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에서 이사벨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자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런 관계는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이다. 거기에 새로이 고용된 하인들은 사실상 여왕의 사람들. 궁정엔 보는 눈이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와 혹시 나올지 모를 자식은 지켜야 했다.

그를 위해서는 여왕과의 담판이 필요하고.

'해내야지... 어떻게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자신의 앞에 누운 나체의 기사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문밖에는 모든 것을 엿듣고 칼을 가는 어느 질투심 많은 여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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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사내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비록 꼭두각시 처지라 결정권은 없었지만 최소한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지키고자 펼치려는 정책의 계획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인상의 여자가 문을 몇번 두들기고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그녀의 태도는 점차 변해갔다.

침착하게 밀어붙이던 처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적이고 무례한 말들로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 지난날들을 잠시 회상하던 중 평소보다 조금은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부부생활에 대해 얘기를 하고자 왔는데요."

"그거 잘됐군요. 마침 저도 그 문제에 대해 정리하고자 하던 차였습니다."

털썩.

집무실의 책상 위에 무덤덤하게 종이를 내밀었다. 일종의 계약서인 그 종이에는 여러 조항들과 내 인장, 그리고 그녀의 인장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라인하르트와 소피야의 결혼 생활에 대한 계약서

라인하르트를 (갑)이라 칭하고 소피야를 (을)로 칭한다.

1. 갑과 을 모두 양쪽의 표면적인 결혼 생활 유지에최선을 다한다.

2. 갑의 경우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작위를 자신의 사후 을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 혹은 을에게 우선적으로 승계시킨다.

3.갑과 을은 서로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라인하르트
소피야

그녀는 짐짓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별로 만족스럽진 않는 내용이네요. 그건 그렇다치고 개인적인 사생활의 범위는 도대체 어느 정도지요?"

"그것에 대해선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죠."

"이를테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네요."

"해석에 따라 그럴수도 있겠군요, 부인."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어떻게든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조금씩 떨리는 눈썹은 표정 너머 그녀의 기분을 표현해주고 있었다.

"어제 다른 여자하고 단란하게 놀아나셨나 보네요. 이를테면... 이사벨이라던가..."

"글쎄요. 거기에 답변할 의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젠 아예 부정조차 안하는군요."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분노로 뒤바뀌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의 눈썹은 완전히 뒤틀렸고 그녀의 빨간 눈에는 마치 불꽃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인,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희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혼일 뿐입니다. 저에게 적극적인 결혼생활을 강요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여 숨을 고른다.

"설령 부인이 무얼 해도 제 마음은 돌릴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여왕."

"....!"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빠르게 식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숙이며 잠자코 있다가 그대로 도장을 찍고는 문밖을 나섰다.

그것을 보고서야 나는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싸늘한 눈빛과 동공 없는 눈동자를. 그리고 그녀의 얼굴 너머에서 느껴지는 진심을 그리고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나를 지나 누구를 향했는지.

그녀는 항복 문서에 사인을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거짓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은 일주일 후의 축제 때.

모든 일이 끝난 상황에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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