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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5749692


왕사묘망 往事渺茫

옛일은 멀고도 흐릿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





...큰일이다.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간병받은 것까지는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후의 기억이 확실치 않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참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일어났다는 의식 자체는 있었지만, 윤곽이 확실하지 않고 소리조차도 물속에서 듣는 것 같은 모종의 몽롱한 상태였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멍한 상태라는 생각은 존재했지만, 어느 순간 급속히 사고가 투명해지면서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더욱 알 수 없게 됐다.

그리고 현재는 침실 의자에 걸터앉은 상태로, 조금 전부터 나는 지독한 위통과 두통 이 둘과의 싸움을 강요당하고 있는 상태다.


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루돌프, 테이오, 아그네스 타키온 3명

자신의 방 침대에서 각자의 방향성으로 *용자단려한 세 명의 우마무스메가 잠자고 있는 상황에, 아무 생각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容姿端麗 용자단려: 얼굴 모습과 몸매가 가지런하여 아름다움. 흔히 여성을 가리키는 말)

뭐랄까, 친정에서 키우던 햄스터가 모여서 잠을 자는 듯한 모습에 저절로 눈꼬리가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게 정말 평온한 잠자는 얼굴이었다면, 필시 미소가 지어졌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정말 「평온한 잠자는 얼굴이었다면」이다.


현실은 어떤가.


세 명 모두,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당한 듯한 괴로운 얼굴로 기절해 있는 것이다.


루돌프는 거품을 물고 있고, 테이오는 얼굴이 파랗게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아그네스 타키온에 이르러서는 가끔씩 경련하고 있는 상황.

사회적 죽음을 면했다는 의미에서는 세 사람의 의복이 흐트러지지 않은 게 구원이겠지만,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야기됐는지를 알아야 안심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이전에 두통 또는 위통으로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단말기로 교내 인트라넷에 뭔가 정보가 있지 않나 확인했는데, 지금 침대 위에서 괴로운 듯이 꿈틀거리는 테이오와 벽 사이에서 서서히 짓눌리고 있는 아그네스 타키온이 주모자가 되어, 자백제 같은 수상쩍은 약을 들고나와 소란을 일으켰다는 정보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쪽에서 봤다, 이쪽에서 봤다... 마치 지명수배범 취급이다.

첨부된 「도주하는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는 이미지를 확인해보니, 과연.

화면으로 보는 한이지만, 저건 위험하기로 정평이 난 아그네스라도 해가 없는 쪽의 아그네스다.

일부러 가발을 쓰고 변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물이 여기 쓰러져 있고 비교해 보면 꼬리 색깔이 약간 다르다.

아마도 헤어 매니큐어 같은 종류로 털색을 속이려고 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소동의 주모자와 진압 세력의 필두인 루돌프가 이렇게 사이좋게 침대에서 잠든 상황으로 잘 이어지지는 않는다.

진압하려고 다툰 끝에 맞닥뜨렸을 가능성은 있다.

어쨌든 상대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 보통내기가 아닌 상대는 테이오와 벽 사이에 껴서 조금 찌부러졌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다툰 것 치고는 정말 몸이 깨끗하다고나 할까, 특별히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역시 옷을 벗길 수는 없으니 옷 위로 확인한 결과지만, 별다른 외상은 없는 것 같아 안심이다. 


테이오는 왠지 조금 그을려있지만, 테이오의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담당 우마무스메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훈련과는 관계가 없는 곳에서 제대로 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훈련에서는 체육복이건 수영복이건 아무렇지도 않게 관찰하고 있지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면 교복 차림으로는 애초에 트레이닝 같은 걸 하지 않기에 뭔가 묘한 심경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찌 된 일이지, 하고 팔짱을 껴봐도 좋은 방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침착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선가?

이쪽을 묘하게 가까운 거리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내게서 약간의 냉정함을 빼앗으러 와 있기 때문이다.


시선의 주인은 맨해튼 카페.

의식이 명료해졌다고 생각하니 바로 근처에 있었고, 지근거리에서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다.

맹금류 같은 눈동자로 지근거리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나는 왜 포식당하는 작은 동물의 기분을 맛보고 있는 걸까.


게다가 맨해튼 카페가 뭔가 잡고 있길래 쳐다보니 그건 끈이었고, 그 끈 끝에는 조금 그림이 이상한 우마무스메가 훌쩍훌쩍 울상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메이쇼 도토라 했던가


접점은 거의 없지만…이래저래 대단한 몸을 하고 있다.

물론 트레이너의 시선으로서


평소에 볼 때는 대부분 등을 구부리고 작아져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똑바로 서면 루돌프와 비슷한 키.

중등부치고는 상당히 신체 성장이 빠른지 몸매도 탄탄하다.

성격 탓인지 좀처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던 것 같긴 한데...


나도 모르게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탓일까.


「저기...저기이......」


당황해 시선을 방황하던 메이쇼 도토의 눈이 빙빙 돌고 있다.

얼굴도 점점 붉어지고 있고 시선에서 숨으려고 꾸물꾸물 움직이는 모습은 그...뭐냐, 엄청난 방법으로 묶여있는 탓도 있어 굉장히 선정적이긴 하지만,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


아니 정말로... 아니, 왜 메이쇼 도토는 묶여 있는 걸까.

그럼 묶은 건 끈을 잡은 채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는 맨해튼 카페인 건가.


맨해튼 카페는 말없이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고, 유일하게 말이 통할 것 같은 메이쇼 도토는 아까부터 얼굴을 붉힌 채로 눈을 돌리면서 저기저기, 하며 허둥지둥하고 있을 뿐이다.


힐끗하고 맨해튼 카페를 보니, 왠지 아까 봤을 떄보다 귀가 뒤로 넘어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최악의 부류라는 것 외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태다.


어디가 최악이냐.

우선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도망가야 하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루돌프가 잠들어 있다는 게 뼈아프다.

루돌프라는 일종의 절대자가 자고 있거나 모종의 이유로 의식을 잃고 있는 셈인데, 매우 불안하다.


그러나 더 절실한 이유가 존재한다.






루돌프는  아침에  약하다.






자고 일어나는 게 힘들다거나 그런 얘기는 아니다.

다만 취침 시에는 역시 황제의 가면을 벗고 잠이 들 것이다.


자고 일어나 멍한 동안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와 비슷한 언동을 하기 십상이다.

가끔 마루젠스키의 놀림을 받고 얼굴이 붉어지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녀가 밖에서 쓰고 있는 것은 황제로서, 훌륭한 학생회장으로서 위엄 있는 것.

되도록이면 내 문제로 루돌프가 쌓아온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자고 일어난 루돌프는 때때로 신체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고 얽혀 올 수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무력하고 약한 생물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맹수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로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언짢아지고 있는 맨해튼 카페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지근거리에서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고, 묶여 있는 메이쇼 도토의 밧줄도 어떻게든 해야 한다.

현재 이 방의 상황은 제대로 된 사고를 빼앗아가기는커녕 여러 의미에서 생명의 위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럼,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흔들흔들.


좋아, 안 일어나네.

이건 다소의 일로 일어나지 않는지의 확인이다. 응.

거품을 물고 있지만, 잘 자고 있으므로 괜찮아.


그러고 보니 테이오의 사생활까지는 잘 모르지만 해피 미크 사건 때도 내 앞에서 지켜줬고, 어쩌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볍게 흔들어 본다.


이쪽은 어째선지 펄쩍 튀어 올랐다.

틀린 것 같았다.


테이오가 튀어 오르면서 벽과 사이에 끼어 있던 아그네스 타키온이 더욱 짓눌려 가고 있으니, 테이오를 흔드는 건 그만두자.


포기하고 돌아보니 역시랄까, 마치 배후령인가 뭔가처럼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

시선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 게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


「...맨해튼 카페, 뭐 좀 물어도 될까」


「네」


말을 걸자 맹금류 같은 눈동자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시선의 압력이 강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돼서 이렇게 된 거야?」


가리키며, 시선의 압력에서 벗어나도록

슬쩍 등 뒤에서 자고 있는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린다.


「글쎼요...... 갑자기 쓰러졌고......」


그러고는 올빼미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무심코 영향을 받아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