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아무리 추위를 안타는 사람이어도 패딩이나 코트를 꺼내 입게 되는 한겨울이다.

다들 추위에 몸서리치며 걸음을 옮기는 거리 위에서 기타를 목에 맨 채 마이크 앞에 서있는 남자.

사람들은 그런 남자를 곁눈질로 보고 지나치고, 잠깐 걸음을 멈춰 감상하고, 열린 기타 케이스에 돈을 넣는다.

"추운데 고생이 많네"

무려 만 원짜리 지폐를 넣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한다. 노래를 이어가야 했기에.

그렇게 약 2시간 뒤, 더 이상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도,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도 뜸해지기 시작하자 남자는 자리를 정리한다.

그리고 옆 벤치에서 자신의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관객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남자가 뱉은 첫 마디는 감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괜찮으세요?"   

남자의 질문에 여자가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든다.

남자는 깜짝 놀라 말문이 막힌다.

"어..음...얼 유 오케이?"

첫 번째는 여자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고,

'2시간 전부터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던 건가?'

두 번째는 언제부터 울고 있던 건지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추위와 울음 탓에 벌겇게 물들었고, 눈 화장은 눈물을 길을 따라 번졌으며, 코와 입 주변은 콧물 범벅이었다.

남자의 말을 듣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남자의 마지막 영어 모의 평가 등급은 5, 방언 섞인 외국인과 프리토크가 가능할 리 만무하다.

남자는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구글 번역을 켜 여자에게 넘긴다.

여자는 훌쩍이며 휴대폰을 받아 조물조물 자판을 만진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여자가 휴대폰을 들어 남자에게 보여준다.

"영국....여행....소매치기....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있던 거구만"

사정은 이러했다. 여자는 영국에서 성인이 되자마자 홀몸으로 한국으로 여행을 왔다. 온 지 하루도 안돼서 여권,돈,휴대폰이 들어있는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아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밤이 되어버렸고, 지칠 대로 지쳐서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서러움에 울고 있던 것이었다.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남자가 구글 번역기에 문장을 입력하고 보여준다.

여자가 고개를 가로지른다. 그리곤 다시 남자의 휴대폰을 가져가 무언가를 입력한 후 보여준다.

"휴대폰이 없어서 길도 못 찾는다. 사람들은 내 말을 무시한다"

번역기의 딱딱함 때문인지 여자의 말투가 다소 건방져 보인다.

그렇게 몇 번의 불편한 대화가 오간 뒤, 남자는 결심한다.

여자의 손에 오늘 하루 동안 번 돈인 3만 3천500원과 지갑에서 꺼낸 5 만원을 쥐어준다. 

여자가 깜짝 놀라서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가 다시 번역기를 통해 말한다.

"이걸로 방 잡아서 하루 쉬고 내일 경찰서 가보세요"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듯 가져가 말한다.

"어차피 나 경찰서 모른다. 가도 나는 가방 못 찾는다. 그러니까"

여자가 다시 

"당신 집에 가고 싶다"

남자의 소매를 잡으며 말한다.

순간 남자의 여러 생각이 남자의 머리를 스친다.

그리고 남자가 내린 결정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안됩니다. 젊은 여성이 아무나 따라가면 위험해요"

그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우습게 여자가 말한다.

"괜찮다. 당신 아무나 아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 당신 착하다"

여전히 남자의 옷 소매를 꼭 붙잡고서.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가지만 여자는 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결국 남자는 여자를 집에 데려가기로 한다.

남자는 근심이 가득하다. 혹여나 성추행이나 강간으로 신고라도 할까, 신종 사기 수법은 아닐까,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아니 눈을 뜨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한숨이 나온다.

그런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해실해실 웃는다. 아까보다 소매를 꽉 쥐고서는.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남자도 헛웃음이 나온다. '딱 하룻밤, 하룻밤이니까..' 라며 남자는 단념한다.

남자의 집에 도착 후 남자는 여자를 욕실로 들여보낸다.

여자는 조금 부끄러운 기색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남자는 씻고 나올 여자를 위해 자신의 옷가지를 몇 개 욕실 앞에 둔다.

남자가 공연에 사용한 기타와 마이크를 정리하고 냉장고를 연다.

맥주를 한 캔 꺼내 들이킨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지금 상황이 안주가 되어 꿀떡꿀떡 넘어간다.

맥주 몇 캔을 테이블에 옮기고 종일 굶었을 여자를 위해 지금도 영업하는 가게를 찾아보던 와중 화장실 문이 열린다.

문 틈 사이로 하얀 수증기와 함께 나온 더 하얀 여자의 팔이 옷가지들을 낚아 챈다.

남자의 입에 침이 마른다. 원샷 때린 맥주 때문인지 이성이 흔들린다.

잠시 드라이기 소리가 난 후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여자는 옷은 입었지만 속옷은 입지 못했기에 벌거벗은 기분이 든다.

남자도 그 사실을 아는지 다른 곳은 보지 못하고 여자의 얼굴을 쳐다 본다.

아까는 상태가 엉망이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기준으로도 객관적인 기준으로도 상당히 미인이다.

남자의 시선과 자신의 상황이 부끄러웠던 여자가 얼굴을 돌린다. 집 안은 따뜻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홍당무 같다.

남자도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애국가를 부른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적막을 깬다.

남자가 튀어 오르듯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고 여자는 분위기를 읽고 벽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방바닥에 핀다.

치킨 두 마리와 피자 한 판이 테이블을 가득 메운다. 종일 굶은 여자는 당장이라도 먹고 싶은 음식을 바라만 본다.

남자가 혹시나 하고 닭 다리를 하나 들고 쥐어주니 그제서야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괜히 기특하다.

'외국인들은 닭 다리 싫어한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남자는 자신의 상식이 뒤집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여자를 바라보다가 맥주를 한 캔 따서 마신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는 30분 만에 치킨 두 마리와 피자 한 판, 맥주 네 캔을 먹어 치운다. 물론 남자의 공은 매우 적다.

괜히 부끄러워진 여자가 다시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남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곤 일어나서 자신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가 공기계를 하나 가져온다.

남자는 번역기를 킨 자신의 휴대폰을 넘긴다. 그리고 자신은 공기계로 대화를 시작한다. 

여전히 불편하긴 하지만 하나로 할 때 보단 편하고, 둘 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간다.

"음악은 언제부터 했나?"

"고등학생 때 음악하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어. 그래서 고딩때 돈 벌어서 모으고, 20살 되자마자 군대 가서 벌어온 돈으로 이것 저것 사서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고 있는거야. 넌 뭐한다고 20살 되자마자 딴 나라도 아니고 한국을 왔냐?"

"나 한국 문화 좋아한다. 음악,영화,드라마 많이 듣고 봤다. 그래서 왔는데 슬프다."

"오 음악 많이 들어봤어? 그럼 내 노래 어땠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잘 기억 안 난다. 나 그때 정신이 없었다. 한번 더 들려줘라"

남자가 기타를 가져와 간단하게 한 소절 불러본다.

여자는 조용히 연주에 집중하고, 연주가 끝나자 아이처럼 웃으며 박수를 친다.

"너 정말 잘한다. 이해는 못하지만 알 수 있다. 나 음악 많이 들어서 안다."

남자는 오랜만에 듣는 남의 칭찬이 좋으면서도 어색하다. 

"나도 불렀으니까 너도 아무거나 불러봐"

"싫다. 부끄럽다."

"그럼 나는 안 부끄러워서 불렀냐!"

남자가 여자를 괜히 부추긴다. 남자의 호응에 못 이겨 여자가 조용히 노래를 부른다.

솔직히 여자는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노래를 하는 게 부끄러워서 꼭 감은 눈이 귀엽다.

술기운인지 유독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사랑스럽다.

빌려 입은 옷이 너무 커서 보이는 쇄골이 예쁘다.

찰랑거리는 금발이, 눈에 살짝 서린 쌍꺼풀이, 작은 체구와 그에 반하는 몸매가, 너무 좋다.

술기운인지 진심인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를 마친 여자가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잘했다는 듯 무심코 여자를 쓰다듬는다.

남자는 순간적인 자신의 행동에 놀란다. 여자가 놀라고 싫어할까 봐 손을 때려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볼을 쓰다듬게 하고 배시시 웃는다.

남자는 이성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있을 여자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 간신히 참아내고 휴대폰을 들어 질문한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못 들었네, 난 김기성이야"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길고 느리게 말한다. 김  기  성

여자가 남자의 말을 몇 번 따라하더니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자신도 이름을 말한다.

"My name is Stephanie, Stephanie green, just call me Stephanie"

남자가 여자의 말을 대충 알아듣고 되뇌인다. 스테파니라고 하는구나.

취기 때문인지 하루 동안 쌓인 피로 때문인지 여자의 눈이 자꾸만 감긴다.

남자는 여자를 일으켜 세워 자신의 침대에 눕힌다.

쓰레기를 대충 정리하고 자신은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눕는다.

하루가 길다. 전부 거짓말 같다. 자고 일어나면 꿈에서 깰 것 같다.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좁은 자취방 안의 고요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여자의 숨소리가 그것을 부정한다.

그제서야 남자는 잠에 들 수 있었다. 평소에 자는 침대보다 불편한 바닥이지만 왠지 남자의 잠은 더 깊어 보였다. 







옛날부터 써보고 싶었는데 불현듯 stan이라는 노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처음 글을 써 보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단편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여러 편으로 나눠야 할 것 같네요.

1~2편은 빌드업이 될 것 같고 아마 3편부터 아마 얀끼가 나올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