냉기서린 무언가가, 덫에 걸린 사냥감을 포박하듯 내 양 사지를 휘감아 쥐었다. 

 

벗어나려 발버둥칠수록, 그것들은 오히려 힘을 더했다. 팔다리가 비틀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애먼 비명밖엔 지를 수 없었다. 

 

“허억... 하아... 우욱...!”

 

시야가 햐앟게 질려버려 의식을 놓아버리기 직전, 한 순간에 나의 몸은 자유를 되찾았다. 다리의 힘이 풀려 쓰러지듯이 의자에 앉았다. 못다한 숨을 몰아쉬는 한 편, 속에서 구역감이 올라왔다.

 

“미...안...” 

 

귀에 들려온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세상이 아직 누렇게 질려 보였다. 초점이 잡히자, 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양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 어째서? 미...안해, 윌...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읊조리듯이, 엘리는 그 한마디만을 반복했다. 본래의 색을 되찾은 눈은, 그러나 극도로 수축되어 특유의 빛을 잃은 상태였다.

 

“저, 정리... 하고 올게.”

 

더 이상 같은 자리에 있기가 두려웠던 나는, 그릇과 수저를 치운다는 명목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공포에 집어삼켜져 있던 나의 두 손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었다. 그릇을 쥐고 있던 힘이 풀리자, 자유낙하한 용기가 테이블과 부딪혔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그것은 형체를 잃고 산산히 흩어져 버렸다. 깨져버린 그릇 안의 죽이 테이블 위로 번지며, 수분을 흡수한 식탁보가 젖어 들어갔다.

 

그것은 방아쇠의 역할을 하여, 안 그래도 진정될 기미가 없었던 심장을 더더욱 미칠 듯이 뛰게 했다. 이 실수가 그녀의 비위를 거슬렀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나는, 자리를 뜰 변명거리조차 남기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홀로 남겨진 그녀는, 끝없이 같은 단어만을 반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