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노 다이아몬드 - 재벌 사토노 가문의 딸. 재력으로는 말딸 세계관 최강급






“여긴 어디지?”

그는 눈을 멀뚱히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새하얀 인테리어와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소리가 그를 맞아주었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친근하게 구는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나셨군요. 몸은 어떠십니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의사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있는 곳이 병실이며 병원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자각했다.

“3일 내내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상태는 어떠신가요?”
의사는 그 같은 환자를 자주 보았는지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그도 무언가 대답하려 하였으나 걸리는 점이 두 가지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우선 하나.

오른쪽 발목, 정확히는 그 아래 발뒤꿈치. 정확히는 그 안쪽.
이질감이 들었다.

무언가가 끼어든 이질감이 아니라 없는 이질감.
왼쪽 발뒤꿈치에는 있는 것이 오른쪽에 없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치웠다. 환자복 사이로 붕대나 깁스 따위가 드러났다. 그것은 오른쪽 발뒤꿈치에도 여지없이 자리했다.

“저.... 제 오른쪽 발목 아래의 감각이 이상한데요.”
그는 조금 떨리는 음색으로 고했다. 그가 침을 삼키기까지 기다린 의사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환자분의 오른쪽 아킬레스건은 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그 말에 그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리를 더듬었다. 손끝에 깁스의 단단함만 느껴져서 절망감만 더해졌다.

재활은 가능할까? 앞으로도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차에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걸린 두 가지 중 나머지 하나였다.

“저기.... 기억이 하나도 안 납니다. 여기는 어디에 있는 병원이죠?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리고... 저는 누구죠?”

멀쩡한 다리로 돌아다닌 시절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신분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이, 뇌가 오히려 새로운 지식을 입력하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전원이 꺼진 TV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얼굴에 잔상처가 많은 청년 남성이 허망한 눈으로 그를 응시한다.

눈빛으로 그를 향해 누구냐고 묻는 것만 같았지만, 그는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이름은 안다. 나이도 안다. 어디 사는지도 안다. 하지만 그건 지식으로 얻은 것이지,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낸 게 아니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다리가 박살 났고 기억도 없다. 기억이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다리 상태가 심각했다. 그의 다리는 현대 의학기술로도 완치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그가 슬픔에 잠기려던 차에, 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막 뛰어왔다는 듯이 숨을 헐떡이는 여성이 그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쳤다.

“트레이너 씨!”

인식한 순간에는 이미 품에 뛰어들었다.

그의 턱에 간질간질한 말의 귀가 닿았다. 여성은 우마무스메였다. 그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흐느꼈다. 그는 무어라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로선 누군지 모르는 여성이 다짜고짜 안긴 상황이다. 전혀 면식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풀어내는 감정에 공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로 가슴이 축축해지고 뜨거워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기억 상실이라고...”
“미안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도...”
“윽....!”
그녀는 괴로운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뜨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를 떠올려주실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요.”
눈가는 붉었지만, 의젓하고 씩씩해 보였다.

“그때까지 저를, 다이아를 의지해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기억을 잃었지만, 상식까지는 잃지 않았다. 기억 상실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는 상식 부분을 제외한 추억이나 인생 전반적인 경험이 증발했다.

기억이 돌아올 수 있는지 의사에게 물어봐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간 경과를 봐야 알겠죠.”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의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가까이하면 증상이 호전될 수도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는가 싶었지만, 여기서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추억을 공유하는 이라 하면 보통 가족을 뜻하겠지만, 그의 경우에는 천애 고아여서 그를 돌봐줄 가족이 없었다. 오로지 홀로 세상에 던져져 악착같이 살아온 부류였다.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는가. 그와 추억을 공유하는 이가 있긴 있었다.

사토노 다이아몬드. 그의 품 안에서 펑펑 울었던 우마무스메.

그녀가 말하길 그는 트레센 학원에서 활동했던 우마무스메 트레이너고, 그녀는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였다고 한다.

우마무스메와 레이스에 관한 상식은 그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트레이너가 무엇인지도.

척 봐도 좋은 집안에서 자란 영애의 담당 트레이너라는 게 믿기질 않았지만, 그녀의 친근한 태도 탓에 순식간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아는 하루가 멀다고 병실을 찾았다.

“학원에는 안 가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저 이제 곧 졸업이니까요. 트레이너 씨와 함께 한지도 오래됐어요.”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지금보다 신체가 조금 작은 그녀. 그리고 그 옆에 팔짱을 낀 채로 떨떠름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있었다.

다이아가 말하길 중등부에 재학하던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이라고 한다.
지금은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상당한 기간 알고 지낸 셈이다.

“스포츠 업계는 보통 그런 셈인가?”
“우마무스메와 담당 트레이너는 일심동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구나.”

그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이아가 컵에 멜론 소다를 따르곤 그에게 내밀었다. 빨대가 꽂혀있었으므로 입만 내밀면 마실 수 있다.

“고마워. 그래도 괜찮아. 내가 마실게. 손가락은 멀쩡하니까 직접 마실 수 있어.”
“아뇨, 환자시잖아요. 회복에 전념하셔야죠.”

거절해도 계속 들고 있을 것 같아서 빨대에 입을 댔다.

“후후, 멜론소다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응?”
“옛날에 제가 카페테리아에서 멜론 소다를 처음 봤을 때 찻잔으로 마실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트레이너 씨께서 말려주셨어요. 멜론 소다는 글라스 잔에 마시는 거라고. 그랬더니 제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어디에 따라 마시든 괜찮다?”
“후후, 아버지의 크리스털 글라스 잔을 빌려 오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트레이너 씨께서...”

다이아는 조금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에도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이리라. 그는 다이아가 말하는 과거 이야기를 경청했다.

공감은 하지 못했다.

다이아와 교류하는 사이에 자연스레 안 사실들이 있다. 다이아가 진짜로 좋은 집안... 그것도 사토노 그룹의 영애라는 것. 상당히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성격이라는 것.

그녀의 과거 일화는 상당히 엉뚱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이런 당찬 아가씨와 용케도 아는 사이가 됐다 싶었던 차에 다이아가 말했다.

“제 트레이너 씨는 누가 뭐라 해도 트레이너 씨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에요. 단 한 경기만으로 저를 간파한 당신이기에 저는 당신이라는 트레이너를 선택했어요.”

그녀의 눈은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다이아의 눈에 있는 것은 생기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이아와 함께 한 시간도 수일에서 수주가 흘렀다. 그동안 변한 것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라 하면 그의 침대를 꼽아야 한다.

침대엔 다이아를 본뜬 인형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다이아가 사토노 그룹의 인형 뽑기 기계에서 직접 뽑아온 것들이다.

다이아가 병문안을 오면서 하나씩 가져오던 게 지금은 침대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물론 가끔만 가져오는 거였고 누울 자리 정도는 확보할 수 있어서 불편하진 않았다.

밤에 잘 때 껴안으면 푹신푹신해서 기분 좋기도 하고.

왜 다이아 것만 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기억을 되살리기 쉬우라고 그런 것일 테니까.

그는 인형을 쓰다듬다가 오늘 일과를 위해 재활실로 향했다.

“트레이너 씨! 이제 조금 남았어요!”

다이아가 있는 워킹라인을 더듬으며 힘겹게 나아갔다. 턱에는 땀이 맺혔고 목발을 지탱하는 팔은 조금 피로했다.

땅을 짚는 축이 세 개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기능을 기대하기 힘들고 나머지 하나는 오로지 지지대로만 써야 하니 다른 하나가 고생하는 셈이다.

그 하나도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영 신통치가 않다.

말이 재활 훈련이지 목발 사용법 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훈련을 할 때마다 차라리 발을 완전히 자르고 의족으로 대처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그래 봐야 재활 훈련을 해야 하는 점은 변함없겠지만.

그가 라인 끝에 다다르자 다이아가 수건을 그의 목에 걸어주고는 조심스레 휠체어에 앉혔다.

“매번 미안한데... 이런 것까지 도와주지 않아도 돼.”
“아뇨, 제 담당이시니까요. 오히려 관계가 역전되어서 신선한걸요?”
“하하,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아? 우마무스메는 빠르니까 말이야. 이렇게 느릿느릿 걸어가는 걸 보면 질릴 텐데?”

그러자 다이아는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저었다.

“우리는 진흙투성이가 되어가면서 트레이닝 했어요. 그런 노력이 쌓였기에 저는 사토노가의 비원을 달성했어요. G1... 그건 당신이 있었기에 도달할 수 있던 꿈이에요. 당신과 함께였기에 우리는 URA, 트윙클 스타 클라이맥스에 아오하루 배까지... 수많은 곳에서 승리했던 거예요.”

다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당찬 손길에서 그녀의 의지가 엿보였다.

“저는 앞으로도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역경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다이아가 싱긋 웃었다. 인자한 웃음에는 행복마저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나를 위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너한테는 너의 미래가 있을 거야. 조금은 찾아오는 빈도를 줄여도...”
“트레이너 씨. 저는 당신의 미래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저의 미래를 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다이아를 의지해주세요.”

다이아의 태도는 완강했다.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보였다.

“뭣하면 제가 휠체어를 계속 끌어 드려도 되는걸요?”
“아니, 그건 아니지...”
“사양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진짜 잘 끌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적어도 자기 혼자서 걸어 다닐 수는 있어야지. 마음만 받을게.”

그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닫았다.
다이아는 조금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반론하지 않았다.

“음, 마침 좋을 때네. 나 잠깐 근처 한 바퀴만 돌고 올게. 머리를 식히고 싶거든.”
“그럼 제가...”
“잠깐 혼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는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다이아를 혼자 두는 것에 죄책감은 있다. 지금도 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가시에 가슴을 찔리는 것 같다.

다이아는 정말 좋은 아이다. 저런 아이와 알고 지냈던 게 행운으로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에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옆에 있으면 어리광을 부릴 것 같다.

기억도 없고 가족도 없는 사람. 오갈 데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이. 지금은 마음이 버티고 있지만, 무너지면 분명 그녀에게 기대고 말 것이다.

지금도 정성껏 돌봐주고 있는데 못할 짓이다.

그녀에겐 그녀의 미래가 있다는 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앞길이 창창한 아가씨가 그 같은 무연고자와 엮여봤자 좋을 게 없다.

양다리도 멀쩡한 게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머리가 점점 식어간다. 훈련 때문에 오른 열이 빠지니까 아직 생각지 못한 문제가 떠올랐다.

“아, 이런. 지갑을 안 가져왔네. 오는 길에 멜론 소다라도 사서 같이 마시려고 했는데.”
그는 왔던 길로 급히 돌아갔다.

멀리 가지 않아서 곧 재활실로 돌아왔다.
그때 다이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때 양쪽을 다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끼익, 휠체어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다이아?”
“아.”

다이아와 눈이 마주쳤다.

“트레이너 씨! 잊으신 게 있나요?”
“어, 어어. 지갑을 놔두고 가서. 다이아는 뭐 하고 있었어?”
“얼마 전에 뽑지 못한 인형이 있었거든요. 양쪽에 있는 다른 인형들한테 딱 걸려서요... 공략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이아는 평소 같은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날 병원에서 다리 깁스를 완전히 풀었다.

“수술 자국은 잘 봉합됐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군요. 혹시 감각에 다른 이상이 있으면 꼭 말씀해주시길.”

의사가 나가자 그는 우선 팔을 살폈다. 팔에는 무언가에 찍히고 찢어졌던 상처를 꿰맨 자국이 가득했다. 상처는 지저분했지만, 봉합 자국은 깔끔했다. 상당히 실력 있는 솜씨다.

팔의 붕대는 예전에 풀었으므로 상태를 확인할 것까진 없었다.
그러나 굳이 확인했다.

다리와 대조를 하고 싶어서.

그는 오른쪽 발뒤꿈치의 수술 자국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찍히거나 찢어지거나 짓이겨진 그 어떠한 상처도 없는 채로, 깔끔하게 봉합된 수술 자국만이 자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전화가 한 통 왔다.

“여보세요?”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서의 니라 미츠히데라고 합니다. 지금 시간 되십니까?”
폰에서 능글능글한 인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괜찮은데요. 무슨 일이시죠?”
“지난 2월에 당하신 사고에 관해서입니다. 어떤 사고인지는 알고 계시죠?”

기억은 없지만,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다. 의사한테서 들었으니까.

“등산로에서 실족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말 안타까운 사고였더군요. 앞길 창창한 젊은 분께서 그런 사고를 당하다니... 제 가슴이 다 아픕니다.”

무언가 간을 보는 것 같은 말투였다.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기록을 보던 중에 특이사항을 발견해서요. 선생님께서는 기억 상실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그럼 선생님께서도 꼭 아시고 싶어 하실 게 분명하군요! 아니, 이건 꼭 아셔야 하죠.”
“뭐가 발견됐죠?”
“등산로의 CCTV 기록이 있었습니다! 데이터 보관 기간이 아슬아슬해서 상당 부분이 지워진 상태긴 했습니다만. 등산로를 오르는 선생님의 모습이 찍혀있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자고 일부러 전화한 건 아닐 테지.
상대가 뜸을 들이듯 말을 잇지를 않자 그가 물어보았다.

“뭐가 찍혔나요?”
“뭐가 찍혔다기보다는... 선생님의 모습이 찍혀있는데요 글쎄, 그게...”

상대는 굳이 한 박자 쉬고는 말했다.

“선생님께서 무언가에 쫓기고 계셨습니다.”








퇴원하고 처음 밟는 마을 길은 신선했다.

당연하다. 기억이 없으니까.


그는 분명 예전에는 익숙한 듯이 드나든 길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었다.


목발에 의지하고 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어떤 의미로는 당혹감마저 느꼈다.


“트레이너 씨, 왜 그러세요?”

그런 그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다이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다이아는 퇴원하는 날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시간을 뺏는 것이 미안해 한 차례 거절했으나 이번에도 밀어붙이고 말았다.


중간까지는 다이아가 부른 차를 타고 이동. 근처부터는 내려서 나란히 걸었다.


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었지만, 걷고 싶다는 이유로 내린 결정이었다.


목발을 짚은 채로 짐을 드는 건 힘들므로 다이아도 나눠 들었다. 사실 짐이라 할 것도 옷가지와 세면도구 정도만 있어야 정상이지만, 다이아가 병실을 오가며 놔둔 선물들이 상당했기에 인간 남성 혼자서 옮기기 힘든 양이었다.


작은 가방 하나와 캐리어 하나에 짐을 나눠 담고 작은 가방은 그가, 캐리어는 다이아가 끌기로 했다.


“그냥 길이 생소해서. 다이아는 그거 무겁지 않아?”

“대부분 인형인걸요? 부피만 크지 무겁지도 않아요.”


인형의 비율이 높지만, 가방 안에는 식기나 전자기기 같은 것도 있었다. 캐리어로 운반하고 있고 운반하는 당사자가 우마무스메니 의미 없는 걱정이지만.


다이아와 나란히 걸으면서 마을을 좀 더 살펴보았다. 번화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미진 동네는 아니다. 향수를 자극하는 동네 전경에 조금 취했지만, 동네로 돌아왔을 때부터 느낀 근본적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던 걸까? 왜 트레이너를 관두고 이런 곳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되 다이아에게 물어보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그가 살던 동네는 트레센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방이었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트레이너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다이아는 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쓸쓸한 표정을 짓고는 마음을 가다듬기라도 하는지 시간을 들였다. 그러고 나서야 다이아가 대답했다.


“트레이너 씨는 아마 피곤하셨던 것으로 생각해요. 저와 함께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셨는걸요.”

“하하, 다이아하고 나란히 달리다니 금방 뒤처지겠는걸.”

그는 조금 농을 섞었다. 그래도 다이아가 한 말의 의도는 알고 있다.

물론 진짜로 달린 게 아니라 비유의 표현이다.


병실에 있을 무렵에 다이아가 입이 마르도록 해주었던 이야기. 다이아를 위해 뼈가 닳도록 헌신했다는 그의 과거 기록. 수많은 언론에도 오르내린 궤적은 그에게도 지식으로 쌓여있다.


이 나라의 내로라할 우마무스메가 모인 수라장에서 정점을 여러 번이나 딴 것이다.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인생을 갈아 넣는 수준이 아닌 이상에는.


무엇 때문에 그만두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봐야 소용없다. 아무런 단서도 없으니.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면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 맞다. 저녁 어떻게 하지?”

집을 비운 지 오래되어서 문득 걱정됐다. 물론 트레이너가 거주하는 방이 그대로라는 건 다이아가 따로 확인해줘서 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세나 공과금은 자동이체로 되어있는 모양이었고.


“그럼 뭐라도 사가도록 하죠!”

다이아가 즉석에서 답을 내놓았다. 그가 같이 먹자는 말도 안 했는데, 당연히 같이 먹는 분위기다.


둘은 상점가를 들렀다. 상점가는 잘 정돈되고 깔끔해 보였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지 간판이 하나같이 번들번들 윤기가 난다.


“직접 만든 도시락입니다! 30년 전통이에요! 거기 젊은 커플분 오늘 저녁으로 특제 당근 햄버그 도시락은 어떠십니까?”

“아, 저희는 커플이 아닙...”

“와!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트레이너 씨! 저녁으로 어때요?”


다이아가 눈을 빛내면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맛있어 보이네. 그건 그렇고 30년 전통인가. 그런 것치고는 가게 외장이 되게 깔끔하네요. 최근에 리모델링이라도 했나 보죠?”

“상점가 전체로 갈아엎은 지 좀 됐습니다! 안전 문제도 있어서요. 하하!”

점원이 크게 웃었다.


점내를 좀 더 돌아보았다. 옛 외장을 유지할 부분은 유지해서 옛 부분과 새로운 부분이 꽤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관공서나 상인회의 힘만으로 이런 리모델링을 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우수한 디자이너들이 활약한 모양이었다.


가게를 나서고 상점가를 중심으로 거리를 좀 더 걸었다. 길이 굉장히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시골이나 다름없는 지방도시지만, 인구가 적어 조금 한산한 것만 제외하면 도쿄 어느 한 동네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무엇보다 목발로 다니는 데에 전혀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게 놀라웠다.


도시의 세련됨만 있지는 않았다. 거리는 시골 특유의 향수도 겸비했다. 전반적으로 상점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꽤 감탄이 나올 광경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나? 아니면 입원한 동안 도시 개선 사업이라도 한 걸까? 물론 그가 입원한 몇 달간으로는 도시 개선 사업이 끝나기에 턱없이 부족하므로 답은 전자겠지만.


비용만 하더라도 상당한 금액이 들어갈 것이 뻔하다. 관공서가 엮였으면 예산을 타내는 것만으로도 한세월이 걸릴 테니.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전자다.


둘러보니 꽤 괜찮은 동네다.

상점가에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이런 지방 도시로 온 것은 도피 목적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상당히 달라졌다.


어쩌면 지방에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었을 수도 있다.


“트레이너 씨! 저기 분수 좀 보세요!”

다이아가 들떠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멋들어지게 생긴 분수가 광장에 보였다. 중앙에 자리한 여인 동상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바닥에는 동전 몇 개가 드문드문 있었다.


“가게에서 들었어요! 분수에 두 사람이 동전을 던지면 사이가 나빠진다고 해요!”

“좋은 소문이 있어야 호객이 될 텐데...”

다이아가 무슨 연유로 꺼낸 이야기인지는 이해했다. 평소처럼 징크스를 깨기를 소망하는 거겠지.


병원에서도 자주 입에 담고, 그와 함께 실행에 옮긴 다이아였다.

이번에도 흥미가 샘솟았으리라.


다이아는 이미 동전을 들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그도 지갑을 뒤적였다. 둘은 동시에 동전을 튕겼고, 동전은 사이좋게 나란히, 그리고 동시에 물에 잠겼다.


다이아는 손바닥을 모아 무언가를 기도하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순수하게 소원을 비는 다이아. 그는 그런 다이아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목 부근부터 뺨까지 상기가 된 것인지 아니면 석양에 잠긴 건지, 다이아의 얼굴은 어딘가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문득 얼마 전 경험이 떠올랐다.


-


“오셨군요. 전화로는 이미 통성명을 했었지만, 니라 미츠히데라고 합니다.”

경찰서. 그는 니라의 부름을 받아 그곳으로 직접 향했다. 아직 퇴원하지 않은 시기였으나, 잠시 외출 허가를 받아 나올 수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꽤 고생했지만.


니라 미츠히데라는 남자는 정장을 깔끔하게 빼입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능글능글한 인상이 정장의 맵시를 먹어버린 듯한 인물이었다.


“CCTV 기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정말 남아있나요?”

“물론이죠! 지금 당장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영상은 두 개입니다.”

“두 개요?”

“그렇습니다. 해당 CCTV는 짧은 시간마다 새로운 파일을 만드는 타입이라서요. 이러는 편이 확인하기 쉽지요. 블랙박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니라는 PC를 조작해 동영상 파일을 띄웠다. 재생 목록에는 파일이 두 개 있었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파일이 중간에 빠졌군요. 파일명이 둘 다 앞에는 날짜가 적혀있고 하나는 뒤에 072, 나머지 하나는 074라고 쓰여 있네요.”

“안타깝게도 소실된 부분입니다. 프로그램이 오래된 파일을 무작위로 지워서 이렇게 된 것이지요.”


니라가 영상을 재생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눈에는 익은 뒤통수가 화면에 등장했다. 화면으로 봐도 당혹감에 물든 것이 역력했다. 화면 안의 그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러면서 등산로를 급하게 올라간다. 거의 뛰어가듯이. 쫓기는 게 분명했다.


재생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다음 파일이 재생되었다. 같은 구도에서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그가 보였다. 반대편을 향해 무언가 소리치고 있었는데, 흥분했는지 몸동작이 제법 컸다. 그 반동으로 균형을 잃고 다리를 헛디뎠다.


운이 없었는지 난간을 휙 넘어 그의 모습은 등산로 옆으로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저기는 경사가 진 구간이지요. 살아계신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알고 있다. 온몸에 흉터가 남았으니까.


“발견된 영상은 이게 끝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목격자를 찾고 있지요. 혹시나 여쭤보겠습니다만... 기억나시는 게 있습니까?”

“아뇨, 전혀.”


영상을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니라도 별 기대를 안 했는지 곧바로 말했다.


“그럼 수사에 진전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참, 그... 요즘 사토노 그룹의 아가씨가 옆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예?”

그는 조금 당황했다. 의외의 이름이 나왔기에.


“아뇨, 별일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아가씨의 담당 트레이너였다고 들었으니까요. 이야, 그런 우마무스메의 담당 트레이너이시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니라는 넉살 좋게 웃었다. 하지만 니라의 눈빛은 진의가 따로 있음을 시사했다.


“혹시 다이아가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그는 조금 파고들기로 했다. 재활실에서 들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리기에. 그가 우연히 들었던 단 한 마디. 그게 도저히 잊히지를 않았다.


“어휴, 관계라뇨!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냥 그런 유명인이 아는 사이라고 하시니까 조금 흥미가 간 것이죠. 하하! 참 대단한 인맥 아닙니까? 그냥 농담입니다만, 협조해주시면 꽤 유용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사토노 그룹 따님이시라니까.”

니라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다이아에겐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걱정할 것 같으니까요.”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경찰서를 나왔다.


-


“트레이너 씨? 무슨 생각 하세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다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와 눈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피곤하신가요? 열이라도 있나요?”

다이아가 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조금 차갑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기분 좋았지만, 그의 상념을 완전히 걷지는 못했다.


다이아와 손 하나로 연결된 순간에도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네가 범인이야? 네가 내 다리를 망가트린 거야?

하지만 그 말을 뱉어내진 않았다. 심증만 조금 있을 뿐이며, 상식적으로 다이아가 그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세요?”

슬슬 무슨 말이라도 꺼내긴 해야 한다. 재촉하는 것 같은 다이아의 눈을 똑바로 보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다이아가 사랑스러워서.”

“네?”


순간 다이아의 손이 조금 굳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실수했나 싶던 순간 다이아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말했다.


“기뻐요...!”

촉촉한 목소리. 석양 때문이 아닌, 상기된 뺨. 다이아는 활짝 웃고는 그대로 그를 껴안았다. 그는 조금 당황했지만 다이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균형을 잃을 것 같았으니까.


그의 집은 상점가와 가까운 연립주택이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 겸 욕실 하나. 그리고 거실과 부엌 따로. 혼자 살기엔 적당히 넓은 곳이었다.


저녁을 먹고 다이아를 돌려보낸 후, 집을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어볼 새도 없이 그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집으로 온 과정을 거꾸로 더듬는다.


그는 이내 곧 병원에 도착했다. 그가 입원했던 병원보다는 확연히 작은 병원이다. 동네에 하나쯤 있는 그런 병원. 저녁이 지난 시간에도 진료를 받는지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는 결심을 다질 것도 없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오려고 벼르고 있었기에.


진찰실에 들어서자 제법 고가의 최신 시설을 갖춘 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구경할 때가 아니다.


그는 의사에게 오른쪽 발뒤꿈치를 보여주며 물었다.


“저는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망가졌습니다. 실족 사고를 당해서요. 그런데 아무런 외상도 없이 아킬레스건만 망가지는 게 가능한가요?”


다이아가 중얼거린 말을 들은 순간부터 마음에 계속 걸렸다. 그 말은 지금도 강렬하게 그를 흔들었다.


만약 다이아가 그의 아킬레스건을 끊었으면?

만약 다이아가 실족 사건과 관련이 있으면?


만약 그게 사실이면 그가 수술을 받고 입원한 병원도 의심해야 한다. 그를 수술한 의사도 엮였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동네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으며 물어본 것이다.


질문을 받은 의사는 그의 발목을 조금 만지작거리면서 살펴보았다.


“사고를 당한 지 꽤 지나셨나 보네요? 멍 자국은 보이지 않는군요.”

“네, 좀 됐습니다. 오늘 퇴원했고요.”

“수술 자국이 깔끔하게 봉합됐군요. 대답해 드리자면 외상없이 아킬레스건만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아킬레스건에 무리가 간 상황에서 격렬한 운동을 하면 가능해요. 전조 증상이 있지만요.”


의사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양 말했다.


“발에 이상한 점은 없네요. 더 여쭤보실 게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의문은 풀렸다.


집에 돌아온 그는 휴대폰을 켜 웹사이트를 접속했다. 몇 번 검색했던 항목을 재차 다시 검색했다.


검색 단어는 사노토 다이아몬드.

그러자 결과가 우르르 올라왔다. 그녀의 수상 기록과 레이스에 관한 기사가 가장 위에 올라와 있었지만, 지금 볼 건 그게 아니다.


그는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기사들에 주목했다. 그녀가 평소에 해온 선행에 관한 기사였다. 다이아가 사토노 그룹의 자선 행사에 참가한 기사, 봉사활동에 참가한 기사 등등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는 휴대폰을 껐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무자비하게 짓누르곤 중얼거렸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구나.”

죄책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다이아는 기억이 없는 그를 그토록 헌신적으로 돌봐주었다. 그런 손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은 아이가 그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숨을 쉬길 잠시, 그때야 여유가 생긴 그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몇 달 동안 비워서 집안에는 먼지가 좀 쌓여있었다. 아까는 먹을 자리만 치우고 밥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다이아가 말했다. 내일 청소를 도와주러 오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100% 선의를 불순하게 오해해서 미안했다.


숨을 고른 그는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방 하나는 침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창고 같은 방이었다.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 책장. 그리고 웬일인지 요즘에는 보기 힘든 브라운관 TV.


TV의 비디오 선과 오디오 선이 콘솔 게임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사토노 그룹의 옛 로고가 박힌 게임기였다. 별일이다 싶었지만, 그냥 취미로 레트로 게임을 즐겼으려니 여겼다.


그는 책장을 살펴보았다. 전직 트레이너였다 보니 트레이닝 이론이 적힌 서적이 있겠다 싶었지만, 그런 책은 보이지 않는다. 트레이너를 그만두면서 전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선이 어떤 노트에 머물렀다. 직접 적은 내용이면 기억을 찾을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필체로 게임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적은 게임 플레이 일지, 혹은 공략 일지 같았다. 기억에는 없지만 그리운 기분이 들어 그것을 읽어 나갔다. 노트는 몇 권 더 있었는데 조금만 읽는다는 게 그만 노트 대부분을 읽고 말았다.


마지막 한 권을 읽으려니 수마가 몰려왔다. 결국, 수면욕을 이기지 못하고 노트를 펼친 채로 잠이 들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눈이 번쩍 뜨였다.


창밖을 보니 햇볕이 쨍쨍했다. 그대로 푹 잔 모양이었다. 피로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했는데...


툭 떨어진 노트의 어떤 페이지가 눈길을 끌었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그것은 어린아이의 필체가 아니었다.


초인종이 울린다.

심장이 이상하게 쿵쿵거리며 뛰었다.


그는 노트를 주워들곤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나지 못했다. 어디를 가든 따라온다. 나를 계속 보고 있다. 이젠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도망칠 수는 있을까? 그래도 도주로를 미리 알아둔 게 다행이었다. 설마 그곳을 통해 도망치리라곤 생각도 못 하겠지.》


초인종이 울린다.

밖에서 누가 부른다.


“트레이너 씨! 안에 계시죠? 저 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다이아예요!”

다이아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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