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얀붕은 모종의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태에 휘말리고 말았어.

깨어나 정신을 차려보고 나니까, 시야에는 콘크리트로 이뤄진 거대한 마천루가 가득해.


마치 거대한 콘크리트의 벽들이 하나의 거대한 숲을 구성한 느낌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

사람들도 굉장히 빼곡했어, 숲에도 여러 짐승들이 가득하듯이 말이야.


사실 나무가 아닐 뿐이지, 어쩌면 이곳도 하나의 숲과 같다고 봐도 좋을지도 몰라.

그래서 이런 콘크리트로 이뤄진 숲 사이에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에 얀붕이가 두려움을 느꼈냐고? 아니, 전혀.


세계 최초의 여객용 모노레일이 얀붕이가 거주하던 도심에서 개통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정도로 도시화가 눈부시게 이뤄진 곳이라면, 도시와 그 속을 수놓은 인파는 겁날 것 없지.

 

다만, 도무지 적응할 수 없던 낯선 요소들이 있었는데, 바로 앞서 얘기한 마천루들이야.

얀붕이의 동네에도 높은 건물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높은 건물들은 많지 않았어.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은 건물들이 한 채도 아니고, 이렇게나 많이…….

 

구름도 비행선도 아닌, 건물을 쳐다보기 위해서 이렇게나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올려야 한다니,

한편으로는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두려움이 느껴지는 얀붕이었어.

 

 

‘그런데,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아, 그러고 보니 팔자 좋게 건물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분명 점심 약속 때문에 길을 나서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이상한 일에 휘말린거니까.

 

‘혹시,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만 봤었던 그 뉴욕인가?’

 

지난 날, 아침에 커피를 홀짝이며 읽었던 신문에서 본 뉴욕의 풍경이 생각났어.

확실히, 그 사진 속에서는 직사각형 모양의 마천루들이 상당히 많아 보였어.

 

뉴욕의 풍경 사진이 갖췄던 특징을,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그대로 지니고 있었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뉴욕이겠구나.’ 라는 전제하에 얀붕은 질문할 내용들을 구상했어.

 

‘이곳이 뉴욕인가요?’, ‘여기가 미국이 맞는거죠?’, ‘대사관이나 관공서는 어디로 가아햐죠?’

간결하지만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까지 전부 끝마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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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의 시야는 이제 거리를 거닐고 있는 시민들을 향했어.

어라라, 그런데 옷차림들이 좀 다들 희한하네? 전혀 못 보던 옷차림들만 잔뜩이야.

 

‘뉴욕 거주민들은 패션들이 괴상하네.’

 

얀붕이는 내심 생각했어. 그래, 아무리봐도 얀붕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복장이었거든.

분명 자신처럼, 혹은 그들 미국인의 뿌리인 영국인들처럼 정장을 입은 차림새가 기본적이리라고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거든.

 

얀붕이가 사람들을 희한하게 여기며 바라보고 있었던 찰나,

아주 재밌게도 다른 사람들 역시 얀붕이를 신기하게 한 번씩은 바라보고는 했어.

 

얀붕이 차림새는 좋게 말하면 빈티지(Vintage) 스타일의 정장 차림새였지만,

곧이 곧대로 말하면 정말 1900~1920년대의 스타일 그 자체였거든.

 

모 OTT 사이트에서 유명했던, 영국인 갱단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찍은 드라마 작품이 있었는데,

얀붕이 차림새가 그 작품 속 인물들의 옷맵시랑 아주 판박이었지.

 

요즘 사람들은 웬만해서 잘 쓰지 않는 헌팅캡(다른 말로는 플랫 캡이라고 한데.)부터 시작해서,

조끼(Vest)에다가 블레이저 자켓의 주머니에 꽂혀있는 손수건까지……

 

어떻게 보면 이목이 안끌릴 수가 없는 패션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였던 거지.

아마도 다들 ‘뭐 패션 모델인가, 아니면 뭐 드라마라도 찍나?’ 하고 신기해서 바라봤을 거야.

 

아무튼, 얀붕이는 일단 여기서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어.

어쩌면 질문의 전제와 순서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래서 머릿속에서 한 번 보완하기로 했어. ‘여기가 뉴욕인가요?’ 라는 물음을 아예,

‘여기는 어디죠?’ 로 바꾸고, ‘여기는 미국이 맞는거죠?’ 라는 질문은 아예 빼버리기로.

 

좋아, 완벽해. 이제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답변을 듣기만 하면 되는 거지.

얀붕이는 발걸음을 옮겼고, 그래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자신과 비슷한 복식을 갖춘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어.

 

자신과 비슷한 복식을 갖추고 있다면, 틀림없이 얀붕이 본인과 같은 인종이면서

비슷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사람일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지.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폰(Von) 얀붕인데, 혹시 이곳이 어딘지……

 

“아?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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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 찌르듯이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얀붕의 질문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어.

그래, 피곤에 절은 나머지 그저 ‘집, 집에 좀 가자’ 라는 단순한 생각만 반복적으로 떠올리면서

퇴근길에 오르는 중에, 갑자기 누가 불쑥 나타나서 말을 걸었다면 놀랄 만도 하지.

 

 

“이봐요, 그렇게 사람을 놀래키면……!”

 

미안합……, ?”

 

여자도 놀랐겠지만, 얀붕이쪽도 만만치 않게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어.

분명 앞서 언급했 듯,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종이고 문화를 지녔을 거라 짐작했는데 말이야.

 

이게 웬 걸, 옷만 정장 차림이지 얼굴 생김새는 전혀 본인이랑 같은 인종이 아니네?

게다가 여자의 입에서는 얀붕이는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언어가 나오고 있는 걸?

 

 

‘조졌네, 여기 진짜 어디냐?’

 

얀붕이는 너무나도 심란해진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렸어.

앞에서 여자가 뭐라고 막 얘기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어 오지를 않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무리 봐도 영국도 미국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여기가 도대체 어디라는 거야?’

 

‘애당초 이게 지금 현실이 맞기는 한 걸까? 혹시, 내가 점심 약속을 나가던 도중 기절이라도 한 건 아닐지?’

 

얀붕이의 마음속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크게 요동치고 있었어.

자신도 모르게 동공은 차분함을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했지.

 

이런 얀붕이의 모습이 여자의 두 눈동자에 역력히 들어오기 시작했어.

대뜸 불쑥 나타나서는 사람이나 당황하게 만들고는, 사과도 안하는 모습이 아니 꼬왔지만,

 

어느덧 이마랑 콧잔등에도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려하는게, 많이 안쓰러웠나봐.

여자는 얀붕이를 향해서 정신이라도 차리라는 듯, 꽤나 큰 소리로 목기침을 뱉어냈어.

 

작지 않은 흠, 흠 거리는 목기침 소리에 얀붕이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지.

얀붕이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 모습을 그리고 그의 흐뜨러져있던 정신이

다시금 차려진 모습을 확인한 여자는, 얀붕이에게 영어로 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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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영어 가능해요?”

 

영어가능하죠당연히 되고 말고요.”

 

얀붕이는 곧바로 그녀의 질문 겸 요청대로 영어로 대화를 전달하기 시작했어.

둘 사이에서 한 열 마디 정도 오고 갔을까? 길지 않은 대화가 끝났을 무렵, 얀붕이의 표정은 그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차분했어.

 

해결 방법을 찾아냈기에 속 시원해져서 차분해진 거냐고? 아니.

그녀로부터 들은 답변들이 하나같이 전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야.

 

미국도 영국도 아니었고, 수많은 영국령 식민지들 중 하나였던 곳도 전혀 아니었던 거지.

게다가 년도는 1900년대가 아니라, 2024년이래. 얀붕이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

 

점심 약속을 나서던 도중 말 같지도 않은 이상한 괴현상에 휘말리는 바람에,

평생을 주워듣기만 해봤지, 막상 한 번도 와 본적도 없는, 전혀 모르는 곳으로 떨어졌다? 그것도 124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서?

 

첩첩산중으로 년도 차이가 극심하게 나기 때문에 지갑 속 화폐도 사실상 무용지물이고,

신분증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 마저 그녀로부터 듣게 된 얀붕이었어.

 

즉, 얀붕이 본인이 지닌 지폐나 신분증을 들이밀어 봤자,  상대방 입장에서는 장난치는 줄로만 알을 거라는 거야. 

‘역사적 소품에 정말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소리나 들으면 다행이래. 재수가 없으면 더 심한 말도 들을 거라나 봐.

 

 

‘염병, 진짜! 내가 살면서 뭘 그렇게 천벌 받을 짓을 했다고?!’

 

화폐를 쓸 수 없으니 대중교통은 꿈도 못 꿀 지경이고, 여기 사람들 모두가 이 여자처럼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된다고 보장할 수도 없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진퇴양난 그 자체인 상황, 형용할 수 없을 무거운 갑갑함에 얀붕이의 속은 타 들어만 갔어.

나름 이름있고 경제력 있는 집안의 자제인 얀붕이었기에, 살면서 이렇게 까지 주눅 들어볼 일이 없었는데 말이야.


정작 이곳에서는 그런 혈연도 자택도, 친지도 아무것도 없었으니,

얀붕이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기세가 아주 초라해지고 말았어.


이제는 상황이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져버리고 말았어,

심지어 해 마저도 슬슬 주홍빛을 띄면서 뉘엿거리는게 이대로 가다가는 길바닥에서 자야 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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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었어. 비참하다 못해 비루먹은 말처럼 그 꼴이 말이 아닐지라도,

지금의 이 행동이 가문과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일지라도, 방법은 이것 뿐이었어.

 


“저기, 염치없지만……, 정말로 미안하지만, 부탁입니다! 나 폰 얀붕을 좀 도와주십시오!”

 

얀붕이가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향해 그대로 양 무릎을 바닥에 꽂아 내리며 꿇어 앉은 채 부탁했어.

여자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뭐 하는 짓이냐며 손사래를 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얀붕이는 도무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설 생각이 없어 보였어.

 

 

“아, 제발……. 진짜 나 창피해요. 사람들 많은 데서 무릎 꿇고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나를 도와주신다면 내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옛 시절부터 뼈대 있는 백작가인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조 하겠습니다. 당신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얀붕이는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부릅뜸과 동시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목에 힘을 주어 꿋꿋하고 당돌하게 그녀에게 말했어.

 

 “아, 알았어요! 일어나요! 도와주면 될거 아니예요!”

 

“대신, 상황이 나아질 때 까지만 이예요. 알았어요?”

 

얀붕이의 강경한 부탁에 여자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는 듯이, 결국 그의 요청을 받아줬어.

얀붕이는 그제서야 꿇었던 무릎을 천천히 펴고 일어났지,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과 가문의 이름을 걸어 감사를 표했어,

 

“정말 고맙습니다. 나 헤르베르트 폰 얀붕, 당신의 은혜를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내게 내밀어준 자비는, 나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대서양보다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준 당신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여자는 얀붕이의 과한 감사 인사에 잠시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썩 나쁘지 만은 않았는지, 배시시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답했어.

 

“내 이름은 얀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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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下) 편으로 돌아오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