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은 무엇인가.

손에 쥔 금인가? 근사한 저택인가? 농사 지을 넓은 땅인가?

하지만 그것이 무력함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진정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니콜라이, 애칭으로 콜야.

그는 흔하디 흔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의 내면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저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 놓고 보자면 특별난 것이 없었고

발에 채이는 거리의 사람이요, 끌려 나온 또 한 명의 징집병일 뿐이었다.

하지만 1805년, 체코 아우스터리츠에서 그의 인생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나폴레옹의 신출귀몰한 전략전술 앞에 오스트리아, 러시아 동맹군은

맥을 못 추리고 달아나야 했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병사들 사이로

어떤 앳된 장교 하나가 사브르(굽은 외날도)를 쳐들고 "돌격! 돌격!"을 

외쳤다. 그러나 그 놈이 뭐라고 병사들이 사지로 다시 달려가겠는가?

아무도 그의 말을 듣는 이가 없었다. 그 젊은 장교는 아랑곳 않고

병사들이 달아나는 반대편으로, 적을 향해 뛰어갔으나 곧

지근에서 터진 포탄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고

구해낸 것이 바로 콜야였다. 그도 전우들과 함께 달아나다가

쓰러진 어린 장교를 보고 총도 버리고는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고 뛰었다.


왜 그랬는지는 그도 모른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 상이 욕심이 나서 그랬다고 보기엔 

적어도 콧수염이라도 나고, 장식이라도 요란해야 구할 가치가 있었지 않았겠나?

그러나 조카 뻘의 놈이 바닥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젊은 장교는 곧 정신을 차렸고,

야전 병원에서 몸을 잘 추스렸다. 그 놈이 영 몹쓸 놈은 아녔는지

감사 인사를 하고자 콜야를 찾았다. 콜야가 그를 보고는 반갑게 미소 짓고

경례를 올렸다. 그러자 그 장교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러지 말게. 자네의 행동은 진정 영웅적이었고, 숭고한 행동이었네.

자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은혜, 머리 숙여 깊이 감사하네.

나, 앙드레 얀수노프. 얀수노프 가의 이름으로 휴가 때 자네를 집에 초대해

이 은혜를 갚도록 해주게."


이게 웬 횡재람? 콜야는 싱글벙글 하며 예의 상 거절하는 시늉을 하다가

곧 감사해 하며 그의 초청을 승락 했다.


......,


처음엔 그냥 동네 지역 유지 쯤 되는 남작급의 하급 귀족이라 여겼다.

그러나 얀수노프가는 공작가였다. 심지어 하급 장교로 나선 앙드레 마저

남작급의 독립된 작위가 있을 정도였다. 콜야는 그의 집에서 

고기나 구워 보드카나 좀 마실 수 있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얀수노프 공작령, 그 위세를 드러내듯 차르의 궁전 처럼 웅장한

저택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정원에는 이국적인 꽃이 피어있고,

농노 옷을 입은 남자 여럿이 풀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입구에 다다르자 마차꾼이 외쳤다.


"얀수노프가의 앙드레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흠칫 하며 서둘러 철문을 열었다.

입을 쩍 벌리고 넋 나간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콜야에게

앙드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하네."


......,


앙드레는 귀염 받는 막내였다. 그가 전쟁터에서, 특히

많은 병사와 장교가 희생된 아우스터리츠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의 모든 사람이 뛰쳐나와

그를 안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눈물 마저 훔쳤다.

아직 어리지만 남자 흉내를 내려는 앙드레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뿌리치며 콜야를 소개했다.


"여기 이 사람은 전쟁터에서 절 구해준 병사입니다.

그 은혜를 보답하고 싶어 집에 초대했어요. 비는 방 하나

내어 줘 오늘만 그를 묵게 해주세요."


콜야가 집안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무지랭이 길거리 출신 그가 예법을 알리 없어

그저 머리와 허리를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코..콜야라고 합니다. 귀하신 분들을 뵈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얀수노프가의 사람들이 그를 보는 표정은 대개 좋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 수근덕 댈 뿐이었다.

앙드레의 목숨을 구해줬으면 구해준거지, 저런

천 것을 집안에 까지 들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의 상 별 대꾸 없이 고개나 끄덕 거렸다.

그런데, 거기 있는 모두가 콜야를 하찮게 보는 것은 아녔나 보다.

앙드레의 귀환에 눈물을 보이던 여동생, 마리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콜야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움푹 파인 볼살을

검고 까끌 거리는 수염이 덮고, 야전에서 구릿빛으로 탄

피부와 근육질의 건장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매는 진하고, 눈동자는 여인들을 가슴 설레게 하는

푸른 빛이었다. 그의 우수에 찬 깊은 눈을 마리아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얀수노프가의 안방 마님이 보고는 화들짝 놀라

마리아에게 말했다.


"너는 방에 어서 들어가거라, 어서!"


......,


방에 들어간 들, 사춘기 여인이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내를 어떻게 떨쳐낼까. 방에서 뒤척이며 그녀는 한참을

콜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납치하여

세상을 유랑하는 무법자였고, 나쁜 남자 이미지였다.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심심한 고상함 보다

격정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에 어울리는 야성적인 남자였다.

충동적인 그녀는 만약 그가 방에 쳐들어와 함께 달아나자고

청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 갈 정도로, 이미

너무 빠르고 깊게 그에게 빠져버렸다.


......,


그 와중에 저택에서는 파티가 열렸다.

무사생환한 앙드레를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콜야를 위한 것이었다.

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콜야는 생전 처음 보는 

술병들 앞에서 어벙벙한 표정이었다. 

앙드레가 물었다.


"콜야, 뭐 찾는 것이 있어? 뭐든 얘기해."


콜야가 말했다.


"보드카가... 혹시 어디 있나요, 나으리?"


'나으리'라는 말에 앙드레가 손으로 콜야의 가슴을 툭 치며

서운한 투로 말했다.


"그렇게 딱딱한 말투로 나를 부를 건가?"


그러자 콜야가 웃으며 겸양하는 손짓으로 휘저었다.

앙드레가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드카는 없지만, 프랑스에서 가져온 코냑도 있고, 

카리브에서 들여온 럼도 있으니 이 기회에 맛 한 번 보라구."


보드카는 서민들의 술이었고, 당시 제정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서유럽의 문화를 동경하여

이미 귀족들은, 특히 프랑스 문화에 빠져있었다.

심지어는 러시아인들 임에도 귀족들은 서로 불어로 대화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 집에 보드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러시아 이름으로 '안드레이'여야 했을 그의 이름이

불어 식으로 '앙드레'가 된 것도 이해할 만한 대목이다.


그래도,

아무리 프랑스를 흉내 낸다지만

그들이 러시아인들인 것은 숨길 수가 없다.

여러 귀족 친구들도 모여 거나 하게 술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콜야도 어느새 계급도 잊은 채

그들과 어깨 동무를 하고 어울렸다. 

아니, 어울리는 것을 떠나 모든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그의 언변 때문이었다. 귀족 출신의 사내들은

사교 자리에서나 어울릴 이야기만 알고 있지만,

거리 출신인 콜야는 온갖 외설적이고, 천박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 하나를 

끝날 때 마다 아쉬워하며 콜야에게 술을 권하면서 다음 얘기를 청했다.

어느새 그는 그 모임에서 천민의 몸으로 귀족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때 마리아가 방문을 조심히 열고 몰래 나왔다.

콜야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다. 그녀가 나오니 이미 콜야는

귀족 청년들의 중심에서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녀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었다. 우연히라도. 아니, 만들어낸 우연으로라도.


잠시 후 


콜야가 변소에 들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나왔다.

그때, 그를 뒤따른 마리아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콜야!... 콜야 맞죠?"


술기운에 헤롱거리는 콜야가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

그녀를 보고는 놀라서 대꾸했다.


"아니... 아가씨 아니십니까?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소란을 떨었죠?"


마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꼭... 당신과 대화하고 싶었어요, 콜야.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 나온 거예요."


콜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술기운이 만들어낸 신기루인가, 아니면 벌써 침대에 뻗어 꿈을 꾸는 것인가.

그는 말 없이 멀뚱하니 서서 그녀를 당황한 얼굴로 바라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