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숲속 별장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를 받아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숙식 노가다 꾼에 주말에는 냉장고 공장에서 포일을 붙이고 일이 없는 날에는 물류센터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내가 무슨 팔자가 있어서 그런 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비탈길을 오르는 오프로드 자동차는 마력의 성능이 좋은지 거침없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가르며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당연히 내가 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자동차도 아니다.


나는 조수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서 공군 장교가 쓸법한 선글라스와 하이엔드 브랜드 청자켓을 걸치고 쾌활함이 잔뜩 묻어 있는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낯선 여자의 호의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오르막길을 두 다리로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 되게 괜찮은 곳이죠?"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 아래로 세쿼이아 나무로 꽉 찬 울창한 숲이 보이고 저 능선에는 퓰리처 사진 잡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랗고 웅장한 바위가 산맥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내가 등산을 하는 취미가 없어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산은 이렇지 않으며 대체로 밋밋하기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이곳을 꽤 맘에 들어 하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아뇨 뭘, 저도 가끔 여기에 들릴 때 차가 없으면 꽤 곤란했거든요. 그럴때마다 여기 별장에 볼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차를 빌려 타요."


내 몇 년 치 봉급 짜리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그녀가 자동차 없이 이곳으로 오는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전 웨인 이스턴이에요."


"전 사라 스튜어스에요."


"사라라고 부르면 될까요?"


"편할 대로 부르세요."


각각 이름을 교환하고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별장에 도착했다.


"뭔가 이상해."


차에서 내리고 그녀는 주차하기 위해 잠시 별장의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곳에 주차장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타고 왔던 사라의 랜드로버 이외의 다른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숄더백에서 접혀서 곱게 넣어놨던 초대장을 꺼내어 펼쳐보았다.


그리고 일정이 적혀 있는 것을 천천히 읽었다.


아침 9시까지 도착.


배정된 숙소에 짐을 풀고 아침 10시에 간단한 식사.


12시에 점심과 간단한 티타임을 가지고 오후 4시부터 본격적인 연회 및 사교 파티가 시작되어 늦은 저녁인 11시에 끝난다는 소개문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오늘 오게 되는 재즈 밴드의 이름과 이벤트를 진행할 사회자의 이름도 적혀 있다.


누가 보더라도 적게는 수십 명이 많게는 백 명 정도가 참여하게 되는 그런 규모임이 분명하다.


나는 연회장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주위를 둘러봤다.


별장의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건물들과 별관은 상당히 컸다.


누군가의 저택이나 호텔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규모라고 해도 좋았다.


좀 더 가까이 들어가 건물을 둘러보니 신축된 것인지 아니면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인지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음에도 벽에는 때 하나 타 있지 않았다..


부르주아들이나 가끔 여우 사냥을 위해 들리는 휴양지 같은 곳에 홀로 있었지만 뭔가 즐겁다거나 들뜬 기분은 없었다.


그냥 묘한 위화감만이 감돌뿐이다.


"왜 그렇게 서 있어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까와 같은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라가 선글라스를 왼쪽 손에 벗어 든 채 새파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어쩐지 이상해서요."


"뭐가요?"


내 말에 호기심을 느낀 건지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그 거리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사라에게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그렇잖아요."


내가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초대장을 꺼내 펼쳐 보이며 말했다.


"벌서 9시가 조금 넘었는데 저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내 말에 그제야 그녀도 이상한 걸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당연히 사람의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요."


"행사가 취소된 건 아닐까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들어가면 관리인이 있을 테니 그 사람에게 물어봐요."


그러더니 사라는 내 손을 잡고 안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언제 봤다고 몸을 그렇게 쉽게 만지는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별달리 저항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별장의 안으로 들어갔다.


돈을 얼마나 쓴 것인지 내부도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입구에서부터 로비로 가는 복도까지 진품으로 보이는 유명한 그림들이 몇 개씩이나 걸려있고 대부호의 저택에나 놓아둘 법한 중세기사의 갑옷이 완벽하게 갖추워져 전열되어 있었다.


널찍한 로비의 천장에는 보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반짝거리며 달려 있었고 가죽 소파나 의자 등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며 구석에는 흔들의자와 벽난로가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는 바에서나 볼법한 기다란 선반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별달리 특별한 점이 없고 탁상 달력과 관리인을 호출할 때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차임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상한 점은 투숙객의 서명이 적혀 있는 장부나 담당 관리인의 명패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사라는 익숙한 듯 선반으로 다가가 벨을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렸다.


딸랑딸랑하며 청아한 소리가 로비에 올리자 곧 개단 뒤쪽에 있던 문이 하나 열리며 그곳에서 메이드 복장의 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나이가 꽤 많아 보였는데 군데군데 보이는 흰머리와 깊게 파인 주름 때문에 그녀가 어림잡아 대충 몇 살인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늙은 메이드는 사라를 보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야기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 그래요 환영해주어서 고마워요."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 별다른 것은 아니고 오늘 여기서 열릴 연회가 취소가 됐나 해서요. 둘러보니까 사람들이 아무도 없던데."


메이드는 앞치마에서 작은 메모장을 꺼내어 몇 장 뒤로 넘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있을 연회는 취소가 되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그냥 가기에는 좀 아쉬워서 그런데 숙소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아침 식사도 부탁해요."


메이드는 대답 대신 알겠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고 그녀가 나왔던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문이 천천히 닫히는 순간까지 나는 이 기묘한 기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했다.


단지 연회가 취소되었는데도 별달리 연락이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이상한 것은 이 두 사람의 태도다.


사라는 왜 연회가 취소되었는지, 언제 다시 하는 것인지는 전혀 묻지 않았다.


꼭 이럴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군다고 해야 할까?


메이드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연회가 취소된 게 일주일 전 이야기도 아니고 심지어는 오늘이 당일이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걸 메모장을 꺼내 확인할 이유가 있을까?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말투.


마치 사라를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만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라의 손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오늘 여기서 머무실 건가요?"


"예, 뭐... 그래야겠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시군요. 그럼 저는 여기서 인사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태워다주셔서 감사했어요."


내가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 뒤로 돌아서려 하자 꽤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라가 다시 내 손을 붙잡았다.


"에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게요?"


"볼 일이 없는데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 사비로 여기에 머물 만큼 돈이 많지 않아요."


"제가 내드릴 테니까 하룻밤만 자고 가요."


"사라가 왜 숙박비를 내줘요? 저는 괜찮으니까..."


"됬으니까 그냥 하룻밤만 자고 가요."


사라는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막노동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온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꽉 쥔 내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역부족인 건 마찬가지다.


나는 그녀의 완강한 태도에 기가 막혀서 인상을 쓰고 사라를 노려보았다.


"당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싫다니까!"


"됐으니까 그냥 머물고 가라고!"


그녀의 손바닥이 내 볼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핑하고 하늘이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혀에서 짭짤한 핏물이 느껴지고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내 볼이 후끈거린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나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로 사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아까와 다른 쾌활한 미소 대신 아주 싸늘하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다, 당신...!"


"왜? 놀랐어?"


아까와는 확연하게 다른 어조.


360도로 변한 그 목소리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사라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조금 전 후려친 내 볼을 아주 천천히 쓰다듬는다.


다정한 태도였지만 나는 공포만을 느낄 뿐이었다.


나를 때린 것이 다름 아닌 사라 그녀였으니까.


"너 바보야? 세상에 누가 이유 없이 차를 태워줘?"


나는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천천히 쓰러졌다.


무력감과 막연한 두려움이 가슴속에서 낚싯바늘에 걸린 활어처럼 뛰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떤 사교모임이 너 같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를 부를까? 그런 거 생각 안 해봤어?"


"나... 나는 내 어, 어, 어, 머..."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네 어머니. 그렇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네. 예전에 너희 집 꽤 부자였지?"


사라는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걸 노리고 나를 불렀을 것이다.


내가 착각해서 이곳으로 오길 바란 게 틀림없다.


모든 게 확실해졌다.


여긴 별장이나 산장 같은 휴가용 숙박시설이 아니었다.


여긴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저택이고 그녀가 음흉한 짓을 하기 위해 지어놓은 거대한 덫이다.


나는 그 덫에 걸린 것이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내가 모르는 빚이 있는 거라면... 그, 그것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미, 미안하지만 조, 조금만 기다려 줘, 내, 내가 더 열심히 일해서...!"


"하하하, 너 멍청이구나? 그깟 잡부일이나 하면서 어떻게 수백만 달러를 갚을 건데?"


내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네 어머니가 우리 가문에게 빌린 돈은 한 푼도 없어. 내가 말한 것은 네가 이미 짊어지고 있는 돈에 대해서 말한 거니까."


사라는 정말 나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보 같긴 하지만 마음에 들어. 만약에 네가 매춘부 짓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는 장담 못할 거야,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화가 나니까 말이야."


"원…. 하는게 뭐야."


"뭐, 네 어머니 일 때문에 복수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니야. 원래대로라면 널 이곳에서 천천히 요리해 먹을 생각이었는데 초장부터 다 들통났으니 그런 시답잖은 건 건너뛰자고."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인데?"


난 겁에 질린 채 와들와들 떨 뿐이었다.


도망을 친다거나 거세게 반항을 한다거나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는 일 따위는 하지 못했다.


여긴 그녀의 홈그라운드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랑 너는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어. 기억 안 나? 브리타네드. 그 개 같은 동네 말이야. 배가 불룩 나온 부자들이 기름진 오리고기나 먹으면서 불륜 상대 남자의 엉덩이나 주무르는 그곳."


유년 시절 뛰어놀던 동산이 딸려 있던 동네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그런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어머니와 함께 그 주변의 마트에서 장을 보던 일도 생각이 났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기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나 말이야, 널 무지무지 좋아했어. 네 머릿속에서 그런 기억은 없지만 네가 날 위해서 나를 괴롭히던 못된 놈들을 때려줄 때 말이야 그때 첫눈에 반해버렸거든. 더럽혀진 체육복을 빌려주기도 하고 교과서를 가지고 오지 않아 전전긍긍할 땐 네가 내 옆에 와서 책을 같이 봐주기도 했어. 그때 나를 그렇게 배려해주고 아껴주던 사람은 가족까지 포함해서 단 한 명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녀의 말처럼 나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싸움을 했다는 사건은 꽤 특별한지라 그것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눈앞의 사이코패스인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내 것에 집착이 정말 강해, 어렸을 때부터 내 물건은 하나도 없었거든,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밴 아이라는 이유로 늘 그랬어, 어머니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 그래서 내게 주어진 건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다 쓴 연필, 시꺼먼 때가 묻은 지우개, 다리 한쪽 없는 로봇 장난감... 아직도 가지고 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그때 이후로 내 것이라고 정했어. 네 전부는 내 것이라고 정했단 말이야. 네 머리카락, 네 두 눈, 네 입술, 네가 내뱉는 숨결까지 전부."


사라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저택을 한번 빙 둘러봤다.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는지 파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한 달 전에 어머니가 죽었어, 형제들이 바보 같은 짓만 일삼는 덕분에 재산은 전부 나에게 상속되었고 그 덕분에 내 계획은 좀 더 빨라질 수 있었지."


"...계획?"


내 물음에 그녀는 씩 웃으며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복사본으로 보이는 그 종이는 채권증서였다.


거기에는 내 빚을 몽땅 갚은 것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백만 달러... 이거 어떻게 갚을 거야?"


그제야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깨닫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해."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아까처럼 나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볼이 아니라 내 엉덩이였다.


그 음탕한 손길에 나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런 짓으로 돈을 갚아나가고 싶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떳떳한 오빠가 되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살아왔는데...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지? 거부하면... 꽤 고생하게 될 거야. 널 독촉하던 그 사채업자 년은 네 사정을 봐주고 있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동생들... 학교도 보내고 공부도 시켜야 할 거 아니야?"


유혹…. 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은 강제성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나는 이 저택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보내줄 것이라면 애당초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몸... 이면 되는 거야?"


"히히, 그건 아니지 네 마음까지…. 라고는 해도 그게 쉽지는 않겠네. 뭐 이해해, 그래도 괜찮아 여기에는 마약도 있고 고문 기구도 있어. 네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만 쓰면 쉽게 되지 않을까? 어차피 시간은 아주 많은데."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법이라고 하는 것을 가볍게 무시하는 그 말에서 나는 또 한 번 공포를 느꼈다.


"아,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말자 우리. 네가 동생들의 평판을 위해 평생 지켜온 정조인 건 알겠는데 말이야 어차피 한 명에게 대주면 그건 창남이라고 보기 어려운 게 아닐까? 네가 나에게 넘어오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음... 단순한 부부관계쯤이라고 생각하자고."


"웃기지 마 이 나쁜 새끼야...!"


내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그녀는 낄낄거리며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제는 맨살을 주물럭거리는 그녀는 잔뜩 달아올랐는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사랑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사랑했으니까... 보상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할게. 언젠가 네 입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때, 이 저택에서 내려가서 더 좋은 곳에 머물자. 네 동생을 데리고 와도 좋아. 물론 별관을 써야 하겠지만."


나는 그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모든 게 악몽같이 느껴졌다.


난 그저 지쳐버린 일상에서 콘크리트 정글이나 다름없는 문명사회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자유를 느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왜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이었을까.


날 희롱하던 그녀의 손길이 사라졌다.


손에 들어온 장난감이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인지 그녀는 이제는 내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나를 가슴 품으로 안아 들었다.


"방으로 가서 하자. 맨날 상상만 하면서 혼자 달랬는데 이제는 진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구 가슴이 떨리는 거 있지?"


"...넌 꼭 천벌을 받을 거야."


"마음대로 지껄여. 잠시 후면 그 입에서 신음 말고 아무것도 안 나올 테니까."


어차피 널 때린 순간부터 네 호감을 살 생각은 없었어. 그렇게 말을 이어붙인 그녀는 휘파람을 불며 커다란 연어를 낚은 어부처럼 천천히 개단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빚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시간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가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 강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저항은 없다.


고문 기구, 마약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나는 저항할 의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저, 빨리 이 마음이 갈가리 찢겨 나가서 그녀가 원하는 인형이 되어버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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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시간 남아서 단편 한 번 써봤음.


헤어진 전 와이프는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