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결혼하자!"


한적한 오후, 자그마한 언덕의 나무 아래에서 한 꼬마가 젊은 나이에 무덤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열 살 남짓한 외모에 순수해보이는 눈빛.


그런 아이를 보며, 옆에 앉아있던 여성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너가 어른이 될 때쯤에는 누나는 이미 늙었을텐데?"


"괜찮아! 내가 더 빨리 크면 돼!"


"누나는 돈많은 사람이 좋은데, 괜찮아?"


"응! 내가 커서 돈 많이 벌게!"


천진난만한 아이의 대답에 그녀는 한숨을 쉰 후,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있잖아....












"꿈...인가."


굉장히 오래전,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와의 약속.


이제는 잊을 법도 하건만 기억의 한구석에 남아있던 것일까.


'이 나이에, 주책이지.'


자신은 더이상 그때의 소년이 아니다. 꿈을 쫓을 청년도 아니며, 젊음을 잃고 꿈도 돈도 없이 늙어버린 늙은이일 뿐.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주름진 얼굴과, 검버섯이 핀 피부는 그가 죽음에 가까워진 나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방금 꾼 그 꿈이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한번, 가볼까..."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겨우 문을 열고 나오자 어두운 하늘 가운데 만월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닳을대로 닳아버린 눈이 보여주는 흐릿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갈 길을 비춰주는 이정표를 보며, 느릿하게 다리를 옮긴다.


허억- 허억-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조금만 걷고있자니, 금세 숨이 차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해봤지만, 머리에 떠오른 어린 날의 추억은 그마저 잊고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하아- 하아-"


한 발자국씩, 느리지만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어릴적엔 뛰어올라가던 언덕이 지금은 마치 태산과도 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언덕을 모두 올라왔을때, 그곳에서 자신을 반겨준 것은 썩어버린 나무의 밑둥뿐이었다.


"푸흐흐... 그럼 그렇지."


긴장이 탁 풀리며, 몸에 힘이 빠졌다.


대체 자신은 무엇을 찾아 이곳에 온걸까?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약속? 혹은 무언가 있을거 같다는 정체모를 예감?


무엇이 됐던간에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집밖에 나간지 꽤 된, 환갑이 넘어간 노인이 하기엔 미련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돌아갈 힘도 없어 쓰러지듯 풀밭에 눕자, 이젠 춥다못해 싸늘해진 겨울의 숨결이 다가왔다.


'이거, 위험하군.'


밖에서 가죽 한장 걸치고 자면 얼어죽기 딱 좋은 날씨다.


발끝에 점점 감각이 사라지는게 느껴졌다.


허나 몸의 경고와는 달리 내겐 움직일 기력도, 생각도 없다 


어차피 오늘내일하는 몸.


너무 오래 살아 머리가 돌아버렸다던 증조부처럼 되느니, 이리 정신이 온전할 때 죽는 것도 나름 축복인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을 받으며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죽는다. 


이또한 나름 낭만적인 죽음이 아닌가.


"죽기 딱 좋은 날이군..."


금빛으로 빛나는 보름달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눈을 감자 의식이 흐려지며 잠이 몰려왔다.


쏟아지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으며 몸을 내미는 순간.


"드디어, 찾았다."


'무슨...'


귓가에 들린 누군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으음..."


낯선 천장이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귀족의 그것같은 고급스러운 방이 날 반겼다.


푹신한 침대에,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샹들리에. 거기에 내 집보다 큰 방의 크기까지.


절그럭-


발에 감겨있는 사슬만 아니었다면 방의 분위기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슬의 길이는 방을 나가진 못해도 둘러볼정도는 되었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바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시선이 낮아..?'


명백히 평소보다 낮아진 시선, 주름은 커녕 아이의 그것처럼 부드럽고 작아진 손.


설마하는 마음에 주변에 있던 거울을 보자, 순간 정신이 나갈뻔했다.


"이, 이게 뭔..."


거울 속엔 열 살 남짓의 꼬마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일까? 아니, 실감나는 꿈이라면 몇번 꾼 적 있지만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진 않다.


그렇다면 동화에서나 봤던 마법사란 족속의 장난인건가? 나한테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머릿속에 공허한 질문이 울리고 있을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고 왔다.


"어머, 일어났니?"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검은 머릿칼에 붉은 눈. 하얗다 못해 창백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피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될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그곳에 서있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네. 그동안 못찾아와서 미안해. 해야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 그래도 그때 약속을 잊어 버린건 아니니까 안심해! 이제 할 일도 다 끝났으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것처럼, 말을 마구 쏟아내는 그녀.


허나 시골에 박혀 살았던 내 인생에서, 지금 이 여자는 커녕 비슷한 여자조차 만나본적이 없었다.


"저, 누구..."


그 말을 뱉는 순간 즉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쩌적- 쩌저적-


방의 온도가 피부로 느껴질 만큼 급격하게 낮아지기 시작한다.


몇초도 되지않아 하얀 입김이 보일 정도로 추워졌고, 도망치려해도 몸은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범인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생각마저 얼어붙으려 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보석과도 같았던 색은 사라지고, 마치 심연을 담아놓은 것 같은 어둠이 그녀의 눈에 자리잡고 있었다.


가녀린 손에서 나온거라곤 믿기지 않는 힘이 내 어깨를 부술 듯 붙잡았다.

콰득-


"끄아악!!"


"기억 못하는거니...? 농담이지..? 그때... 약속했는데... 설마 잊어버린거야...? 겨우 몇십년밖에 안지났는데... 왜...? 아니면 벌써 다른 년을..."


아파. 아파. 아파.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그녀는 그제서야 손의 힘을 풀고 이해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하, 그러고보니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지?"


그리고 난, 힘이 풀림과 동시에 주저앉았다.


미친, 완전히 돌아버린 년이다.


즉시 고개를 숙여 어깨를 살피자, 다행히 어깨에는 멍자국 하나 있지 않았다.


'아니, 멍 하나 없다고?'


그저 갑작스러운 고통에 의한 착각에 불과했던 걸까.


허나 그런 의문을 해소할 시간따윈 없었다.


그런건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몸은 어려졌고, 발에는 쇠사슬이 걸려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눈앞의 괴물같은 여자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시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봤을때, 난 내 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짠! 됐다! 이러면 기억나지? 그치?!"


기억나지 않을리가 없다.


꿈에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본, 그 얼굴.


기억나지않을 만큼 희미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실물을 보자 다시 선명히 떠올랐다.


"누나..."


"응! 맞아, 누나야! 기억하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안아 가슴에 묻었다.


그녀의 피부에선 인간의 따뜻한 체온 대신, 얼음장과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하하...하..."


문득 나는 먼 옛날, 마을의 신부님이 하셨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놈들!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뱀파이어가 피빨아간다!


어린아이를 겁주듯 허풍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이야기.


"이제부턴 누나랑 같이 사는거야! 음, 식은 언제올릴까? 준비는 다 됐으니까 내일? 모래? 드레스도 같이 골라보자. 앞으로는 쭉- 함께니까!"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쉼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그 입안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며, 난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밤을 두려워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있잖아...


아아, 끝났다 생각한 나의 인생은 오랜 기다림을 끝내며 더 나아갈 예정인듯 하다.


-60년만, 기다려 줄래?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거야."


그렇게,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나의 두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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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올렸던 거 재업


얘도 좀 오글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