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와 메이르가 짐마차에 숨어 도망가고, 프렌이 분신을 이용해 한창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하아.”

 

나에기 이아가르는 아버지의 저택에 도착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테이블에 놓인 홍차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아니, 맞은 편에 앉아서 안절부절하는 약혼자 비하르 애디넬이란 공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보였다.

 

“나, 나에기양……. 혹시 기,기분이 별로 안좋으신가요?”

“뭐라고요?”

 

순간 기백에 놀란 비하르란 소년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홍차를 얼른 홀짝였다.

그런 소년의 작태를 보며 나에기는 웃을 수 없었다.

 

‘한심해. 재능은 있지만 야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 부모 잘 만나 무료한 인생을 보내는 그저그런 소년일 뿐. 조금의 흥미도 동하지 않아. 이 지겨운 티타임은 언제쯤 끝날까.’

“나, 나에기양은 오, 오늘도 굉장히 아름다우시군요. 하하.”

“…….”

“…….”

 

비하르는 대답 없는 침묵에 시무룩해져 잠시 화장실을 갔다.

혼자 남게 된 손님 방에서 나에기를 다리를 꼬았다.

살랑거리는 청색 치마가 나풀거렸다.

 

“그래. 차라리 루크가 나아. 왜냐하면 내게 이런 시련을 주고 그저 그런 재능으로 살려고 아등바등하잖아?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내 목과 입을 막은 그 손길이…….”

 

나에기는 그것이 마치 그립다는 듯 아른거리는 눈빛을 뿜었다.

 

사실이 그랬다.

나에기는 지루했다.

모든 게 축복 받은 인생.

타고난 외모,몸매,환경,재능 등등등….

모든 것이 갖춰졌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것이든 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밑에 있는 자들의 목숨이 너무나도 하찮고 어리석어 보였다.

아니, 눈 앞에 있던 비하르란 소년도 차라리 독살을 시켜 없던 일로 해버릴까?란 생각도 든다. 마음만 먹는다면 완벽하게 증거인멸을 할 자신도 있었다.

나에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아야 해.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이인데 내 본성을 들킬 순 없지…. 마침 새로 찾은 장난감도 발견했잖아? 루크. 얼른 보고 싶네. 얼른 내 곁에 돌아와 그 전생의 지식으로 내 한없는 욕망을 밑바닥까지 다 채워줬으면…. 후후후후후. 아무도 모르는 지하에 쇠사슬로 구속해놓으면 그가 기뻐할까? 이참에 채찍질도 연습해놓지 않으면 그가 실망하겠지…? 음.’

 

나에기는 그런 미래를 그리며 얼른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

 

 

 

 

약 열흘이 지나 국경을 넘었다.

뇌물을 줬는지 국경수비대에서 짐마차를 뒤지는 일은 없었다.

레이 아프테로 변장한 루크와 메이르가 나란히 걸어가며 길가를 걷고 있다.

 

“엣취!”

 

순간 온몸에 한기가 들며 재채기가 나왔다.

뭐지?

 

“갑자기 감기인가요? 그렇게 춥지도 않은데….”

 

메이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올라오더라. 나에기가 내 애기를 하고 있나? 씁.”

“당신도 참 대단하네요. 나에기님을 건드린 것도 모자라서 이아가르 가문의 보물을 망가뜨리고 탈취하다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해요. 후후.”

 

메이르는 가짜 귀족인 나와 달리 여전히 귀족으로서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나에기에게 존칭을 썼다.

숨어있는 것 빼곤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메이르에게 모두 설명했다.

전생했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죽었을 테니깐. 나에기가 나한테 뭔 짓을 할지는 뻔했으니깐.”

“당신의 말은 이상해요. 내가 아직 알티모스 가의 막내딸이었을 때, 한 사교장에서 나에기님을 직접 본 적이 있었어요. 대화는 짧았지만 제 또래에 그렇게 품격 있는 귀족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라고요?”

 

물론 그렇고 말고.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널 부려먹어 한 도시의 인간을 모두 학살했다니깐? 그것도 재미로.

너도 만만치 않아.

 

“그 기분 나쁜 시선은 뭔가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아, 아냐. 메이르를 그때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자 메이르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고마워요. 루크.”

 

그렇게 대화하는 동안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입장한 나는 여관을 잡고 말했다.

 

“하룻밤 자고 다시 움직일 거야.”

“셀레아에 온 이유가 뭔가요? 마법이라도 배우려는 건가요?”

“그건 나중이야. 보물을 찾으려고.”

“보물?”

 

당연하다는 듯한 내 말에 메이르는 이제 토를 달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똑똑한 녀석.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작은 도시를 빠져나와 가도를 걷는 게 아닌, 주변에 있는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땀을 흘리기를 사흘이 지났을까?

나와 같이 삽을 들고 내가 지시한 있을 만한 곳을 흙을 팠던 메이르가 외쳤다.

 

“찾았어요! 이게 당신이 말한 금고가 맞나요?”

 

메이르가 두 손바닥만한 검은색 금고를 가볍게 들었다.

 

“응. 그거야. 잘 찾았어. 메이르.”

“당신이 지시한 걸 팠을 뿐이예요. 하지만 금고치곤 구멍을 꽂는 것도 없는데 어떻게 열죠?”

 

나는 피식 웃었다.

 

“네게 줬잖아. 뭐든 열 수 있는 거를.”

“아.”

 

메이르가 청석의 단검을 꺼냈다.

 

“그 생각을 못했네요. 무엇이든 벨 수 있다면 금고도 열 수 있겠군요!”

“한 번 해봐.”

“네.”

 

메이르는 손을 번쩍 들어올려 단검을 내려쳤다.

깡!

하지만 흠집만 날 뿐이지 금고는 멀쩡했다.

메이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무엇이든 벨 수 있다면서 베이지가 않아요.”

“도구는 주인을 가리거든. 메이르가 강해질수록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닌 걸 알 거야.”

 

메이르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무엇이든 알고 있네요. 물어보면 답해주지 않을 거죠? 그때 짐마차에서도 진실의 수정구에서 무엇을 말하게 할려고 했냐고 물어봤을 때 화제를 돌렸었죠.”

“…….”

 

메이르에겐 신뢰를 얻은 건 좋지만 복수가 완성되기까지는 모든 걸 터놓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근데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거…. 정말 괜찮은 건가? 뭔가 이상한 집착같은 게 묻어있지 않을는지 걱정됐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음새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봐. 그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열릴 거야.”

 

메이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노을이 어두워질 무렵 금고가 열렸다.

안에는 월녀검법(越女劍法)과 한철심법(寒鐵心法) 그리고 300년 묵은 연화단(蓮花丹) 3개가 들어있었다.

 

“모두 네 꺼야. 메이르.”

“……네?”

 

<악역영애 죽이기>란 이 소설의 세계관은 무공과 마법이 혼재되어 있다.

롤에서 자원을 원딜에게 모두 몰아주고 농구에선 농구의 신 르브론 제임스에게 공을 몰아주는 것처럼 당연하지만 무공에 재능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메이르 알키모스에게 영약과 무공을 몰아주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애초에 월녀검법과 냉(冷) 속성이 강한 한철심법을 남자인 내가 쓰기엔 어울리지도 않고….

놀란 듯 되물은 메이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이걸 알고 있던 건 당신이었잖아요? 이 귀한 영약과 무공에 관심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월녀검법과 한철심법을 제게 준다고요? 청석의 단검을 준 것도 모자라?”

“말했잖아. 네 신뢰는 그 보물에 비해 가치가 몇백 배는 더 귀하다고.”

“전 이미 당신을 신뢰해요!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제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으니깐요! 거기다 전 외팔이예요. 왼손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여자가 검법을 익히는게 맞을까요? 루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한테 잘 어울릴 거야. 날 신뢰한다고 했지? 그러면 거절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줘.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득을 보는 건 복수를 꿈꾸는 너와 너를 가진 나니깐.”

“…….”

 

메이르는 완고한 나의 말에 할 수 없이 금고함의 물건을 꺼냈다.

연꽃모양의 화단 세 개를 들어올렸다.

 

“…진짜 안 먹을 거예요? 루크.”

‘씁. 나도 하나만 먹을까? 갑자기 아까운데.’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3년동안 이 몸에 지내면서 느낀 건 루크란 캐릭터는 재능이 참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운동신경이 일단 부족하고 혹시나 싶어 기를 느끼려고 책장에 굴러다니는 삼류심법 삼재심법을 읽으며 운기조식도 해봤지만 한 달동안 기를 느끼기는 커녕 아까운 주식 생각만 머릿속에 흘렀다.

재능과 집중력이 부족하다. 일단 이게 내 결론이다.

메이르는 내 눈빛을 읽고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먹은 다음에 다시 달라고 하면 안 돼요. 알았죠?”

“얼른 먹어. 그 다음 한철심법을 운기해. 1성이지만 영약빨로 상당한 위력을 느낄 테니깐.”

 

메이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저한테 잘해주지 마요. 루크. 난 그렇게 좋은 여자가 아니예요. 당신에게 빠지면 빠질수록 납치감금하고 싶은 건 나에기님이 아니라 바로 저일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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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악역영애인데 전개에 너무 집중하느라 제목을 놓쳐버렸네요.


나에기 내용은 가능하면 계속해서 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