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가 지나 휴가를 나왔다.


마침 바쁜 일도 없는 시기여서 기일을 맞출 수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무덤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친척도 없는데, 이걸 정리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칼!"



"일찍 왔네."



마크는 릴리랑 같이 놀던 절친한 친구였는데, 내가 백작님 댁으로 가게 되면서 멀어졌다.


옛날엔 질릴 정도로 봤는데 지금은 편지로 연락하면서 일정을 맞춰야 간신히 볼 수 있다.



"어휴. 작년엔 도저히 나올 여력이 없어서 말이야. 어떻게 살고 있었냐?"



"나야 뭐 여전히 거기서 일하지."



"그때...우리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너희 부모님도 그렇게 되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런 얘기는 뭣하러 해."



"들어봐. 내가 경비대에 들어간 건 편지로 얘기했지?"



"그래서 작년엔 아예 못 만났잖아."



마크는 도적 떼같은 나쁜 놈들을 잡겠답시고 경비대에 자원했다.


의외로 적성에 맞았는지 안 때려치고 잘 하고 있다.


몸 쓰는 데 재능이 있어서 수습 기간도 빠르게 뗐다고 한다.



"근무 서는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더라고. 진짜 인연이란 게 있긴 하는 갑다."



"익숙한 얼굴?"



"릴리. 릴리를 봤어. 감전된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릴리? 우리가 아는 그 릴리?"



"그럼 누구겠냐. 그 긴 시간 동안 못 봤는데도 바로 알겠더라고. 설마 거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지."



"이야~ 어떻게, 잘 살고 있데?"



"직접 물어봐."



"직접?"



"여기 같이 왔거든."



마크는 이쪽으로 오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와, 진짜 칼 오빠야?"



"누구세요?"



농담이 아니고 진짜 못 알아봤다.



"옛날의 그 왈가닥 꼬맹이는 어디 간 거냐? 이렇게 얌전해져서는..."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 아가씨는 여전히 시끄러운데.



"어? 너네 둘..."



"부럽냐?"



"약혼..."



한대 패고 싶게 생긴 표정을 지으며 반지를 강조하고 있다.



"웃는 게 너무 예뻐 보이는 거야.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듬직하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그래 축하한다. 둘 다 시집 장가는 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비싼 거로."




*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다.


어두운 얘기도 했다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얘기도 했다가, 앞으로의 이야기도.



"...그래서 일찍 도착한 김에 무덤 정리나 하러 갈까 했는데 릴리가 따라와서 도와준 거지."



"연락은 끊겼어도 다들 고마운 분들이었으니까..."



"고맙다."



"칙칙한데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나저나, 너는 좋겠다?"



"뭐가."



"네가 모시는 아가씨. 명성이 자자하거든. 특출나게 아름답다던데."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에 팔다리도 길쭉하고 아주 그냥 숲속의 요정이니 뭐니...진짜 그 정도로 예쁘냐? 부럽다 진짜."



"...부러워? 오빠?"



"아니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



"그게 부러워할 일이냐. 돈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사심을 품을 수도 있고.



"웃기는 놈이네 이거. 그렇게 예쁜 여자를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행운이고 복지인 거다. 네가 시커먼 놈들이랑 부대껴 봐야 지금의 생활이 소중한 줄 알지."



"그러냐...어쩌다가 그렇게 소문이 퍼졌냐?"



"그 뭐시냐. 니랑 나랑 편지 보내고 받을 때 있잖아."



"어."



"내가 어려운 글자는 몰라가지고 나름 귀족 물먹은 놈한테 커피 타주면서 부탁했거든."



어쩐지 마크가 편지를 깔끔하게 잘 쓴다 했더니만.



"그놈이 주소지를 보더니 친구가 여기서 일하냐면서 알아보더라니까."


"반짝반짝한 도련님들이 그렇게 달라붙는데도 죄다 거절을 하더래."


"비교할 만한 여자가 엘프나 황녀 정도밖에 없다더라."


"이야. 내가 그거 듣고 속으로 생각했거든."



"이 새끼 그 아가씨한테 반한 거 아니야?라고."



"푸흡!!"



"뭐야. 괜찮냐? 아 비싼 건데 이거..."



"야. 큰일 날 소리 하지 마라. 주제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가씨를 여동생처럼 생각한다고."



그래야만 해.



"그래? 그럼 연하 아가씨보다는 연상 메이드 누님인가?"



"미친 시발. 나보다 최소 15살 연상이다. 전원 유부녀고."



딱 한 명 빼고.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럴 수가..."



"오빠. 그러니까 소설 좀 그만 읽으랬지."



마크는 환상이 깨져서 충격받은 표정을 하고 있다.



"음. 그럼 마음에 둔 사람은 없겠네?"



"...없지."



"야, 그러면 퇴직하는 건 어때?"



"퇴직?"



"따로 글도 배울 수 있게 해주셨다면서. 네가 나중에 독립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 같은데?"



마크 말대로 백작님은 나한테 미셸 아주머니를 비롯한 다른 하인을 붙여 글과 수를 가르치게 하셨다.


일을 더 잘 하라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이 녀석 말이 맞을 거다.



"친한 사람 없어서 외롭다고 편지로 찡찡거렸잖아. 사용인 월급이야 거기서 거기일 거고."


"내가 릴리랑 결혼해서 정착하면, 너도 그쪽으로 오는 거야. 마침 거기 있는 서기도 좀 나이가 들어서 슬슬 후임 구하던데 네가 딱이지."


"괜찮지 않아? 옛날에 우리가 살던 마을은 너무할 정도로 깡촌이었지만, 여긴 경비대도 가깝고 나름 큰 마을이야.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



릴리는 말없이 마크의 손을 잡았다.



"그때처럼 같이 지내고 싶다. 나는."



"나도 그러고 싶다. 좋네."



너도 나도 그 시절을 그리워했구나.


아가씨한테 마음이 움직이려고 하는 지금, 좋은 기억만 남기고 헤어지는 것도 좋을 거다.



"그리고 노총각 되기 전에 내가 여자 좀 소개해 줄 수도 있지."



"진짜로??"



연인이 생긴다면 생각나지도 않을 거다.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 아닌가?



"고럼. 이 형님한테 말만 하면 바로 취향 따라 리스트 쫙 뽑아줄 테니 걱정 말라고."



"어이 네놈...! 믿고 있었다고 젠장!!"



"...아는 여자가 그렇게 많았어?"



"오해하지 마...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이니까."



아...친구들이 이렇게 닭살 돋는 연인이 되었다니. 축복할 만한 일이긴 한데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내 남동생과 여동생이 결혼하는 걸 지켜보는 심정이다.



"ㅋㅋㅋ그나저나 이 새끼. 얼굴 표정 싹 변하는 거 봐라. 그렇게 여자가 고팠냐? 취향부터 얘기해 봐."



"으음...키 크고 예쁜 여자?"



"어우 씨. 빡센 조건인데. 있기는 있다만 이런 여자들은 눈 높을걸?"



"그래도 칼 오빠 정도면 안 꿇리지 않을까?"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칭찬하는 거야?"



"지랄을 하네."



"너도 겉보기엔 멀쩡하니까 금방 이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질투 말고 축복을 해라."



"질투는 무슨. 근데 너희 둘이 결혼하면 나는 릴리를 뭐라고 불러야 되냐? 제수씨?"



"형수님이지 이 새끼야"




*




마음을 굳혔다.


저택을 나가기로.


오랜 시간 정도 많이 쌓인 저택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쉽지만 설레기도 한다.



"칼 씨! 도착했네요?"



물 좀 마시러 나왔는데 소피 씨랑 마주쳤다.



"칼 씨가 휴가 나간 동안 제가 뭘 했는지 알아요?"



"엄청 들뜨셨네요.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후후...제가 대신 아가씨를 모셨죠!"



소피 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 일을 잠깐 대신 맡은 게 오히려 좋았나 보다.


아가씨의 피부가 희고 곱다. 나는 여자라서 아가씨의 옷도 갈아입혀드렸다. 등등...


이어지는 호들갑을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아가씨랑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래서 좀 친해진 것 같아요. 저한테 개인적인 부탁도 다 하시고."



"무슨 부탁이요?"



"음...그건 비밀이에요! 죄송해요."



여자들끼리만 할 수 있는 부탁인가.



"아 너무 제 얘기만 했나요? 칼 씨는 친구분들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그래도 나름 친해졌으니 소피 씨한텐 얘기하는 게 좋겠지?




*




"그만두신다고요?"



"당장은 아니지만 그러려고요."



"너무 갑작스러운데...친구분들이 그리우셔도..."



납득하기 힘든 게 당연하다. 내가 친한 사람은 없어도 인간관계가 나빴던 것도 아니니.


이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나...



"...가족을 만들고 싶어서요."



"네?"



"가족이 없으니 항상 허무하고 외롭더라고요. 근데 여기 있다간 노총각으로 죽을 것 같아서..."



"..."



하...엄청 쪽팔리네. 나를 엄청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본심을 말할 수는 없다.



"그렇군요...아쉽네요..."



"오늘까지는 제가 하니까 푹 쉬세요...내일 아침부터 바꾸면 돼요."



"네..."



어이가 없었겠지. 나도 안다.


내일 당장 그만두는 것도 아닌데 이제 소피 씨 얼굴 어떻게 보지...




*




"아가씨, 목욕물이 준비되었어요.'



"고마워요."



'아...같이 들어가고 싶다.'


내일부터 다시 잡일로 돌아가는구나...칼 씨가 부럽다.



"아쉽네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그런 게 아니고, 내일부터는 소피 씨랑 같이 있지 않으니까요."



"앗..."



"그 녀석 얼굴은 이제 그만 보고 싶은데."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웃고 계시는 걸 보니 정말 친한 사이인가 보네.


그런데 진짜 그만 보시겠네...



"...아가씨, 그 전에 말씀하신 것 있잖아요."



아까 칼 씨에게 말했던, 아가씨가 내게 하셨다던 개인적인 부탁.


칼 씨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몰래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고, 칼 씨가 원하는 게 있는지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칼 씨가 곧 떠난다면 선물을 준비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칼 얘기요? 갖고 싶은 게 있대요?"



이렇게 잘 챙겨주시는 아가씨를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떠나려 한다니.


아니...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는 또 아닌가?


그냥 내가 아쉬운 걸지도...



"그게 실은...아까 칼 씨를 만났거든요."




*




"...그런 이유로 그만두시겠대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쉽네요."



"아..."



"어? 아가씨, 왜 떨고 계세요? 혹시 목욕물이 좀 차가웠나요?"



"아니요...그냥 감기 기운이 조금 있나 봐요."



"난로에 불을 좀 더 키워둘게요. 푹 쉬세요."



"네...고마워요."



...



온몸이 떨린다. 숨쉬기가 힘들다.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짝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 비친 감정은 내 착각이었을까?


오랜 짝사랑이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든 걸까?



'...마음을 좀 더 독하게...'



...내 거야.



절대로 안 줘.



...추워...



"이건 오늘 배운 호신술인데, 어때? 진짜 못 빠져나오겠어?"



"아파...놔 줘."



호신술이라는 핑계로 몸을 밀착시켰을 때, 그때의 반응은 절대 아파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곤란하니까 떨어져 달라는 듯한 얼굴과 말투. 적어도 나를 여자라고 여기고 있다.


내가 아닌 여자랑 행복해하는 얼굴을, 그걸 무력하게 지켜볼 바에는...


차라리...




*




"아가씨가 몸이 조금 편찮으신가 봐요."



"정말요?"



"어제저녁부터 감기 증상이 있으셨어요. 점심 식사까진 죽으로 가져다드리고 꼭 상태 확인하세요!"



"네. 수고하세요~"



웬일이래. 날씨가 그렇게 추웠나?






"들어가겠습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워있는 아가씨를 발견했다.


이게 얼마 만에 누워있는 모습인지.



"죽이랑 감기에 좋은 차야. 몸은 좀 괜찮아?"



"..."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혹시 목이 아파? 그럼 고개만..."



"아니."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 아픈 거 맞나 보네...


소피 씨와 어제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하려 했는데.



'아픈 애 붙잡고 길게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다음에 할까.'



식사를 마친 뒤 리타가 입을 열었다.



"저녁은 됐어. 안 먹을래."



"그래. 말해둘게."



"일찍 자고 싶으니까 목욕물은 좀 일찍 데워줘."



"응. 그리고?"



"잘 시간 되면 난로에 장작 좀 더 넣어줘."



"알았어. 푹 쉬어."



"...마지막으로, 좀 미안한 얘긴데."



"뭐가?"



얼마나 미안한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망설이는 거야.



"...너 땀 냄새나. 장작 넣으러 오기 전에 깨끗이 씻고 와. 옷도 갈아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