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100281833 - 상편


얀붕과 얀진, 두 사람은 동행하기로 했어. 얀붕이가 무릎을 꿇며 간곡히 부탁한 바도 있었고,

얀붕이가 마냥 연기하는 것만 같지는 않았거든. 물론, 100% 그 말을 믿기는 좀 어려웠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 돕는 셈 치겠다는 거였지, 또한 얀진이 본인이 도와주겠다고 뱉은 말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도로 ‘못 도와주겠다!’ 라 무를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

 

 

“일단은, 좀 움직일까요? 계속 여기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저녁놀의 색깔이 더욱 진해졌어. 하늘에는 희미하긴 했어도 달이 서서히 모습을 비춰갔지.

얀붕이는 고개를 끄덕였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되는 거야.

 

 

“자, 잠깐, 이, 이건……, 너무 가깝잖아요?”

 

집으로 오르는 걸음길에 오르고자, 도심 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려던 찰나였어.

갑자기 자신의 측면으로 붙어, 나란히 걸어가려고 하는 얀붕이의 태도에 얀진이는 크게 당황했어.

 

 

“얀진 양, 미안합니다. 그럴 일은 웬만해서는 없겠지만.

혹여나, 얀진 양을 놓쳐버리는 순간 나는 길 잃은 꼬마 꼴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내 나이가 스물 셋입니다. 내가 비록 이곳에서는 외지인이고, 외국인일지언정,

 한 가문의 자제 되는 입장에서, 고작 길을 잃어서 뻘뻘대는 추태를 보일 수는……

 

“알았어요! 이, 이번 만이예요. 얀붕씨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니까!”

 

“고맙습니다, 얀진 양. 처음 보는 사내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시다니.”

 

얀붕이는 옅은 미소를 띄운 채, 앞서 있었던 경우와는 달리 차분하게 감사를 건넸어.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그랬던 걸까, 얀진이는 자신도 그의 인사와 이 상황에 매력을 느꼈지.

 

 

‘잠깐,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자신의 이마와 얼굴을 포함하여 귓가까지 뜨거워진 것을 느끼고는, 아차 싶었던 얀순이.

본인 딴에는 감정을 정리한다는 이유 하에, 속으로 연신 되내이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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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진정하자. 단순히 감사 인사를 받은 것 뿐이잖아?’

 

‘그래, 고마우니까 고맙다고 얘기했겠지.’

 

하지만, 짖굿었던 얀진이의 심장은 전혀 얌전해질 생각이 없었나 봐.

계속해서 애를 쓰는 그녀였지만, 심장은 열정적으로 두들겨지는 북처럼 더욱 두근거렸어.

 

 

‘제발……, 이러다 들리겠어!’

 

사귀는 사이처럼 서로가 나란히 걸어가는 이 상황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

두근대는 소리가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커진 것만 같았어.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겁이 날 정도야.

 

그렇게 10분 남짓 정도 걸었을까,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어.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마도 얀진이에게는 한 시간 같았을지도 몰라.

 

전광판에는 15분 뒤에 버스가 온다고 쓰여있었어. 신호등이나 도로 상황들을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18분에서 20분 정도 안팎은 걸릴테니, 얀진이는 그때까지 심호흡을 하기로 했어.

 

시간으로는 3분, 정거장으로는 2개 남았다고 표시될 때 즈음, 얀진이는 다시 침착해졌어.

요란스럽게 들떠있던 심장은 평소 상태로 돌아왔고, 감정 상태도 다시 차분해졌거든.

 

버스가 도착하고, 푸쉬익 거리는 배기음이 울린 뒤, 출입문(앞문)이 열렸어.

얀진이가 요금 계산을 먼저 버스에 오르고, 그 뒤를 이어 바로 얀붕이가 올랐지.

 

단말기에서 “승차입니다.” 라는 알림음이 울린 뒤, 곧잘 얀진이는 뒷좌석 쪽을 향했어.

아무래도, 2인 이상의 좌석은 주로 버스의 뒤쪽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야.

 

얀진이가 얀붕이를 앞서고 있었으니, 당연히 창문과 가까운 안쪽 자리에 들어가겠지.

원래대로라면 말이야. 그런데, 그녀가 막 착석하려는 찰나에, 얀붕이가 작은 요청을 건넸어.

 

가는 동안 풍경을 좀 더 구경해보고 싶으니, 자신을 창문 쪽에 앉게 해줄 수 있냐는 거야.

그래, 아무래도 신기했겠지. 지금은 2024년이고, 햇수로만 치면 124년을 건너 뛰어 온거니까.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어차피 얀진이 본인에게는 질릴 정도로 보는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고,

맨날 보는 풍경이 하루 안 본다고 마구 뒤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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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여기 앉아요.”

 

“Danke Schon!”

 

얀진이가 자리를 내어주자, 얀붕이는 쏜살같이 창가쪽 자리에 앉아버렸어.

그리고는 곧잘 뚫고 나가버릴 것처럼,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는 바깥을 구경하기 시작했어.

 

그 풍경에 감동이라도 한 걸까, 연신 우와- 하는 소리도 들리기도 했어.

이따금 얀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려가며, 자신이 바라본 것들에 대해 묘사하며 전달하기도 했지.

 

 

“네, 맞아요. 나도 처음 도시로 상경했을 때는 모든 게 신기했어요.”

 

사실 거짓말이야. 얀진이는 처음부터 도시에서 자랐어. 얀진이는 오히려 촌이 더 어색할걸?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들이야. 너무나도 지긋지긋해, 이따금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그런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얀붕이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차 있지 뭐야.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사람을, 한껏 고조된 사람의 기분을 초쳐서야 쓰겠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얀진이도 이 상황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얀붕이가 짓는 미소가 즐거움으로부터 빚어진 미소였으면서도,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묘하게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거든.

 

그런데,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을까?

얀진이는 사람과 이렇게 의사소통을 나눠 본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거든.

 

물론, 생활에서 대화가 아예 없던 건 아니야.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정말로 업무적인 것 외에는 일절 대화가 없다는 거였어.

 

업무 외에 오고 간다고 할 수 있는 대화?

그나마 실력 만큼은 인정해주는 상사 몇명이 ‘점심은 먹고 일 하냐?’ 라고 물어보는 것 정도야.

 

직책이 경리였으니까, 모든 것이 꼼꼼하고 칼 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유도리? 눈 딱 감고 넘어가기? 얀진이 입장에서는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어.

 

실력 있는 요리사가 고기나 횟감을 정확히 썰어내듯, 일 처리도 당연히 그렇게 돼야만 했어.

그게 회사를 위한 일이었고,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본인의 다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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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다들 좋아했지. 아주 똑부러진 경리가 들어왔다고.

저번 경리 담당은 야무지지 못하고, 뚝심도 없었기에 마냥 좋지는 않았다고 말이야.

 

하지만, 너무나도 완고했던 얀진의 업무태도에 이따금 불만을 표하는 사원들이 늘고 말았어.

지금은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 몇몇 상사들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아.

 

 

‘아우, 저 도깨비 같은 여편네.’

‘○○○씨는, 조금 실수는 있었어도 사람 숨 막히게 하는 그런 건 없었는데.’

 

‘실력은 좋은데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

‘△△△△ 대리님, 저도 가끔은 사람 냄새나는 ○○○씨가 그립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점심 시간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사들고 오다가 듣고 말게 된 뒷담들이야.

지금도 얀진이는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 같아, 차라리 그냥 점심 먹고 사무실에 처박혀있을 걸. 하면서

 

이렇게 사람들이 점점 질리고 싫어지고, 그 여파에 삶 자체가 슬슬 따분함과 불쾌감으로

절여져 가고 있을 때, 기가 막히게도 얀붕이가 그녀 앞에 나타나고 만 거야.

 

가족, 친지, 재산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하루 아침에 미래인

이곳으로 떨어져 버리면서, 혈혈단신이 되고 만 얀붕이.

 

그런 얀붕이를 얼떨결에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바람에 자신의 집까지 같이 동행하게 되고 말았지만.


너무나도 다른 미래의 모습에 연신 놀라워하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 모습은

듬직해보이고 차분한 그 인상과는 상당히 반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어.

 

 

‘이 남자, 보면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네. 사람도 좋은 것 같고…….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달려온지 대략 20분 정도 됐을 때, 마침내 두 사람은 목적지에서 내렸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건 20층의 높이는 가뿐히 뛰어넘는 고급 아파트 단지였지.

 

 

“낮에 봤던 마천루들이랑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이곳은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합니까?”

 

“...혹시 사무를 담당하는 곳 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뉴욕 시에 있는

그 어마 무시한 마천루는 회사들이 잔뜩 세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곳도 비슷합니까?”

 

“아니요, 여기 사람들 사는 곳 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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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의 두 눈동자가 굉장히 크게 휘둥그레졌어.

세상에, 저렇게나 높은데 저기 전부 다 사람들이 들어산데. 얼마나 놀라울 일이야 이게.

 

‘새가 활공하는 창공을 탐내어 비행선을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더니, 이제는 아예 하늘과 항상 맞닿아 사는구나.’

 

놀랍도록 경이로운 기술력에 얀붕이는 내심 감탄하기 시작했어.

동시에 지난날 있었던 점심 식사 때, 동인도 식민지령 출신인 네덜란드인 친구가 들려줬던 말이 기억나기도 했지.



‘아시아라는 동네는 도통 구경할 동네가 못 돼.’

‘모든 곳이 낙후되어 있고, 전부 미개 하다고!’

 

‘일본? 그 나라가 요즘 뜨긴 했지. 하지만, 그래서 뭐?’

‘결국 그 녀석들도 전부 우리를 흉내내는 것 뿐이잖아!’


식사 약속으로 만날 때 마다 아시아라는 미지의 동네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던 그녀.

15년의 세월을 그런 낙후된 동네에서 보내게 한,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도 밉다고 했던 그녀.


하지만, 그러한 험담을 나열함에도 불구하고 얀붕이 본인이 언젠가 아시아 지역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런 구려터진 동네는 자신같이 빠삭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새침하게 으름장을 놓기도 했던 그녀.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세상인 이곳을, 그녀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았을지도 모를 텐데.

 

“...판 얀턴(Van Yanton), 당신 같은 여자가 이런 곳을 와봤어야 했는데."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얀진씨. 그냥 친구 한 명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왜 였을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도 당연히 친구가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순간적으로 겉잡을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인 얀진이였어.

 

 

“아, 그-래요?”

 

너무나도 차가워진 그녀의 목소리. 얀붕이는 어딘가 모르게 쎄한 느낌이 들었어.

등골이 저릿하고, 식은땀이 순간적으로 흐를 것만 같았지만, 얀붕이는 최대한 침착했어.

 

 

“아하하……, 그건 그렇고. 얀진 씨께서는 이런 거대한 마천루에서 머물고 계시나 본데,

 124년 후 미래의 이곳에서는 저런 주거지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시대가 발전하고, 귀족의 삶이 평민의 삶보다 아무리 윤택하다고 한들,

귀족 사회는 그들 나름의 피 튀기는 치열함이 있는 법. 얀붕이는 화제를 돌리는 형식으로 처세술을 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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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상징이죠, 능력 있는 사람이나 집안이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성공이다! 아직 까지는 어투가 좀 딱딱하지만, 날이 선 느낌은 확실히 줄었어.

얀붕이는 기세를 몰아서,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게 끔 말을 이어나갔어.

 

 

“그렇다면, 얀진씨께서는 굉장히 능력있는 여인이셨나 봅니다. 멋지군요!

 아니면, 기품있는 집안의 따님이신가 봅니다!”

 

“아, 아, 이제 알겠다. 능력도 좋으신데 집안 마저도 기품 있고 뼈대가 있나 보네!”

 

“그, 그쯤 해요!”

 

 

마침내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녹은 것 같다고 판단한 얀붕이였어.

하지만, 방심할 수 없지. 적당히 선을 넘지 않게 과하지 않게끔, 농담은 계속 이어졌어.

 

그렇게 적당한 티격태격이 오고 가다가, 두 남녀는 본관의 엘리베이터까지 다다랐고,

마침내 30층대 높이에 있는 얀진이의 집까지 도착하기까지 이르렀어.

 

요란하지 않은 차분한 도어락의 알림음이 두 사람의 귓속을 간지럽혔어.

잠금 장치가 열리고, 드디어 문이 열렸어. 이제 정말로 이 여자에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거야.

 

 

“뭐 해요? 안 들어오고.”

 

“얀진 씨.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처음...”

 

‘처음’ 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얀진의 머릿속은 수만가지 계산들로 회로가 돌기 시작했어.

가장 기본적인 생각인,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라는 의문부터 시작해서,

 

‘이 사람이 내게 고백을 하려는 걸까?’, ‘보통은 이러면 고백이던데.’, ‘하지만 오늘 만났잖아.’

‘아무리 지금 내 심정이 외롭고 힘들어도, 처음 만난 남자에게……’ 라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회오리처럼 몰아치기 시작한거야. 그리고는 이어서 ‘아, 어떻게 거절해야 하지?’

‘거절 했을 때 혹여라도 상처라도 받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들도 마구 들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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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어준 당신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아...’

 

“나, 헤르베르트 블룸베르크 폰 얀붕. 결코 당신의 친절과 아량에 반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께 결코 누를 끼치지 않음에 대한 약속과 맹세를, 감사와 함께

 재차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베푼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방법을 최대한 빨리 강구……

 

“네, 잘 알았어요. 늦었으니까 일찍 자요. 나 내일도 출근이니까.”

 

‘어라,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이상하네.’

 

진심을 다해서 감사를 전했는데, 왜 어딘가 실망한 듯한 모양새였을까?

어딘가 차갑게 식어버린 듯한 표정과 허탈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목소리.

 

분명히 잘못 됐음을 느낀 얀붕이.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잘 자라는 안부 인사를 그녀에게 전해서 상황을 일단락 시키고, 그대로 소파로 향한 얀붕이.

 

 

‘뭔가 내가 결례를 저지른 건가? 만약 그렇다면 뭘 어떻게 잘 못한 거지?’

 

‘분위기만 봐서는 당장이라도 도로 그대로 나가버리라고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사과해야 하지? 아니 그것보다, 뭐 때문에 기분이 나빠 졌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

 

‘이게 애초에 현실이 맞긴 할까? 진짜처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인 건 아닐까.’

 

‘재밌는 하루였고,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꿈이었으면 좋겠어.

다음날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원래 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네.’

 

고뇌와 잡생각에 빠져 밤을 꼬박 셀 것만 같았던 기세였지만, 오늘 하루가 고되서 그랬을까?

소파가 전달하는 안락함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들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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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요...”

 

“일어나요, 일어나라고요!”

 

‘어?!’

 

“바빠서 이것저것 신경은 못써줘요. 일단은 식탁 위에 빵이랑 딸기잼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어요.”

 

“아,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르면 저 안에 음식 있으니까, 꺼내 먹고 있어요.”

 

얀진이가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어. 놀랍게도 냉장고가 가정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10년 이후 부터래.

거듭 말하지만, 얀붕이는 1910년대를 아직 마주하지 못한 사람이니, 냉장고는 처음 보겠지?

 

 

“참, 그리고! 내 허락 없이는 내 방에 절대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마요!”

 

이 말을 끝으로 얀진이는 출근을 하러 나가버렸어.

그렇게 얀붕이 혼자 40평대 짜리 아파트, 300○호에 덩그러니 남아버리게 된 거지.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 전부 현실이었구나.’

 

어느덧 잼을 바른 식빵을 우물거리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우유를 삼키는 얀붕이.

자신도 모르게 절로 한숨은 터져 나오고, 이 세상을 어디서부터 적응해야 할지도 갑갑했지.

 

당장 독서를 하고 싶다고 해도 문자와 문법이 다르니 읽을 수도 없고.

어제도 들었듯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무용지물이니 어딜 갈 수도 없고.

 

할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마음 같아서는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영원이라는 게 개념은 있어도 실현되기는 힘들잖아.

 

애당초 막막한 이 상황에 음식이 제대로 넘어갈 리도 없을 테고 말이야.

너무나도 답답한 심정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털어내 보려고, 혼잣말을 내뱉는 얀붕이었어.

 

“하아……, 어머니. 정말로 오늘 따라 무척이나 뵙고 싶네요.”

 

“이 모든 게 정말로 꿈이 아니라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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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함... 그리고 분량 조절 실패로 상-중-하로 나눠야 할 듯.

그런데 하편 에서도 분량 조절 실패하면 그때부턴 그냥 1, 2, 3, 4 같은 숫자로 순서 붙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