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찌르는, 규칙적인 높은 음.

얼굴로 드리워진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니 곧 주위가 더욱 분주해진다.


"...! ...!"


오랫동안 잠들었던 귀는 천천히 간신히 말소리를 인식해간다.


"...분!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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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거 기적이나 다름없는데요.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있으니."


낯선 천장을 계속 바라보면 점점 기억이 돌아온다.

도망치던 나는 부주의하게 도로로 뛰어들었고, 그대로 빠르게 달려오던 대형 트럭에 치였다.

공중에 붕 뜬 나는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땅에 박히며 정신을 잃었고,

어느새 커다란 강 같은 걸 건너고 있었다.


저 멀리선 익숙한 인상의 노인들이 나를 보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난 그 상황이 편안하고 안심됐다.

하지만 곧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왔다.

어디서 본 듯한 팔찌를 찬 그 손은 마치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듯 배를 부수고 나를 움켜쥐었으며,

그렇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안 나오고 밥도 못 먹지만, 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이가 꽤 있어보이는 흰 가운의 의사는 인자해보이는 인상으로 말했다.

뭐... 그건 며칠간 기절한 사이에 꾼 꿈이었을테니,

이렇게 살아난 것에 감사해야겠지.


"그건 그렇고, 우리 얀붕군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봐요?"


나라를 구해? 살아나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런 의문의 답은 간호사의 이어지는 대답으로 풀렸다.


"그러게요. 그런 예쁜 약혼자분이 울고불고 하면서 저희한테 매달리고, 매일 같이 중환자실 밖에서 기도도 하고."


물론 의문의 답이 풀렸다고 해서 언제나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도 그럴 게, 난 아직 미혼이다.

여친도... 잠깐, 여친? 나한테 여친이 있던가...?


"마침 중환자실 면회시간이니, 약혼자분 모셔오세요."

"네, 선생님."


간호사는 곧 그 '약혼자'를 데려왔고,

나는 얼굴을 보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이야, 얀붕군. 그렇게나 약혼자가 반갑습니까? 하하하, 역시 젊은 게 최고에요, 최고."


하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의사는 내 반응을 감동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니요, 아니요. 전부 약혼자분의 지극정성 덕분입니다, 하하핫."


살짝 붉은기가 감도는 눈동자는 젖어 정말로 나를 교통사고당한 약혼자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윤기가 흐르는 저 검은 머리칼은 기쁨의 눈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는다.


어떻게 도와달라고 외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야! 김얀붕!"


곧이어 익숙한 남자 목소리들이 들린다.


"야 ㅋㅋ 그걸 박냐?"

"ㄹㅇ 나 같으면 피했을듯 ㅋㅋ"


내 벗들. 내 악우들.

이 놈들이 이렇게나 반가운 적은 처음이다.


"...! ...!"


나는 어떻게든 사실을 전하려고 그 놈들한테 뭐라고 소리치려 하지만, 만신창이인 내 몸은 목소리를 낼 여력도 없다.

그래도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 정도는 알아들을


"야야, 우리 나가란다."


?


"하긴 이렇게 예쁜 여친이 있는데 우리가 눈에 들어오겠냐?"

"야야, 아내분, 예비 아내분."

"아, 맞네. 죄송합니다, 얀순씨. 우리 중에 결혼하는 애가 얘가 처음이라 익숙하질 않네요, 하핫."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병문안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키야, 부러운 새X, 넌 평생 얀순씨한테 잘 해야해."

"나였으면 사귀자마자 바로 자랑했는데, 배가 불러갖고..."

"아니에요. 우리 그이가 부끄러움이 많잖아요, 호호..."


정 반대의 반응이 나왔다.

어떡하지? 정말 끝인가?


"아, 맞다. 너 깨어났대서 너희 부모님께 연락드렸어. 아버님은 일 때문에 오늘은 못 오시고, 어머님만 오신다네."


그래!

엄마라면 분명 알아줄 거다!

적어도 내가 얘기한 적 없는 약혼자라는 존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아이고, 이놈아. 이런 예쁜 처자랑 사귀고 있으면 얘기를 해야지!"


더한 갈굼이 날아들었다.

저 여자를 보자마자 수상하게 쳐다볼 거란 내 기대와 달리, 엄마는 저 여자를 보자마자,


"어머님!"

"아이고, 우리 새아가."


나보다 그 여자가 더 자식 같다는 투로 꼭 끌어안는다.


"어머님, 어머님..."

"그래, 그래. 새아가. 네가 고생 많았다."


저 여자는 엄마 품에 안겨 흐느끼고, 그런 저 여자를 엄마는 등을 토닥이며 달래준다.

그렇게 저 여자가 울음을 그치고 나자 이번에는 나한테 향한 것이다.

물론 갈굼이.


"하여간, 약혼을 할 거면 니 아빠나 나한테 얘기는 해야지, 어? 물론 이런 참한 아가씨랑 약혼했다니 불만은 없다만, 그래도 내가 니 교통사고 당한 상황에서야 그걸 들어야겠냐?"

"아니에요, 어머님. 그 이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긴 뭘! 이런 착하고 예쁜 새아가 마음고생을 시켰으니 더 혼이 나야지!"


처음 마주쳤을 때야 내 약혼자라는 주장에 당황했지만,

며칠 동안 중환자실 밖에서 목이 갈라질 때까지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 모두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거기에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엄마는 물론,


"네 아빠도 너희만 좋다면 바로 결혼해도 된다고 하셨다. 물론 상견례는 제대로 치뤄야겠지만, 기절한 새아가 데리러 온 예비사돈댁 분들 만나뵙고 좀 얘기하더니 괜찮은 분들 같다구나."

"감사해요, 어머님. 부족한 저희 집안을 그렇게 좋게 봐주시다니..."

"그런 말 말거라, 새아가. 이렇게 칠칠치 못한 놈을 당신들 사윗감으로 얘기해주신 것만으로도 오히려 우리가 감사해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서로 또 껴안는다.

누가 보면 친오빠 보러 온 모녀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 서로 껴안고 있는 그 둘을 보고 있을 때,

그 여자가 엄마 품에 안겨 나를 슬쩍 본다.

그 붉은 빛이 감도는 눈으로 웃는다.


많이 익숙한,

그 강에서 나를 건져낸 큰 손이 찼던

팔찌를 반짝이며.




얀붕이가 죽으면 아직 살아있는 얀순이가 머리끄댕이를 잡아서라도 살려낸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