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또 네 수작이지?"



 몇 번을 되풀이한 건지,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은 문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업이 생업이니만큼,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는 건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진절머리가 나는 실랑이만은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한들,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글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이죽거리는 표정과 능글맞은 말투.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일 텐데.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왜일까.


 하다못해, 저 뻔뻔스러운 낯짝에 주먹이라도 꽂아 넣을 수 있다면, 조금은 기분이 후련해지겠거늘.


 입장상,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시치미 떼지 마. 바로 어제, 나랑 훈련 일정 잡혀있던 신입들 데려다가, 오션풀에서 쳐 놀다 온 거, 본인들 SNS 통해서 이미 다 확인했으니까."


"놀고 왔다니. 뭐,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난 그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기 고양이들의 긴장을 조금 공을 들여서 풀어준 것뿐인데 말이야."



 잡아떼는 게 먹히지 않으니, 당당하게 정면 돌파인가.


 그 기개는 높이 사지만, 어쭙잖은 용기는 이 바닥에선 만용이라고 부른다는 걸, 이제는 좀 알아먹었으면 했다. 



"여자 놀음은 정도를 지켜가면서 하라고. 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을 텐데."


"나야말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지 않았나? 내가 그녀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녀들 쪽에서 내게 다가오는 거라고. 그래, 이를테면, 향기로운 꽃에 아름다운 나비가 꼬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



 입씨름으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지라, 애꿎은 미간만 집었다.


 차라리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는 않을 텐데.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쳐대는 골칫덩이가 혓바닥까지 기니, 가슴 속에 얹힌 울화는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갈 뿐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는다·····."


"그건 좀 곤란한걸? 이 바닥에서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니까. 나로선 가급적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너만 없으면 무병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분을 가까스로 삼키며, 차가운 얼음물로 남은 분을 마저 삭혔다.



"저기 실례합니다·····. 혹시·····."



 바로 그때, 별안간 옆자리에서 이름 모를 여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사인 용지를 손에 든 채, 이쪽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는 모습.


 그 너무나도 노골적인 행색 덕에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 신검의 로엘 님 아니신가요?"



 그것 보라지.

 

 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미팅은 화상 채팅으로 하자고 한 건데.


 왜 이상한 고집을 부려서 사서 일을 벌이는 건지. 


 설마, 내가 고통받는 걸 즐기고 있기라도 한 걸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서 기분이 두 배로 불쾌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아니, 마, 맞는 거 같은데·····."


  

 뒤늦게 나서서 발뺌해 봤으나, 때는 이미 늦은 일.


 정신을 차렸을 땐, 직원과 손님 할 것 없이, 가게 내부의 모든 이목이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달빛으로 엮어낸 듯한 단아한 은발.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 은은한 색기가 감도는 눈물점까지·····."


"후우우·····,"



 그녀의 입에서 읊조려지는 인상착의가 하나하나 들어맞을 때마다, 내 낯빛은 점차 어두워져만 갔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그러한 자신의 외모 묘사가 자랑스럽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서 팔자 좋게 고개까지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속사 홈페이지에 게시된 프로필 문구도, 임마 혼자만 본인이 적은 거였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던데. 이쪽은 되려 익을수록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우려 드는 것이 볼수록 볼썽사나웠다.



"훗, 역시 스타의 휘광이라는 건,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로군."

 

"저, 정말 본인이 맞으셨군요! 싸, 싸인 부탁드릴게요!"


"내 팔자야·····."



 그 순간을 기점으로 카페 내부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사람이 해일처럼 밀려든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사태를 중재해 보려고도 했지만,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인파가 가히 헤아릴 수 없게 될 무렵부턴 그냥 포기했다.



"꺄아! 로엘 왕자님!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나를 봤어! 왕자님께서 나를 보셨어!"


"자자! 밀지 마세요! 사인은 한 사람당 하나씩!"



 어느덧 팬 미팅으로 변질된 모임을 보고 있으니, 몰려드는 회의감에 끊었던 담배가 어른거렸다.


 경험상, 상황이 저 지경까지 진행되면, 적어도 반나절은 발이 묶이게 된다. 


 그러니 지금은 이 고난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마음을 비우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귀신은 뭐 하나. 저거 안 잡아가고·····,"


"저, 저기·····."



 그렇게 가게 바깥에서 쭈그리고 앉아, 한창 짜증을 곱씹고 있던 차였다.


 별안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로엘 님의 매니저님 맞으시죠? 얼마 전에 TV에서 봤어요! 예전에 나름 유명한 헌터 셨다던!"


"아, 예·····."

 

 

 누가 나를 알아본 게 대체 얼마 만인 걸까.


 적어도 근 1년 동안에는 없던 일이었다.


 

"저기 이것도 기념인데, 혹시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실 있나요!"


"네? 사진이라면, 저 말고 저기서 찍으시는 게·····."


"그게····· 저쪽은 사람이 너무 몰려서·····."


"아·····."



 그렇군. 꿩 대신 닭이라는 건가.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거절한 명분도 없으니, 일단은 서비스에 응해주기로 했다.


 이 바닥은 이미지로 먹고사는 업계니까.


 아주 사소한 긁어부스럼도 간과해선 안 됐다.



"저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헛! 가, 감사합니다!"



 내 어색한 영업용 미소에 얼굴이 살짝 뻣뻣해진 그녀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미소 지을 일이 너무 없었던 탓일까.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입가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었지만,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면 찍을게요! 하나! 둘! 세·····."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딱 붙인 채, 이제 막 사진을 찍으려 한 그때. 


 불현듯 들려온 허망한 숨소리를 시작으로, 잘 들려 있던 그녀의 휴대폰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툭!



"어, 어어?"



 잠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자 물 끓는 주전자처럼 한껏 붉어진 얼굴과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안쓰럽게 흔들리는 동공이 순차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쫓았다. 


 그러자 눈에 보인 건,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몽환적인 미색.


 내게 있어선, 볼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지겹고도 지겨운 얼굴이었다.



"로, 로엘 님·····!"


"어이쿠. 이런 곳에 길 잃은 아기 고양이가 또 한 마리·····."



 들어도 들어도 신물만 올라오는 멘트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황홀해졌다.


 저런 느글느글한 게 대체 어디가 그리 좋다는 건지.


 요즘 젊은것들의 감각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내 팬이라면, 외간 남자랑 바람 피지 말고, 항상 나만 바라봐 줘. 그만, 질투해 버리니까."


"네, 네엣·····!"



 이어지는 마무리 멘트에 여인이 두 손 한데 모은 채로 커다란 눈을 반짝거렸다.


 제발 딴 데 가서 해줬으면 좋겠지만, 꼴을 보아하니, 그런 배려는 기대할 수 없어 보였다.



"왕자님!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시면 어떡해요! 덕분에 줄이 엉망진창이! 으아악─!"


 

 우당탕!


 반쯤 넋이 나간 눈으로 눈앞의 신파극을 지켜보고 있자, 가게 안쪽에서 무수한 인파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상황을 보아하니, 내가 본인 팬과 시시덕 거리는 걸 보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밖으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자신의 팬이 고작 한 명 내게 한눈을 파는 게 그렇게나 눈꼴 시렸던 걸까.


 그릇이 작은 것에도 정도가 있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미안미안~ 아기 고양이들~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겨서, 이 돌발 팬 미팅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될 것 같아~"


"그, 그런─!?"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지옥 같은 시간에도 끝은 존재했다.


 하기야, 방금 그걸로 어정쩡하게나마 유지되던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니, 여기서 무리하게 일을 계속 진행했다간, 자칫 큰 사고로 번질 위험성이 있었다.


 아무리 머리가 비어 있어도, 최소한의 변별력은 정도는 있었구나.


 아주 조금 다시 봤다.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또 보도록 하자~ 아기 고양이들~!"


"으앙~! 왕자님──!!"



 상큼한 윙크를 동반한 작별 인사에 연달아 터져 나오는 절규.


 왕자는 얼어죽을.


 저렇게 가슴이 수박만 한 왕자가 세상천지 어딨다고.


 그렇게 뱉으면 그 즉시 사달이 날 게 분명한 푸념을 조용히 질겅거리며, 도처에 세워놓은 차에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





"하핫! 참으로 보람찬 시간이었어! 안 그런가? 매니저!"


"다시는 너랑 단둘이 외출 안 한다·····. 다시는·····." 



 한참을 인파에 시달린 탓일까. 


 달리는 차 안의 적막이 그저 편안했다.


 바로 옆에서 신경을 긁어대는 천둥벌거숭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렇게까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늘도 나를 향한 아기 고양이들의 사랑에 흠뻑 몸을 적실 수 있어서, 정말이지 충실한 하루였어."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이번에 시간 날린 거 복구하려면, 둘이서 꼬박 이틀은 날밤 새야 할 판인데."


"하핫! 그렇네! 그것 참 큰일이로군~♪"


"·····."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 구석 자리에서 매연 같은 짜증이 올올히 피어오를 뿐.


 미우나 고우나, 우리 회사 최고의 돈줄이자, 앞으로 오래 봐야 할 얼굴이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일일이 감정을 소모했다간 몸이 버티질 못했다.


 

"참! 매니저! 조금 전에 내 팬과 단둘이서 단란히 이야기를 나눴었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좀 물어봐도 괜찮을까?"


"별 이야기 안 했어. 무슨 이야기할 새도 없이 네가 끼어들었으니까."


"하핫,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숨기고 그래~ 자! 나한테만 이야기해 봐! 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건 스타의 본분. 어떤 사소한 잡담도 놓칠 수야 없지~" 


"별 이야기 안 했다니까 그러네. 그냥 같이 사진 찍자는 이야기를 한 게 다야. 듣기로는 TV에서 내가 은퇴하기 전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나 뭐라나. 뭐, 단순한 립서비스였겠지만."


"흐응·····."



 시답잖은 잡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운전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웬일로 조용해진 옆자리 승객이 별안간 생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휴대폰 줘봐."


"·····뭐?"

 


 그 너무나도 뜬금없는 발언에 머릿속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잠시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잠깐 휴대폰 줘 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잖아. 네 소중한 팬한테 찝쩍거릴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운전 방해하지 말고 잠이나─" 


"휴대폰. 줘 봐."


"어? 야! 야!? 지금 뭐 하는─!?"



 천적을 맞닥뜨린 야생동물이 그러하듯, 온몸의 털이란 털들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무심하면서도 담담하게 내게 답을 종용하고 있던 그녀가 느닷없이 자동차 사이드 브레이크를 굳세게 움켜쥔 채, 내 얼굴을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전 중이라, 그 표정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만일 저 소름 끼치는 얼굴을 룸미러가 아닌, 직접 두 눈으로 마주 봐버렸다면, 나는 운전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을 게 분명했으니까.



"휴대폰. 줘."



 심장을 옥죄는 듯한 최후통첩을 끝으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움켜쥔 손에 힘이 실리려 하는 것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알량한 허세 따위가 절대 아니라는걸.



"아, 알았어. 주면····· 주면 될 거 아니야·····. 호주머니 안에 있으니까. 마음대로 꺼내 보든가·····."


"·····."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어렵사리 허락을 내리자, 그녀가 내 호주머니 안의 휴대폰을 잽싸게 낚아채 갔다.


 

"후, 후우·····."



 격한 운동을 하고 난 뒤처럼, 숨이 거칠어졌다.


 드르륵드르륵.


 하지만 그녀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연락처가 개재된 화면을 미친 듯이 드래그 하는 것에 여념 없어 보였다.



"거봐·····. 아무것도 없지·····?"


"흐응·····."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전 보다 한결 가벼워진 호흡이 불현듯 차 안의 적막과 뒤섞였다.



"그렇네. 어제와 연락처 개수가 완전히 똑같아. 불순한 연락을 한 흔적도 없고. 미안. 매니저. 아무래도 내가 시답잖은 오해한 모양이야. 하핫!"


"·····."



 그녀의 말에 감정이 깃들자, 눈에 띄게 누그러진 주변 공기가 영하까지 내려간 체감 온도를 서서히 데웠다.


 

"슬슬 히터를 틀 계절인가·····."


"하핫! 그런가? 내가 느끼기에는 아직 먼 것 같은데? 헛! 어쩌면 오늘 받은 아기 고양이들의 사랑의 힘 덕분일지도!"

  


 넌지시 던진 말에 평소처럼 멍청한 답이 되돌아온 것에 남모르게 안도하며, 땀이 송골송골하게 맺힌 운전대를 애써 태연하게 고쳐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