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벌어져만 간다! 메지로 파머 낙승!"



물론 메이크 데뷰 정도는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트레이너, 내 레이스 어땠던 거 같아?"



"솔직히 생각보다도 훨씬 강한 레이스였어. 너 정도의 재능을 가진 우마무스메가 그전까지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게 믿어지질 않을 정도야."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쁜걸. 그래도 찾아내지 못한 재능, 깎아내지 못한 재능은 결국 없느니만 못한 거잖아? 트레이너는 자신을 좀 더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고 생각해."


역시 트레이너와 함께여야 나도 살 가치가 있는 모양이네, 저런 사소한 칭찬 하나에 왜 이렇게 기쁜지 모르겠어. 이제 그렇다면....



"자자, 오늘은 내가 야키니쿠라도 한번 살게. 트레이너도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같이 첫 승리를 축하해 보자고."



"담당에게 처음부터 얻어먹기는 기분이 영 묘한데, 혹시 다음번 승리 때 사 주는 걸로 미루면 안 될까? 오늘은 내가 사는 걸로 하는 게 어때?

아직은 내가 잘해서 이겼다기보다는, 네 타고난 재능으로 이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스스로 잘했다고 느꼈을 때 한번 얻어먹도록 할께."


너무 겸손하다니까 트레이너. 뭐 그런 점이 좋은 거지만♡ 



"역시 한 번씩 먹는 야키니쿠는 각별하구만."



"그러게, 고기는 실패하는 경우도 잘 없지."



"파머,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까부터 내 얼굴을 계속 쳐다보면서 먹는 거 같은데."



"....♡,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트레이너는 이렇게 생겼구나-하고 한번 살펴보고 싶었어."


이제 이쯤 저지르면 되려나.



"여기 생맥주 한잔이요!"



"파머, 갑자기 마시지도 못하는 술은 왜..."



"트레이너 한잔하라고 말이야. 밥은 못 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음료라도 한잔 사고 싶었거든."



"... 그래, 그렇다면 안 받기도 좀 그렇지. 그 정도는 고맙게 받을게."



"아, 생맥주는 기계에서 셀프로 하면 되는 모양이야. 내가 가져다줄게. 거품 양은 어느 정도로?"



"맥주잔 로고쯤부터 거품으로 채워 줘."



"그럼 오케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겨우 스타트 지점에 설 수라도 있었는데, 방심 없이 초반부터 거리를 확확 벌려 놓는 거야. 


나는 손잡이를 당겨 맥주를 채우기 시작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말이다.


트레이너, 이거 트레이너가 아니었으면 평생 못 끊었을껄.

..... 트레이너 덕분에 끊어서 약이 남아버린 거니까, 조금은 트레이너 책임이지?


나는 하얀 거품을 가득 쌓은 맥주를 트레이너 테이블 위로 올려주면서 말했다. 



"자, 맥주 납시오!"



"너 뜻밖에 쾌활한 면도 있다? 아무튼, 잘 마실게."


당신 덕분이었잖아. 내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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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어어엌.... 파ㅏ머?"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 보다. 고작 맥주 한두 잔에 몸도 가누기 힘들어진다니, 내가 술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컨디션 문제인가?



"트레이너, 그러게 두 번째 잔은 너무 무리했다니까."


두번째 잔에도 탔으면 계획이 꼬였겠는걸. 트레이너가 적당히 정줄 붙잡고 있어서 다행이야.


"파...머ㅓ, 나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ㅏ.. 택시 불러서 돌아갈게."



"이런 상태로 어떻게 혼자 보내, 분명 택시 내리자마자 대자로 엎어져 버릴껄?" 



마음 같아서는 대자로 엎어진 걸 기숙사로 주워라도 가고 싶은걸.



"여기 택시! 자 트레이너, 택시 내리면 내가 집까지는 부축해 줄 테니까, 기사님한테 주소 불러봐."



그러고 보니 트레이너 집을 가본 적이 없었지, 이번이 처음으로 가는 건가?



"파머, 정말 이 정도로 해줄 필요는 없다니까... 알았어. 일단..."



나는 트레이너한테 못 해줄 건 없다니까?



"트레이너, 804호라고?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아, 이제 7층이니까 거의 다 왔어."



트레이너 생각보다 고층에 사네, 짐은 가볍게 챙겨야 오기 편하려나.



"트레이너, 도어락 비밀번호 입력해 줘. 나는 적당히 옆에 쳐다보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안 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말딸이 좋은 시력을 타고난 건 어쩔 수가 없는 거지. 11367... 어, 마지막 숫자 뭐였더라? 아무튼, 어쩌다 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문이 열리고, 트레이너는 현관 문턱을 넘자마자 송장처럼 쓰러졌다. 


파머는 그런 트레이너를 침대에 올려 주고, 얌전히 이불을 덮어 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순간 한 발짝 더 나가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은 충분하겠지. 충분히 즐기기도 했어. 


파머는 트레이너의 집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 도어락을 몇 번 더 눌러보고 나서 말이다.









"코스모스상의 승자는 메지로 파머! 이로써 데뷔 후 무패 2연승입니다!"


....설마 오픈 경기에서도 완승일 줄이야.



"우선 담당의 이른 오픈 진입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도 대도주로 승리하셨는데, 혹시 오늘 레이스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가 있었을까요?"



"아직은 제가 초짜이기도 해서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필연적으로 후반에는 체력이 조금 부족해지는 구도인지라 체력 훈련 위주로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트레이너, 너무 진부한 말만 하는 거 아니야? 기자님, 제가 추가로 말 좀 해도 될까요?"



파머는 승리 인터뷰 구역에 끼어들듯이 올라왔다. 두 명이 있기에는 조금 좁은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그만큼 딱 붙어 있으면 문제없으리라.



"물론 대도주로 이기는 것에 체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실 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죠. 바로 흥분하지 않는 것. 너무 의욕 있게 앞서나가려다 흥분해서 평소보다 체력을 많이 써 버리는 경우가 제법 있잖아요?"



트레이너, 자꾸 몸 빼려고 움찔거리지 좀 마. 딱 붙어 있는 편이 자연스럽잖아?



"그 점을 트레이너 씨는 잘 알고 계셨던 거 같아요. 제가 정신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끔 잘 케어해 주시고, 가끔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을 주셔서 정신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레이스에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레이스는 몸만 써서 하는 게 아니니까요."



"훌륭해요! 훌륭해요!! 두 분 다 아직 경험이 많이 없으실 텐데도 서로 간의 신뢰는 완성되어 있군요! 정신적으로도 충실한 상태였다, 이건 다른 분들도 본받아 마땅하네요!"



기자는 생각보다 훨씬 감명받은 듯 보였다. 여기자인 건 솔직히 좀 거슬리지만, 트레이너와 나에 대해서 뭐라도 써 주면 나쁠 건 없겠지.



"파머, 아까 도와준 건 고맙지만, 너무 딱 붙으려고 했던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몸을 팔로 휘감아 버린 건...."



"너무 비좁아서 어쩔 수 없었잖아? 자자, 오늘은 내가 한 끼 사는 거 맞지?"



그리고 다음 날 신문 1면에는 떡하니 나와 트레이너 사진이 올라왔다. [트레이너와 정신도 인마일체! 2연승 V]  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제목과는 다르게 트레이너의 다리를 휘감고 있는 우마무스메의 꼬리가 주목받은 사진이었다.








코스모스상 이후로 우리는 올해는 쉬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어차피 이 정도면 수득상금 자체도 부족하지 않고, 이 나이대는 몸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난 아닌 듯하지만.

이걸 핑계 삼아 트레이너와의 접점을 더 만들 수도 있으니 오히려 더 다행일까?



"트레이너, 그러고 보니 전골은 좋아해?"



"갑자기 왜?"



"아, 다른 건 아니고 우리 가문에서 선물로 소고기세트가 좀 들어와서 말이야. 근데 다 먹기에는 제법 많아서 적당히 가져와도 뭐라 할 거 같지가 않단 말이야."

"트레이너는 같이 넣어 먹을 채소 정도만 조금 준비해주면 돼, 어때?"



"뭐... 그 정도야 괜찮겠지. 그러면 내일 7시쯤에 우리 집에서... 아 파머, 우리 집 모르나?"



트레이너, 그날 기억이 잘 안 나는구나. 



"가보긴 했지만, 기억은 잘 안 나네. 조금 일찍 트레센 앞에서 모여서 걸어가는 건 어때?"



거짓말해서 미안 트레이너, 사실 너무 잘 알고 있어.

트레이너 집이 데구치 맨션 804호라는 것도, 비밀번호는 113674라는 것도, 거실에 방 하나, 화장실 1개에 욕조가 있는 구조라는 것도 말이야.



"그러면 오케이, 내일 그때 보자고." 



미안 트레이너. 집에서 초인종만 눌러도 되지만, 트레이너와 함께 걸으면서 집에 간다는 사실이 좀 오붓하고 좋잖아? 트레이너의 시간을 내가 더 차지한다는 사실도 좀 기쁘고...♡



"트레이너, 많이 기다렸지!" 



누구를 의식해서 옷을 입어 본 것도 좀 오랜만이네.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 생각하면서도, 화장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 것도 오랫만이고 말이야.


근데, 트레이너 누구랑 대화하는 거처럼 보이는데? 



"야, 너 정말 오랜만이다. 어쩌다 이런 데서 마주치다니 이런 우연도 다 있냐?"



"어떻게는 한번은 만나게 됐을 걸? 사실 나도 이쪽에 취직해서 말이야. 트레이너는 아니지만."



여자?


안면이 있는?


....설마.


"오! 파머 너도 왔구나! 인사해, 이쪽은 내 고향 친구,-----


이름은 잘 들리지가 않는다. 사실 떠올리기도 싫다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저는 트레이너 씨 담당인 메지로 파머라고 합니다."



"트레센에서 일하신다 하니까 다음에 또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희는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혹시 저녁 안 먹었나? 우리 집에서 전골 해먹으려는 참인데 혹시 낄 마음 있으신지?"



"오, 전골 괜찮은데, 근데 내가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셈인데, 괜찮겠어?"



"그러면 술이나 음료수라도 가는 길에 좀 사. 그러고 나서 들어가자고, 그러면 됐지?"



"파머, 어째 손님이 늘어난 모양새인데, 양해를 좀 구해도 되겠어?"



"..........."



"파머?"



"아 미안, 트레이너, 잠시 멍 때리고 있었네."



"괜찮아 난, 트레이너의 오랜 친구라는 모양인데, 내가 괜찮지 않다고 하기에는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실제로도 하나도 괜찮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저년 관자놀이를 편자용 망치로 으깨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특히 여자 히토미미들 귀쪽 부분은 역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저번에도 분명 이랬을까? 내세울 거라곤 옛날에 잠깐 같은데 살았다 정도뿐인 히토미미 년이, 어떻게 서서히 꼬리 치다가 트레이너를 구워삶았던 걸까.



"근데 트레이너, 나랑 약속한 거 까먹은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쟤한테는 관심 없어. 그리고 말했잖아. 박봉에 허구한 날 야근하는 초짜를 누가 좋아해 주느냐니까?"



"알았어. 알았어, 트레이너. 그 약속, 꼭 생각해야 한다? 나도 화나면 무서운 우마무스메라고?"



트레이너는 스스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박봉에 허구한 날 야근하는 초짜를

에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도 있다니까?


....그리고 그런 순진한 초짜를 노리는 파렴치한도 있고 말이야.


트레이너 집에서 전골을 해 먹은 것은 성공적이었다. 메지로 가문에 들어온 고기답게 아주 부드럽고, 특히 마블링이 일품이었다 할까.

다만 나는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덕분에 잘 얻어먹었어, 아 이제 중앙 트레센 트레이너 선생- 이라고 불러야 할까? 메지로 파머 양도 고마워, 그렇게 부드러운 고기는 내 인생에 처음 먹어봤을 거야."



".....아니요, 별거 아닌걸요. 아. 혹시 트레이너 씨와는 언제부터 알고 계셨나요?"



"한 4~5살 때쯤? 몇 년 뒤에는 쟤가 도쿄 쪽으로 이사가 버리면서 자주는 보지 못하게 됐지만, 집안이 서로 친해서 한 번씩은 계속 봤어."



그런가. 같은 스타트 라인에 선건 맞지만, 내가 거하게 출발이 늦은 거구나. 



"메지로에서 조금씩만 나오는 사탕이에요. 가면서 드셔 보시길."



"오, 양철 통이라니 신기한 포장이네. 고마워."



"아차, 그리고 한마디 전해 드릴 게 있네요."



"트레센에서는"



"트레이너한테"



"아는 채"



"하지 마세요."



나는 내 방식대로 전쟁선포를 했다.



"글쎄다. 너무 강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메지로 아가씨."



그 년은 그렇게 말하면서, 804호 문을 열고 나갔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꼈다. 조금이라도 동정할 여지가 있었더라면 내가 좀 유해졌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오히려 이렇게 나와 주니까, 앞으로는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대해 줄 수 있을 거 같다.



"자 트레이너, 이제 뒷정리를 같이 해보자! 설거지는 나한테 맡기라고..!"



"그건 고마운데 파머, 그 사탕 나도 한번 맛보면 안 될까? 맛있어 보이던데."



"아차, 미안해 트레이너. 당연히 트레이너 것도 있지! 자, 맛있으면 얼마든지 더 이야기해. 내가 집에서 더 가져가 줄게."



"고마워 파머. 어 근데 이건 종이 포장이네? 그거랑 다른 거야?"



"....아니, 같은 사탕 맞아. 트레이너한테는 내가 계속 직접 건네주면 되지만, '외부인'에게는 튼튼한 포장이 된 걸 주는게 낫지 않나 싶어서 말이야."



"그렇구만, 주는 걸로 은근히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단 말이지."



"도와줘서 고마워 파머. 조심해서 돌아가."



"알았어, 트레이너도 푹 쉬어."



그렇게 파머는 맨션 804호의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은 도착하기 전인가? 시외에서 출근하는 모양이네."



"....뭐, 아무리 그래도 그년이 집에 돌아가면 정확히 알 수 있겠지."




트레센에 새로 취직한, 오늘 우연히 옛날 고향 친구를 만난 잔디 관리사는 하나 간과하고 있었다. 

....파머가 선전포고가 아니라, 일방적인 전쟁 개시로 말을 걸었다는 사실 말이다.







뭔가 최근에 매운맛 사료를 못 퍼먹었다 보니까 얀데레를 묘사하기가 좀 힘들다.


밀린 사료들 찾아다가 좀 퍼먹어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