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불리해가는 전황 속에서 확실해져가는 패배 속에서 왕도는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어느 날 왕도에 입성한 한 무리에 의해 바뀌었다.

평화 협상을 위한 사신단. 정확히 말하면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죽어가는 왕국의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도만큼 사신단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저희 여왕 전하께서 제안하신 관대한 협상입니다."

그리 당당하게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조약의 내용은 관대한의 의미를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참혹했다.

엄청난 양의 배상금과 공물 요구, 그리고 사실상의 속국화 요구와 더불어...

"그건 그렇고 양 측의 왕실결혼이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건가?"

"거기에 무슨 음흉한 의도가 있겠습니까. 단지 양 측의 평화를 상징하는 이정표로 삼고 싶을 따름입니다."

개소리.

그나마 추측하기엔 추후 합병의 구실로 맺기 위함과 동시에 이쪽을 옭아매려는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양측 다 왕가의 손이 부족한 거로 알고 있다. 그대들이 제안하는 결혼은 도대체 누구와 누구의 결혼인가?"

"이 결혼은 양가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양가의 가주가 올리는 결혼식만한게 없지 않겠습니까?"

"...."

상대의 목적은 거의 확실해졌다.

결혼을 통한 빠른 합병.

양국의 세력차에 의해 이 결혼의 주도권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정해진다.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는 십중팔구 저쪽으로 넘어갈 것이 자명하다.

"...만약 짐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전하께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범하신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저 성벽이 언제까지 전하를 지켜주실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긴 대답은 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있고.

"그대의 여왕에게 돌아가 전하라.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그리고 그 순간 칼집이 떨어지고 나를 향한 이사벨의 불안한 시선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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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깊은 밤, 울창한 숲속

분노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당초의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분노한 기사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호성이 거세게 퍼지지만 정작 그걸 듣는 은빛 머리칼의 여인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당초 약속은 그랬지. 하지만... 내가 왜 굳이 지켜줘야 하지?"

"뭐?!"

"내가 이제 와서 안 지켜도 그대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아니면 그대가 사모하는 주군한테 주군이 제일 신뢰하는 기사가 사랑에 미쳐 주군을 배신했다고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가?"

순간 달려들어 멱살을 잡은 기사를 보며 여인은 비웃음을 던졌다.

"그래도 놓는 게 낫지 않겠나? 혹시 아나? 내가 마음이 바뀌어서 그 자를 자네에게 던져줄지?"

서서히 잡은 멱살을 풀어주자 여왕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들더군. 도대체 얼마나 매력있길래 충성스럽기로 유명한 자네가 십년지기 친구이자 주군을 단지 사랑을 이루기 위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려는 것인지. 어디까지나 호기심이네. 한달. 한달 정도 갖고 놀다가 질리면 그대에게 던져주지. 뭐 마음에 들면 그때 자네에게 조금의 '양보'를 해주지. 애당초 자네에게 이거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나?"

상대의 조소를 애써 참으며 등뒤로 돈 이사벨은 절규가 내뿜어지는 걸 참아냈다.

자신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

부하들을 버리고 동료들을 버리고 존경하는 주군이자 안심할 수 있는 친구이자 자신의 사랑을 배신하고 자신의 맹세를 부수고 반토막내고 불태우고 돌아온 것은 고작 이정도였나.

그녀는 망가져가는 마음을 붙잡고 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후기. 전 화 어느 분의 아이디어를 듣고 바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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