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건너편에서 수줍게 인사하는 소녀가 보였다.



나는 이 풍경이 썩 괜찮았다. 새들은 지저귀고, 어여쁜 동양인 소녀의 모습은 꽤 평화로웠다.



특히 그녀의 흰 피부에 비추는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늘 이 시간대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밖에 나와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저 애는 학교도 안 다니나?"



마중 나온 아내가 무심하게 물었다.



"어디 아파 보이지는 않는데.. 뭐 아무튼 가볼게."



아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서둘러 긴 가로등에 표지판 하나 달린 정류장으로 향했다.



"참,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연락해. 알았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치는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미소 지었다.



"..."



소녀는 아직도 나를 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출근길을 평소 같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계속 하늘을 쳐다보며 불안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라가 핵 공격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있는 위협이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에 뜬 눈으로 회사에서 시간을 태우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집으로 향했다.



"..."



길가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바닥에 앉아 꽃을 팔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노인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꽃이 예쁘네요. 이름이 뭐죠?"



"..."



노인은 조용히 나를 올려다 보았다. 주름진 얼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자네 앞에 놓인 꽃을 묻는 거라면 그건 '꽈리'라네."



"처음 듣는 꽃이네요."



나는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들며 물었다.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꽃 자체로도 아름답지."



".. 조그맣네요."



노인은 얇은 손목을 움직여 꽃을 바구니에 알맞게 꽂았다.



".. 그래서 꽃말이 뭐죠?"



".. 그건-"



갑자기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아.. 안돼.."



나는 꽃을 던져두고 사람들이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내는 안에 없었다. 소리 지르며 아내를 불러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저씨..!"



옆집 소녀였다.



그녀는 내게 달려와 내 손목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달렸다.



"자, 잠시만..! 혹시 내 아내는 보지 못했어?"



".. 시간이 없어요..! 아까 대피소로 이동하는 걸 봤으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넌 왜 대피소로 가지 않-"



그녀의 집에 들어선 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겉모습과 달리 매우 좁은 내부와, 지하실로 향하는 큰 계단이 위화감을 조성했다.



"방공호..?"



소녀는 말 없이 지하실로 나를 데려갔다. 벙쪄있는 나를 뒤로 하고 가는 팔로 방공호의 문을 능숙하게 닫았다.



".. 저희 아버지 취미였거든요."



앞장서는 그녀를 말없이 뒷따라갔다.



5분 동안 걸으면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엄청나게 넓은 내부와 자동 재배 시스템, 인조 잔디가 깔린 공간과 햄버거를 만들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최소 30년은 여기서 지내야 해요."



".. 뭐?"



"..."



"그건 말도 안돼. 며칠만 있어도 위협적인 방사능은 전부.."



"아뇨, 아버지에게 들은-"



"아니야..!! 아니라고..!"



"..."



"난 여기서 나가야 해."



"문을 여는 순간 방사능 공기가 아저씨를 찢어버릴 거예요."



"..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핵이 떨어졌다면, 큰 진동이나 소음이 있었어야 해."



"벽면 두께만 50cm가 넘어요. 진동 제어 장치도 있어서 공중에서 터졌다면 진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죠."



"네가 어떻게 말하던 나는 나가겠어. 아내를 밖에 두고 여기서 30년을 보내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아."



.. 철컥.



".. 뭐 하는 거야?"



그녀가 내게 총을 들이밀었다.



"죽을 거면 아저씨 혼자 죽어요. 저는 살아남을 테니까."



"너.."



"그 문을 열면, 아저씨만 죽는 게 아니에요."



"..."



"심란한 마음 이해해요. 저도 가족을 잃어봤으니까요."



"..."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대로 나는 차츰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해졌다.



"그러니까 아저씨, 제발 저를 위해서 살아주세요.."



".. 젠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나서야, 그녀가 총을 집어넣었다.



".. 미안해요.."



".. 미안할 필요 없어. 오히려 네가 없었으면 죽었을 지도 모르지."



"..."



"그녀가 나를 기억해줄까?"



".. 그럼요."



나와 소녀는 30분 가량을 복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많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일어나셨어요?"



1년 동안 그녀가 아침마다 잠든 나를 깨우는 말이었다.



".. 그래."



"아침은 어떤 걸로 드실래요?"



"오늘은 됐어.. 고마워."



"..."



복도로 나와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도 책만 읽으시려고요?"



"이게 시간이 제일 빨리 가거든."



"그 소설, 자주 보시네요. 아직 책도 많이 남았는데."



"취향에 맞아서.



.. 젠장. 결말이 어떻게 됐을 지 아직도 궁금해 죽겠어."



"아직 나오지도 않았을 걸요. 여기에 들어오기 1달 전에 최신 편을 가져온 거라."



"..."



"그럼.. 소설을 써보는 건 어때요?"



".. 글 쓰는 건 해본 적 없는데."



"쓰는 것도 읽는 것 만큼이나 재밌어요. 여기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적어보는 것도 좋겠네요."



"..."



그녀의 말대로, 나는 이후 도서관에 틀어박혀 글만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가다 보니 점차 아내에 대한 기억은 추억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4년이 더 지났다.



담배는 3년 차에 완전히 사라졌고, 종이는 이제 1/2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아까 깼어."



".. 오늘은 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러게. 5년 동안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건 처음이야. 저녁을 걸러서 그런가?"



"건강에 안 좋다니깐요.. 운동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죠?"



"이제부터 해야지."



돌아서는 그녀의 몸을 무심코 관찰했다.



키도 꽤 크고, 골반도 예전보다 커져 있었다. 그리고 가슴도..



"네가 지금 몇 살이라고 했지?"



".. 20살이요. 성인 기념으로 파티까지 했는데 잊으시다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너와 처음 저기에서 말싸움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 나가겠다고 고집 부리시던 그 때 말이죠?"



"네가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지."



그녀는 말하면서 조금씩 다가왔다. 어느새 침대에 올라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아니야. 그때 흥분하기도 했고.."



"..."



눈이 마주치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얼굴은 자석처럼 천천히 가까워졌다.



서로의 입술이 포개지고, 긴 시간 동안 입을 맞췄다.



서로의 체액이 완전히 섞여 떼어지는 순간에는 침이 다리를 만들어 서로의 입술을 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불을 끄고, 옷을 하나 둘 벗어던졌다.



"여기에 콘돔은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녀도 그런 나를 받아드렸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여보, 일어나셨어요?"



".. 어."



"애들은 아직 공부하고 있어요. 오늘도 책방에 가실 거죠?"



"응. 아침은 이따가 먹을게."



이제 도서관에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전 아내와도 가지지 못했던 아이도 두 명이나 가졌다.



종이가 부족해지자 머릿속으로만 구상하는 법도 배웠다.



이젠 쓰는 일보다, 읽는 일이 더 많아졌다.



".. 이건.."



1년 차까지 재밌게 읽었던 완결을 보지 못한 소설이었다.



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추억을 회상하던 중,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들에게는, 이 소설의 완결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 뒤로 10년 동안이나, 나는 병에 걸려 제대로 생활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런 나를 꾸준히 간호해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이들도 성인이 됐고, 나갈 시간도 5년이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책장으로 걸어갔다.



나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



[ 마지막 화 ]



눈을 의심했다. 꿈에 그리던 소설의 마지막 화가 눈 앞에 놓여 있었다.



".. 이건.."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설의 뒤쪽을 돌려보았다.



책을 던져버릴 수 밖에 없었다.



출판 날짜에 20년 전 날짜가 쓰여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