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머리를 한 도도한 인상의 소녀.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방에 들어가 앉았다.

예쁘지만 불편한옷도 벗어던지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소녀.

그녀의 이름은 얀진이, 얀붕이의 친구였다.


"...짜증나."


그러나 그런 그녀의 표정은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어둡기만 했다.

아니, 어두운 걸 넘어 역겨운 것이라도 본 듯한 느낌.

그녀는 괜히 분을 참지 못하고 가방을 걷어찬 뒤,

침대에 앉았다.


"오랜만에 얀붕이랑 단 둘이 데이트라 옷까지 골라입었다고.

그런데 그 잡년은 갑자기 뭐냐고!

아, 짜증나!!"


그렇게 얀붕이의 앞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험한 말을 내뱉는 얀진이.

그녀는 곧 핸드폰을 켜서 마음을 진정시킬 겸 갤러리를 열었다.

그러자 나타난 건 수많은 사진들.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사진들이었다.


"응... 역시 그래도 너밖에 없다니까."


수없이 늘어선 얀붕이의 사진들.

얀진이 자신과 정식으로 찍은 것 말고도,

집에 있는 모습이나 등굣길의 모습.

그런 것들은 모두 얀진이가 재력으로 확보한 것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하나가 큰 돈이 들어간 걸작품.

얀진이는 그런 걸작품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세상에서 자라온 그녀다.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저택' 이라 불릴 정도의 거주지.

넉넉하다못해 풍족한 부모의 사랑과 자본.

그런 것들을 받아온 그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들 때문에 그녀는 어릴 적 부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누구 하나 자신을 평범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받고자하려는 것 일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늘 특별한 취급을 받아야만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얀붕이라는 소년은 보석같은 존재였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주었다.

재벌가의 딸이 아닌, 평범한 동갑내기 친구로 봐주었다.

그런 시선은 얀진이에게는 너무나도 색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보다도.

아니, 그 누구보다도 나을게 없는 사람이었다.

부모도 없는 고아출신에 당연히 재산도 빈털터리.

그녀의 부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하류층에 불과했다.


그런 하찮고도 별 볼일 없는 존재.

그 존재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에게만 의지하게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어릴 때 부터 그 소년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소꿉친구로서 지내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흔적을 수집하고, 추억을 쌓아갔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얀붕이에게 가까워지고,

이제 슬슬 마음을 고백하려던 찰나에 훼방꾼이 나타났다.

어디서 온지도, 누군지도 모를 전학생.

그녀가 얀붕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얀진이로서는 금새 파악할 수 있었다.


'망할 여우년... 감히 누굴넘봐?'


일단은 적당히 친절하게 대응했지만,

얀진이는 집에 가자마자 곧바로 얀순이에 대해 조사를 요청했다.

물론 그녀의 부모는 탐탁치않아 했지만,

결국 사랑하는 딸의 부탁은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게 그녀의 부모였다.

그걸 얀진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울정도로 얀순이의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학교에 연락해 압력을 넣어도 오는 건 단편적인 정보.

sns 계정도 찾아보았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 처럼.

그런 점들은 얀순이를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그 정체도 모르는 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얀진이는 올라온 보고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턱대고 감행하는 압박보다도 사회적인 매장이 효과적이라는 사실.

그건 상류층인 그녀에게는 상식과도 같았다.

혹여나 의심스러운 정보가 나오는 순간,

순식간에 처리해버릴 수 있는 수완.

그건 타고난 능력이었으니까.


그러나 얀진이, 그런 유능한 그녀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상대하고자 하는 존재는 그저 평범한 서민도,

정치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상류층도,

심지어는 인간조차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인형이 자신의 창조주를 해하려는 욕망을 품는 것을

그 인형의 실을 쥔 위대한 존재는 비웃을 뿐이었다.

연극의 주인공은 그 인형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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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자리가 영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머리가 아플 이유가 없었으니까.

열도 나지 않는데 말이다.

며칠째 들려오는 무언가가 속삭이는듯한 소리.

병원에 가보기도 잠에서 깨면 잦아들기에 애매했다.


"끙... 일단 약부터 먹고 생각하자."


그렇게 두통약을 챙겨먹고 핸드폰을 보는데,

뜻밖에도 7시에 얀진이에게서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지금 시간은 9시 반.

2시간 반이나 읽지 않았네, 윽.

일단 빠르게 메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 특별히 뭐 할 일 있어?

없으면 같이 카페라도 갈까 하는데.'


주말이라서 그런가, 일찍부터 메세지를 보낸 얀진이.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는 요청이었다.

일단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고,

나는 옷을 차려입으며 핸드폰을 주시했다.

얀진이는 메세지 확인이 잦은 편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 메세지 하나가 더 올라왔다.


'주말이라고 또 퍼질러서 잔거냐? ㅋㅋ'


'응, 미안. 일단 카페라면 공원쪽이지?'


'ㄴㄴ 오늘은 학교 가는 골목에 있는 곳'


'? 거기 좁잖아'


'근데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오늘은 거기로 가고 싶네.

어차피 돈 내는 건 난데 내맘이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

ㅇㅇ 곧 감.'


의외네, 얀진이가 조용한 곳을 찾는다니.

그 나잇대 여자애들 답게 핫플이라도 찾아다니는게 보통인 얀진이다.

뭐 공부라도 하려고 하는 건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다.


"...오늘따라 묘하네."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바라보는 문 밖의 세상.

출근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하늘은 며칠째 쭈욱 화창하기만 했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신발을 신은채로, 나무와 하늘을 보며 걷는다.

주변에는 이름도 무엇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런 흔한 주말 아침의 모습.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있었다.


어째서일까? 라고 묻는다면 딱히 답할 수는 없지만,

며칠 째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기분이랄까.

물론 세세한 것들은 다르지만 말이다.

화창한 날씨,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지난 1달간 계속 봐왔던 모습이었다.

비도 오지 않고 말이다.


"...기분탓이겠지."


그러나 나는 이윽고 생각을 멈췄다.

이런 음모론 같은 생각이야말로 얀진이의 말 대로 쓰레기와 다를 바 없으니까.

누군가 24시간 날 감시한다거나,

어떤 존재가 날 주시한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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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에 한번씩 돌아오는 기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