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얼굴이군. 어디로 가는 길이지?”

“큼. 나에기님의 도시로 가는 길이다.”

 

프렌이 처음 들은 것은 목소리가 갈라져 완전히 쉬어진 소년의 말이었다.

 

“무슨 볼일인가? 신분증을 보여주겠나?”

“여기.”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 품속에서 사진이 담긴 신분증을 꺼내 프렌에게 보여줬다.

프렌은 신분증을 빼앗고 앞뒤로 조사하다가 특별히 이상한 구석이 없어 다시 돌려줬다.

 

“레이 아프테 남작이라…. 지금은 없는 론드라 나라의 인장도 확실하군. 실례했군. 자. 돌려주지.”

“…….”

 

소년은 받지 않고 앞자리에 앉은 소녀에게 말했다.

 

“메이르.”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메이르가 어깨를 들썩였다.

 

“네?”

“너가 받아라. 그다음 천으로 닦아 내게 돌려줘라.”

“네? 아…… 네.”

 

메이르라 불린 소녀가 공손히 신분증을 받고 손수건을 꺼내 신분증을 닦았다.

프렌이 자세히 보니 검은 목줄이 보였다.

그리고 기분 나쁜 듯 말했다.

 

“내 손은 그렇게 더럽지 않…… 뭐 됐나. 시간을 허비했군. 좋아. 움직여도 좋다.”

“…찾고 있는 사람을 얼른 찾았으면 좋겠군.”

“…….”

 

프렌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외관을 바꾸더라도 사람 찾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다. 비밀이 있어봐야 저택에서 자란 세상물정 모르는 13살 꼬마 놈. 그런 애가 3일만에 독감에 걸린 채 노예를 데리고 도시로 되돌아간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애기군.’

 

프렌은 멀어져가는 마차를 다시 뒤돌아봤다.

 

“결정적인 건 습성이다. 겨우 볼츠 따위에게 무서워하고 주어진 신분에 설설 기던 녀석이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귀족을 연기할 수가 없지.”

 

프렌은 그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

 

 

 

덜덜.

덜덜덜.

 

프렌과 마주치고 난 후 마차는 한참이나 움직였다.

그로인해 내 몸도 덜컹 움직였지만 그것보다 더 심한 떨림은 진동했다.

몸 안의 긴장 때문에 그런 것이다.

메이르가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이제 괜찮아요. 그 사람은 이제 안보여요.”

“허억… 헉….”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신분증을 보여주기 시작할 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렸다.

다행히 메이르가 내 낌새를 눈치채고 내 말에 맞춰줬다.

 

“고마워. 연기는 진짜 쉽지 않네.”

“그게 연기였다고요? 그럼 귀족이 아닌 거예요?”

“위조된 신분증이야. 하지만 손이 떨리는 걸 들켰으면 위험했겠지.”

“…흠. 괜히 도와줬나요? 하지만 그 엿같은 감옥보다 당신 옆이 더 나은 건 확실하니깐요. 이제 돌아가나요?”

“노을이 지면 다시 되돌아가자. 밤에 접선하면 되니깐.”

 

메이르와 말을 나눈 후 나는 마부에게 말했다.

마부는 되돌아간다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나야 돈만 받으면 되죠. 시간도 아끼고. 그럼 여기서 잠깐 낮잠 좀 자겠습니다.”

 

마부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부석에 웅크리고는 눈을 감았다.

 

“메이르 잠깐 일로 와.”

“네.”

 

마차가 멈춰선 길가에서 벗어나 수풀이 무성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검을 쥐어본 적 있어?”

“…아뇨. 검은커녕 식칼 하나 쥐어본 적 없어요. 만약 저한테 가사를 맡긴다면 크게 후회……”

“그런 건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어.”

“잠깐만요.”

 

메이르는 뭔가를 깨달은 듯 날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당신 몸을 보느라 그때 제 이름을 불린 걸 까먹고 있었군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안 거죠?”

“그야 간단하지.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검 하나는 대단히 잘 쓰는 알키모스 가문의 막내딸이잖아?”

“소문을 듣고… 아니 몽타주나 그런 걸 보았나보군요. 이 먼 곳까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이제 어쩔 거죠? 관에 넘길 건가요? 저한테 해를 가하려 한다면 제가 도망가거나 반항하는 것도 가능한데요?”

 

메이르는 자신의 검은 목줄을 쓰다듬었다.

엄연히 갑과 을의 관계지만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전혀 운명에 비굴하지 않은 자세를 보여준다.

비록 책에선 주인을 잘못 만나 학살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만…….

 

‘지금은 그렇게 만들지 않겠어. 그리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강력한 힘도 필요하고.’

 

“네 복수를… 나도 도와주겠다. 메이르.”

“…….”

 

메이르는 더 커진 눈으로 나를 강렬히 노려봤다.

 

“내 복수를 도와주겠다고요? 나는 힘이 없어도 강함은 볼 줄 알아요. 당신은 내 오빠나 아버지에게 전혀 미치지 못해요. 손을 보아하니 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복수를 도와주겠다고요? 또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

“인간을 불신하는 네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어떤 것보다 내게 큰 이득이야.”

 

메이르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그런 말 따위로 저에게 환심을 사는 행위따윈 불필요……”

“메이르. 이걸 받아라.”

 

나는 품속에 고이 숨겨둔 청석의 단검을 메이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지 똑똑한 너라면 알 거야.”

“이, 이건 청석의 단검!”

 

흉흉한 청색 빛이 단검에 감돌았다.

 

“무엇이든 벨 수 있는 단검! 이걸 당신이 갖고 있죠? 아, 그래서 이아가르 가문이 당신을 쫓고 있는 거군요!”

 

흥분한 메이르를 보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이제 그건 네꺼다. 메이르.”

“……네?”

 

메이르가 벙찐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그걸 갖고 도망쳐라. 네 복수에 사용해도 좋고 팔아서 수만 골드로 사람을 고용해도 좋다. 하지만 내 이 말만큼은 꼭 귀 담아 들어줬으면 좋겠다.”

 

책에서 나에기가 메이르에게 이 단검을 주며 한 말을 내가 하려니 좀 낯간지러웠지만….

 

“그 단검보다 네가 몇백 배는 더 귀중하다. 넌 네 진정한 힘을 모르고 있다. 그 힘을 날 위해 써줘라. 메이르.”

“…….”

 

메이르는 단검을 꼭 쥐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비록 나에기만큼의 능력과 카리스마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

 

 

 

밤이 되어 마차는 다시 외곽 도시로 돌아왔다.

프렌은 어디쯤 있을까? 잠도 자지 않고 밤낮으로 수색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다른 사람을 조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깐이지만 용의자에서 벗어났기에 이렇게 밤에도 움직일 수 있는 거다.

 

“셀레아로 가는 짐마차를 구했다. 짚을 실은 마차에 올라타 그 짚아래에 숨어있으면 된다. 도착까지는 일주일이상 걸릴 거다.”

 

골목길에서 다시 남자를 만나 탈출 경로를 구했다.

 

“지금 움직이면 된다. 북서쪽 입구에 세워진 마차다.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고맙다.”

“감사를 받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남자는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책에 그려진 삽화대로 머리카락이 삐쭉삐죽 헝크러진 청년 아게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르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낌새를 보아하니 내 정체도 아는 눈치인데….”

 

나는 턱을 긁었다.

 

‘과연 길마가 신뢰하는 부마스터 답군. 감각이 날카로워.’

 

“100골드.”

“뭐?”

“내 정보를 사고 싶으면 돈을 줘라. 그게 거래 아닌가?”

“…흥미롭군.”

 

아게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그때는 100골드를 주고 자네 정보를 사도록 하지.”

“그때는 열 배에 팔 거다.”

“하하하! 그건 거래가 아니지. 아무튼 재미있는 친구군. 잘 가게.”

 

나와 메이르는 아게르가 알려준 정보를 따라 길을 걸어갔다.

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길가에 마법석이 설치된 가로등덕에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입구쪽에 허름한 짐마차 여럿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짐마차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셀레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맨 뒷 마차로 걸어가아래 짚을 뒤적였다.

짚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나무받침이 있었기에 안쪽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훵 비어있었다.

 

“꽤 쾌적하네.”

“…….”

 

나와 메이르가 올라타고 빈공간을 다시 짚으로 메우자 짐마차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메이르가 말했다.

 

“이제 알았어요. 첫 인상은 최악이었지만 당신이 생각이 없는 바보는 아니라는 건요. 솔직히 감탄했어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당신의 생각대로 이렇게 흘러가는 모습이요.”

“…첫 인상은 잊어줘.”

“후후.”

 

메이르가 처음으로 웃었다.

 

“뭔가 낭만적이네요.”

“난 허리가 아픈데.”

 

짐마차의 덜컹거림이 아까 앉아서 탔을 때보다 더 심했다.

그래도 메이르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경험이 늘 지루한 챗바퀴인 현대인의 삶보다 늘 부려먹히던 하인의 삶보단 나았다.

 

“당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당신이 말한 제 힘이 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메이르가 갑자기 다가와 입술을 부딪혔다.

달콤하지만 씁쓸한 맛이 났다.

 

“당신은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날 사줘서 고마워요. 복수까지 가는 여정이 어렵고 장애물이 많을 테지만…….”

 

메이르의 가느다란 손이 내 목을 둘렀다.

간지러운 숨소리가 귀에 닿았다.

 

“만약 내 복수가 성공한다면…… 그땐 내 몸과 마음은 영원히 당신 꺼예요. 내가 보증하죠. 루크.”

“…….”

 

미소녀가 달라붙어서 속삭이는데 왜인지 모골이 송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