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지로 파머 선두! 메지로 파머 선두! 둘이 나란히 골인! 역시 앞에서 끝까지 버텼다!"


16명 중에서 두번째 인기, 뒤에서 말이지. 

올해 처음으로 g1을 이겼을 때는 트레이너 말고는 같이 사진도 못 찍었어. 나는 가문의 낙오생이었으니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딱 한명 빼고는. 

뭐 그때 이후로는 다시 가문에서 사람들도 우수수 오다가, 몇번 져버리니까 그때 이긴 걸 뽀록으로 생각했나봐. 오늘도 가문에서는 한 명도 안 온 모양이네.


"이로써 메지로 파머는 올해 양대 그랑프리 재패! 

최우수 시니어 우마무스메의 자리도 확실하겠죠!"


시끄럽게 소리치는 장내 중계 소리. 어느덧 장내의 웅성거림이나 중계 소리도 사라지고, 경기장에 무대가 들어선다. 예전에는 저기 올라갈 일은 있을까 싶었는데, 올라가도 맨 밑에서 들러리 신세는 아닐까 자조하기도 했었는데. 역시 내 힘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건.... 아, 이제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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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 역시 넌 위닝 라이브 센터도 어울린다니까! 축하해. 이게 네 진정한 힘이야. 규칙이나 시선 따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내달린 힘, 그게 마침내 결심을 맺은 거야."



트레이너도 참 겸손하네, 이걸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았을꺼야. 메지로의 낙오생 파머도 그저 그런 우마무스메로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겠지. 

바닥에 채일 정도로 굴러다니는 돌을 보석으로 깎아낸 건 당신이야. 트레이너.

아. 나도 할 말이 있었지. 항상 스스로한테 도망만 쳐 가면서, 주위 시선에 착한 아이를 연기해 가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더 주저하지 않아. 



"트레이너, 혹시 저녁에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 승전 파티도 겸해서 말이야..!" 



예전부터 아리마 기념이 최고의 g1으로 인정받는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특히 올해의 최종 결산이라는 의미가 크다. 이전까지 패전을 거듭했다 하더라도 기적의 부활로 대미를 장식하거나, 또는 신흥 강자의 대관식이 되거나. 


제일 재미있는 점은 아리마 기념이 거의 온천 여행의 전초전 같다는 점이다.

연말에 수억엔의 상금. 전국적인 파급력이 주는 고양감. 아리마 기념을 이긴 대부분의 우마무스메들은 그날 이후로 트레센도 안 나오다가 오미소카에 트레이너와 온천 여행. 그 다음 날에 바로 교제를 발표하는 일은 이제 뉴스거리에도 나오기 힘든 일이 됐다. 너무 익숙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걸 꿈꾸고 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아버렸다. 평생 도망치며, 심지어 레이스도 폭도주로 이겨 왔던 나였지만, 이 사람을 잡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여기서는 정말 한 발자국도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걸.



"좋지. 어디 알아놓은 데라도 있어?" 



좋아..! 한달 전부터 알아본 곳인 걸. 에피타이저는 옥수수 스프, 코스 시작은 안심 스테이크에 디저트로는 딸기 올린 당근 케이크. 샴페인은 라다치니 하나 시킬꺼고... 역시 그건 디저트 나올 때 주면 될려나? 



"내가 예약해 놓은 곳이 있어. 상금 덕분에 지갑 빵빵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얻어 먹어도 돼."



"부담스럽지는 않겠어? 그렇게 싸 보이지는 않는데."



"트레이너의 정당한 몫을 받는다고 생각해 줘. 실제로도 트레이너도 상금을 나눠 받을 권리가 있잖아? 특히 트레이너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을 받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한끼에 10만엔쯤 되는걸 얻어먹기는 좀..."



"아, 마음에 안 들어 트레이너? 먹는게 별로라면 차 바꿀때도 되지 않았어? 내가 차 한대 줄까? 

아리마 기념 부상으로 받았거든. 신형 세단이라는 모양이야. 차는 잘 모르지만, 트레이너라면 아깝지 않은걸?



"... 그냥 감사히 얻어먹을께."



"그렇게 나와야지 트레이너. 그래야 사는 사람도 좋은 마음으로 사 준다고?"

"아, 그리고 차 이야기는 끝난 거 아니다?

가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줘?"



트레이너도 참. 나한테 조금 더 의존해도 된다니까. 상금만 해도 트레이너 정도는 평생 놀고 먹게 해 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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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식사 중의 분위기도 달아올랐다. 음식은 역시 비싼 값을 한다고 할까. 안심도 엄청 부드러웠고, 스프도 맛있었고 말이야. 급한 마음에 샴페인을 손날로 부숴서 따버린 건 참 꼴사나웠지만 말이야. 

이제 식사도 끝났고, 디저트 나올 시간인가. 

슬슬 주머니에서 꺼내야 할까? 


나름 고민 많이 해서 골랐다고? 결국은 너무 뻔해지긴 했지만 말이야. 역시 트레이너에겐, 굴러다니는 돌을 깎아서 보석으로 만들어 낸 트레이너에겐 다이아몬드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있지. 트레이너, 트레이너는 만약 모르는 누군가가 트레이너에게 흥미가 있다고, 한번 만나 보자고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꺼야?"



"글쎄다. 그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한번 만나 보진 않을까?"



"그... 그래? 그렇다면 트레이너가 잘 아는 사람이, 개인적으로도 제법 친분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흠, 그러면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만나보지 않을까? 나한테 관심 있다는데 싫은 소리 하기도 좀 그렇고 말이야."



내 심장의 박동이 멈추질 않는다. 아리마 기념 골포스트에도 이 정도는 아니였는데, 얼굴도 붉어지는 느낌이 난다.

내 얼굴을 내가 볼 방법은 없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 같다.

샴페인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우마무스메의 강인한 간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이때까지는 정말 태양이 날 감싸는 것만 같았다.



"근데 파머,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건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아직도 눈치 못 챈거야? 나보다 더 바보네, 내 트레이너.

옆에 있던 샴페인 잔을 원샷해버리며 용기를 얻는다. 우마무스메가 술 핑계 대기도 그렇지만 용기를 줘 라다치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면 디저트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께. 만약 트레이너는 트레이너가 잘 아는 사람이, 트레이너를 잘 아는 사람이, 제법 오랫동안 같이 지내기도 했고, 함께 이것저것 해본 사람이, 오늘부터 당장 사귀자고 고백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거 같아?"



"너무 구체적인 질문 아니야? 그런 조건이면 안 받아주는게 이상하지 않을까?"



성공이야. 성공이야.. 성공이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찰나---



"나도 그런 상황에 닥쳐 본 적이 있거든. 그 정도면 역시 거절할 수 없더라고."



.................뭐? 


잠만, 닥쳐 본적 '있다' 고 했잖아. 그러면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는 것 아니야? 트레이너 정도면 물론 나한테 과분한가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아 역시 트레이너면 연예 경험도 제법 있는게 당연한가? 내가 생각 못한 걸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지금 당장은 트레이너가 만나는 사람이 없을 가능성도 있는 거잖아? 트레이너는 내가 첫 담당이기도 하고, 다른 말딸을 맡은 적은 없을 텐데, 트레이너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라면 어중간한 히토미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 않을까? 


순식간에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말딸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닌데도 갑자기 속이 너무 거북해졌다. 들어올때만 해도 무척 마음에 들었던 조명이 기괴하게도 나를 비추는 서치라이트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 그러면 트레이너.... 하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트레이너만 괜찮다면..... 아니아니! 트레이너가 동의해 준다면, 해도 될까?"



결국은 더 고민해봤자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정말로 예전 일 일수도 있는 거잖아? 더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말이야. 해 보자고! 그랑프리 우마무스메 메지로 파머!



"트레이너, 지난 3... 아니아니, 4년간, 정말 별 볼일 없이 잊혀져 가는, 길에 차이는 돌 같았던 나를 믿어 주고, 장애물 레이스까지도 잠깐 방황했던 나를 지탱해 주고, 내 레이스 방식까지 새로 만들어 준 트레이너에게는 정말 고마움 뿐이야. 나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이런 내가 그랑프리를 연속으로 이겨 버리다니.

그래서 말이야, 나 어느샌가 트레이너가 정말 좋아진 것 같아. 

물론 like가 아니라 love야. 

이런 부족한 나라도 괜찮을까? 트레이너, 괜찮다면 혹시 교제하는 사이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자, 여기 그.. 그 커플용으로 맞춘 반지도 있어. 사이즈는 딱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편하면 그때 고치면 되는 거니까!

트레이너. 내 마음을 받아 줘.



"파머"



그래, 그렇게 불러 줘, 우리 정말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이잖아? 헬리오스 말마따나 완전 즛토모잖아?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가는 관계잖아?



".... 메지로 파머"



제발



".... 네 마음은 받아 주기 힘들 것 같아."



...........



"오늘의 디저트 당근 케이크 나왔습니다."



나와 트레이너 둘 다 허겁지겁 케이크를 먹고 도망치듯 일어섰다. 정말 맛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뭣같은 음식이었다.



"네, 도착했습니다 손님."



택시에 타서 기사에게 트레센 학원으로 가 달라고 부탁한 이후로 도착할때까지는 트레이너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결국은 내가 참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트레이너가 고백받았다는 것은 제법 오래 전 이야기는 맞았다.

트레센에 들어오기도 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말마따나 거절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어져 있다고 한다. 결혼까지도 생각한다고. 


나는 출주했다가 강착된 것도 아니다. 아예 중상에 출주할 권리조차 평생 얻어보지도 못한, 미승리 신세를 탈출하지도 못한 삼류 우마무스메였던 것이다. 



".....그 메지로 파머, 근데 늦은 밤에 왜 트레센으로..? 기숙사도 최근에 나오지 않았어?"



침묵은 깨진 건 도착하고 택시 문이 열리고 나서였다.



"아, 걱정하지 마 트레이너. 트레이너 집까지 갈 요금은 기사님께 드리고 갈 테니까."



"나는 트레센에 잠깐 챙길게 있어서 그래. 걱정해주는게 오히려 고마운걸?"



".......그, 그래. 몸 조심해. 파머, 오늘 그..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트레이너도 참,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 트레이너야 말로 몸 조심해서 들어가."



택시 문이 다시 닫히면서,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제 나 혼자 남았구나. 


어느덧 하늘에는 달만 큼직하게 떠 있다.


오늘은 이런 시간이어도 본관 문은 열어 놨구나. 아무래도 올해 레이스가 끝나고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아, 역시 옥상 가는 문은 잠겨 있구나. 그래도 이 정도의 자물쇠라면, 흡..! 


역시 높은 공기가 더 시원하네~! 

좀 더 자유로운 느낌도 들고 말이야. 

그래도 이 높이면 역시 좀 부족할려나? 


후~! 좀 낑낑대면서 기어 올라오긴 했지만, 진짜 높긴 높구나.

여기가 아마 트레센에서 제일 높은 곳일려나? 밑에는 삼여신상인가? 여신님들은 이런 날에도 쉬지 않으시니, 수고가 참 많으시네.


그나저나, 높게 올라오면 좀 무섭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하나도 무섭지가 않네. 


애초에 트레센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면, 슬플 일도 없었을까?

아니면 내가 멍청하게 시간이나 허비하던 둔족이 아니라, 맥퀸이나 테이오처럼 엄청난 재능의 우마무스메였다면 트레이너를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 역시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네. 애초에 의미가 있게 살았어야 미련도 남는 거겠지?


아무런 쓸모도 없이 살다가, 태양을 쫒아서 높게 높게 날다가, 날개가 타 버려서 바다에 쳐박한 거려나. 역시, 난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거야.

헛된 희망을 봤다고 좋아하고, 결국은 찾았다고 폴짝폴짝 뛰다가 뚜껑을 열어 봐서야 텅 빈걸 알았다니 말이야. 


앉아 있다가 기지개를 한번 켜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힘껏 지붕을 박차고 뛰었다. 


이제는 트레센이 거꾸로 보인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만, 의미가 있었던 걸까.





따르르릉!







...어? 


시끄러운 알람시계 소리에 잡다한 생각도 다 날아가 버렸다. 나 분명 어젯 밤에 트레센에서... 


침대 옆에 있는 휴대폰을 켜서 확인해 본다. 잠만, 옛날 폰인데?


7월 2일. 내가 트레센에 입학한 날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력 앱을 몇 번이고 켜 봤지만, 잠시 후에는 이렇게 단정 지을수밖에 없었다.


나 메지로 파머는 트레센 입학 첫날로 돌아온 거라고. 



트레센에 처음 등교하는 대부분의 우마무스메들은 아주 희망찬 등교길을 보내게 된다.

다들 각지에서 달리는 것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상도 여러개 받아가며 트레센에 진학하게 됐거든. 


하지만 그런 감정은 보통 당일날 깨진다. 담당 트레이너를 구하거나, 아니라면 팀이라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발 레이스에서 썩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찬밥 신세로 혼자서만 훈련하다, 미승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 자퇴하는 모양세가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다. 


나도 첫 선발 레이스를 망친 나머지, 악성재고 신세가 됐던 기억이 난다. 라이언이나 맥퀸은 애초에 선발 레이스 정도는 가볍게 이겨버린 것도 있고, 애초에 초특급 유망주 취급이었으니까.

나는 처음부터 메지로에 저런 얘도 있구나 하는 사은품 정도 됐던 거겠지. 


그나저나 왜 내가 바닥에 쳐박힌 시체가 아닌, 다시 트레센 신입생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트레이너와 이어지는 걸 원했던 멍청한 우마무스메는 그때 죽어버렸으니까, 다시 돌아왔다고는 해도 그와 이어지는게 가능은 할까? 그는 운이 없어서 담당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재능은 진짜였으니까 말이다.

날 만나지 못했더라도 트레이너는 아마 좋은 담당을 만났을 것이다. 잔뜩 이기고, 또 그 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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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선발 레이스까지 뛰지 않겠다는 거는 너무 무리수기는 했다. 오히려 그쪽이 더 주목받을 판이다.


주목받는 것은 싫으니까, 예전의 나처럼 하는 거다. 미친듯이 뛰어나가서 미친듯이 거리를 벌려놓고는, 체력이 떨어져서 걸어들어오는 거다. 꼴지는 좀 그렇고, 뒤에서 2등, 3등 정도면 좋을려나. 



"준비, 스타트!"



"앵, 메지로 파머 2코너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스퍼트? 리드를 5마신 정도로 벌린다!



선발 레이스 치고 2000미터 정도면 좀 길기는 하다. 아마 이때부터 스퍼트해서 계속 뛰기만 하다 보면, 최종 직선쯤에야 체력이 바닥나서 후속조가 나를 추월하지 않을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레이스에는 별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힘은 전적으로 트레이너한테 온 것이라고 느껴지거든.



“메지로 파머, 대도주로 리드는 14~15마신 정도! 메지로 파머만이 최종 직선을 향합니다! 후속조들은 따라잡을 수 있을까?! 차가 더 벌어진 것처럼도 보입니다!”



슬슬 내 숨도 가슴까지 차오른다. 이제 슬슬 후속조들은 시동이 걸렸겠지. 조금 있으면 추월당할 것 같다. 



“메지로 파머의 과감한 작전이 성공하는가! 아직도 리드는 15마신 정도! 후속조들이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한계다. 허리가 펴지면서 입으로 숨을 몰아쉬어야 할 단계.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 게 레이스다. 이제 마지막 100미터이니, 뒤의 아이들이 날 재치고 지나가겠지.



“메지로 파머 지금 독주로 골인! 처음에는 하이페이스 대도주 작전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까지도 다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잠만, 아무도 날 추월하지 못한 거야? 내가 이긴 거야?



“마군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질 일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도주한 건가? 올해 메지로는 파머나 라이언 쪽이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타임도 시니어 2000미터와 큰 차이가 없는데? 메지로에서 엄청난 녀석을 또 가져왔나 본데.”



선발 레이스를 지켜보던 트레이너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제는 직감으로 느껴진다. 저번의 첫 선발 레이스 때는 내가 한심하게 달려서 욕하는 줄 알고 잔뜩 주눅들어 있었거든.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정신 말고 몸도 그대로 옮겨 버린 모양이다.



“메지로 파머 양! 혹시 이 종이 한 장만 가져가 줄 수 있을까!”



“메지로 파머! 나는 상금 배분 못 받아도 괜찮거든? 잠만 내 말 좀 들어 볼래?”



이렇게 주목받는 일은 역시 익숙하지 않다.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고 말이다. 



“죄송합니다. 이제 점심시간이라서요. 식사 후에 제안들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충 둘러대고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트랙을 빠져나왔다. 사실 다 거짓말이다. 제안 따위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다 아무짝에 의미도 없다.

혼자 하늘이나 보면서 도시락이나 먹으려고 옥상에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나 여기서 뛰어내렸었지. 



“... 역시 도시락도 별맛이 없구나, 기껏 다시 태어난 건데, 좀 더 못해본 일, 미련이 남은 일을 해야 하는 건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다시 뛰어내리면 원래대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걸까?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의식이 감겨 가는, 아리마를 이긴 그날 자살한 바보 우마무스메 파머로 말이야.”



쨍쨍한 하늘과, 선발 레이스에서 어마어마한 압승을 거뒀음에도 내 안은 허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뭔 레이스에서 어떻게 이기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레이스에 익숙한 몸으로 와서 뭐 한단 말인가. 레이스에서 이루고 싶은 것도 이미 깨져버렸는데. 옛날이야기들을 보면 사람이 미련이나 원한이 남았어야 귀신이나 좀비 비슷한 걸로 살아난다고 하던데, 도대체 난 왜? 난 이제 미련 따윈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 역시 다시 살아난다고 해 봤자 어디에 쓸모가 있겠어. 그냥 다시 죽어버리는 편이 맞아. 혹시나 어떤 분이 나를 살려주시기라도 했던 거라면, 다시 살아보라고 시간도 되돌려 주셨다면, 미안해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려고 했다. 물론 이 높이면 아마 한방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저기 위까지 다시 올라가야겠지.

그렇게 일어서는 순간-



“어? 너는 아까 그 우마무스메 아니야? 엄청 개성 넘치게 달리던데, 그... 그... 이름이 메지로 가문이었던 거 같은데. 영어 철자가, palm.... 아 그래! 메지로 팔머 양이구나!”



그 어이없는 발음에 보통 사람들이면 웃음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소리 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갑자기 옥상 문을 열고 튀어나온 그 사람. 두 눈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도 같은 장소에서 만났었다. 선발 레이스를 망치고, 옥상에서 혼자 낮잠 자고 있었지. 그때도 사실 도망가고 싶었던 거야, 분해서 눈 감아도 잠들리 없는데 말이야. 


트레이너. 트레센에서 처음 나와 대화한 사람. 처음 나와 같이 밥 먹어준 사람. 내 첫 패배에서 날 위로해 준 사람. 나한테 첫 승리를 준 사람. 내 첫 중상 트로피를 안겨준 사람. 별 볼 일 없던 신세인 나한테 g1 트로피를 두 개나 선물해 준 사람. 

트레이너, 내 사랑.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그때서야 다시 알았다. 나는 미련이 남았음을, 그리고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한 심장에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이때까지 도저히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지고도, 몸에 힘이 남아 돌고 있다는 것을. 

메지로 파머는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망상해 보기도 한다. 수업 중에 갑자기 쳐들어온 괴한을 어떻게 제압할까 하는 상상. 여기는 트레센이니 더비에서 멋진 말각으로 압승하는 망상 같은 것들을 많이 할지도 모른다. 


메지로 파머도 뛰어내리기 전에 망상해 봤다.


내가 메이크 데뷔에서도 쩔쩔매는 둔족이 아니라, 맥퀸이나 테이오 같이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트레이너에게 나가는 족족 트로피를 줄 수 있었더라면, 트레이너를 상금 배분만으로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었더라면. 트레이너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적수들을 모두 따돌리고, 대도주로 1착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하는 망상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기회가 파머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팔머가 아니라 파머라고 읽는 거야, 보니까 아직 트레센 초짜인가 봐?”



“어떻게 알았어? 이런 예리함도 강한 우마무스메의 소양인가?”



“당연히 담당도 아직 못 구했지?”



“어, 물론 그렇기는 하다만은...”



“그럼 내가 되어 줄까? 담당.”



“너처럼 엄청난 재능을 가진 녀석이 나한테? 아까 보니까 웬만한 베테랑 트레이너들도 너한테 침 흘리고 있던데, 아직 아무런 경험도 없는 나한테 말이야?”



“이런 거는 첫 궁합이 좋아야 한다잖아. 내 눈에는 엄청 뛰어난 트레이너의 편린이 보이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어?”



“... 정말 장난치는 거 아니지?”



“물론이지, 대신 딱 한가지만 약속하면 돼.”



“뭔데?”



“나 말고 담당 들이지 마. 팀 만들지도 말고. 아, 그냥 쉽게 말해서 나 말고 다른 여자랑 만나지 마."



“야, 내가 뭘 했다고 벌써 팀이나 두 번째 담당 타령이야? 난 아직 아무것도 한 적 없다고. 그리고 나 자신도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늘리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그건 또 뭔 소리야? 난 고백 따윈 받아본 적도 없는 고귀한 남자라고, 그리고 박봉에 허구한 날 야근인 초짜 트레이너를 누가 좋아해주겠어?



듣기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때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구나.



“불만 없지? 좋아, 그러면 계약 성립이네."


....♥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한다. 메지로 파머."



"그러면 잘 부탁해. 트레이너 씨."



....평생, 나만의 트레이너로써 말이지.





원래도 상하편으로 나눠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아까 너무 얘매하게 짜르고 올려서 다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