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2)





인사를 마치고 루미아는 로스칼을 바닥에 질질 끌며 사라졌다.

뒤르켈은 골드가 든 바구니를 받지 않고 돌려줬다.

탐이 났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뒤르켈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장에서 그것을 배웠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뒤르켈은 자신의 아들 리온을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이쁜 아이더구나. 부모가 부자인 모양이야. 그런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내밀다니…”

“네.”

“친하게 지내거라.”

“네?”

“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구나. 이쁘고 부자고 거기다 성인 남자를 팰 정도로 건강하기까지 하니 신부감으로 딱이구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리온은 뒤르켈이 루미아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전쟁의 잔혹함을 두 눈으로 본 뒤르켈에게 아까 전 로스칼이 루미아에게 쥐어터진 장면이 마이너스가 아니라 오히려 플러스인 모양이다.

리온은 루미아가 껄끄러웠지만 말하지 않았다.

 

‘루미아가 날 강제로 덮친 건 말하지 않는게 좋겠어.’

 

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 *

 

 

 

정체불명의 부자 루미아 일행이 이곳 수온 마을에 온 지 하루가 지났다.

리온의 집은 마을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에 위치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풀과 나무밖에 없는 주변에 휘황찬란한 집이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잠을 잤더니 벌어진 하루 아침의 일이었다.

이웃집에 인사하러 왔다는 루미아의 말이 순간 이해가 됐다.

 

‘불가사의하다. 마법사라도 되는 걸까? 아버지가 늘 마법사는 조심하랬으니 주의해야지.’

 

하지만 그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미아는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제 집마냥 리온의 집을 두들기고 놀러왔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제는 문을 두들기는 것조차 귀찮은지 그냥 문을 열어젖혔다.

바로 지금처럼.

벌컥.

 

“리온! 오늘은 뭘 알려줄 거야?”

 

오늘도 화사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루미아는 들어오자마자 리온에게 들러붙었다.

여자애 특유의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빈대도 아니고…’

 

리온은 루미아가 화날까 두려워 말하지 않았다.

 

“글쎄. 이 근방에 있는 동식물들은 다 알려준 것 같은데….”

“또 그런다! 안 알려준 게 있을 거 아니야? 응? 알려줘. 알려줘. 알려줘.”

“하하하하! 그, 그만 루미아!”

 

루미아가 리온을 간지럽히자 리온은 항복했다.

 

“만세! 너무 좋아. 리온!”

 

루미아가 리온을 와락 안았다.

리온은 루미아의 스킨쉽에 많이 익숙해졌다.

 

‘그때도 느꼈지만 마치 세상 밖을 처음 나온 아이 같아. 자유롭고 호기심이 왕성해.’

 

리온은 루미아와 집 밖을 나갔다.

그리고 산중턱을 오르려고 했을 때 불청객들이 있었다.

십여 명쯤 되는 아이들이 마치 그를 기다린 것처럼 리온을 쳐다봤다.

몇몇은 루미아의 얼굴을 홀린 듯 쳐다봤다.

무리의 대장이자 촌장의 아들 알렉턴도 마찬가지였다.

알렉턴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리온을 쳐다봤다.

그가 인상을 쓰자 리온의 얼굴도 굳어졌다.

 

“또 혼자 논다 싶었더니, 언제 이런 애랑 놀고 있던 거냐? 리온.”

 

까까머리를 한 알렉턴은 또래 애들보다 덩치는 두 배는 컸고 힘은 세 배로 쌨다.

이 마을의 아이들은 무리의 리더로 모두 알렉턴을 인정했다.

리온만 빼고.

 

“대답 안 해? 또 줘터져보고 싶어?”

“아버지가 힘만 쌘 바보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

“뭐? 이 새끼가…!”

 

열받은 알렉턴이 리온의 배를 발로 강하게 찼다.

리온은 데굴데굴 산중턱에서 굴러떨어졌다.

 

“윽!”

 

리온이 배를 부여잡자 알렉턴의 아이들이 그 꼴을 보며 웃었다.

 

“하하하! 병신새끼. 저렇게 약해서야 어딜 남자 노릇을 한다고.”

“푸하하.”

“크크크.”

“호오. 이게 인간 아이들의 기싸움인가? 유치하고 보잘 것 없지만 제법 흥미롭구나.”

 

알렉턴은 속닥거리는 루미아를 보자 우쭐해졌다.

 

“거기 너. 저런 한심한 놈이랑 부대끼지 말고 우리랑 놀자. 그동안 저 녀석이랑 뭐하고 놀았어?”

 

루미아가 고개를 돌려 알렉턴을 쳐다봤다.

마치 방금 처음 본 것처럼.

 

“나 말인가? 리온과 동식물을 관찰했다.”

“뭐? 크크크. 하긴 저 녀석이랑 뭘 하고 놀겠어. 그렇게 한심하게 놀지 말고 우리한테 아니 나한테 와.”

“너희들은 뭘 하고 놀지?”

 

알렉턴은 자신만만히 말했다.

 

“우리끼리 병정 놀이도 하고 다른 마을 아이들이랑 싸우기도 한다. 물론 너처럼 연약한 여자도 어울릴 수 있다. 물고기를 잡거나 잠자리, 개구리를 괴롭히면서 놀기도……”

 

루미아는 알렉턴의 말을 끊었다.

 

“내가 연약하다고?”

 

알렉턴은 감히 자신의 말을 끊은 것에 대해 짜증이 났지만 루미아의 반반한 얼굴 때문에 그녀를 용서했다.

 

“그럼 너가 강하기라도 한단 거냐?”

“…음. 확실히 이곳에 와서 나는 약해졌다. 공기는 맑지만 역시 내 체질과는 어울리지 않는군.”

“뭐라는 거야?”

“넌 이름이 뭐지?”

 

알렉턴은 이 아름다운 소녀가 드디어 자신에게 관심을 갖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 마을을 대대로 관리해온 유서 깊은 가문이자 촌장의……”

“아니 그거 말고 네 이름이 뭐냐고.”

“…알렉턴이다.”

“알렉턴. 보아하니 네가 이 마을에서 가장 쌘 아이인 모양인데 맞나?”

 

루미아의 애기를 가만히 듣던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

 

“재 뭐라는 거야? 엄청 당돌하네.”

“여자만 아니었으면 대장이 쥐어팼을걸.”

 

뜨끔한 알렉턴이 얼굴을 붉혔다.

 

“닥쳐! 그래. 내가 맞다. 이 주변에서 나보다 쌘 애들은 없으니깐.”

“…그렇단 말이지.”

 

루미아는 어깨를 돌리며 팔을 풀었다.

알렉턴은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풋 나왔다.

 

“뭘 하려는 거냐? 설마 나랑 싸울……”

 

퍽!

분명히 언덕이었고 거리도 있었다.

하지만 루미아는 그런 상식을 벗어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다가가 알렉턴의 배를 가격했다.

알렉턴은 중력을 무시하고 산중턱을 공중부양하듯 날아갔다.

턱.

중간에 있던 나무에 걸려 날아갔던 알렉턴이 그제서야 멈춰섰다.

떼구르르.

알렉턴은 비탈길을 따라 제자리로 굴러왔다.

그러나 아이들은 알렉턴을 잡아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 어…?”

“이게 무슨…?”

 

벌레를 보면 까무러칠 것 같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소녀.

어른들도 힘으로 못 당해낼 것 같은 거대한 덩치의 사내아이.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은 거대한 힘에 의해 무너졌다.

아이들이 갖고 있던 규율,질서,상식도 무너졌다.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오직 리온만이 바닥까지 굴러내려오는 알렉턴을 잡아줬다.

알렉턴은 거품을 물고 기절한 상태였다.

 

“역시나 꽝이군. 그것보다 나도 약해졌네. 그래도 힘조절은 했는데….”

‘히,힘 조절을 했다고?’

‘새, 새로운 대장이다!’

 

루미아는 자신을 경외와 두려움으로 바라보는 무리들을 귀찮은 듯 말했다.

 

“난 너희들 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다. 그런 것들은 이미 질리게 했다. 저거 데리고 사라져.”

 

루미아가 손을 까닥이며 알렉턴을 가리켰다.

절대복종!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가 알렉턴을 끌고 달아났다.

루미아가 비탈길을 내려와 리온에게 말했다.

 

“리온 괜찮나?”

“으응. 괜찮아.”

“한심하군. 저런 녀석에게 당하다니 말이야.”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애당초 당하고 싶어서 당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리온이 풀이 죽자 당황한 건 루미아였다.

 

”아,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맞긴 한데 약한 건 죄가 맞지만 리온 탓이 아니다!“

“응….”

 

리온은 횡설수설하는 루미아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그 후 산길을 타고 관찰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흥이 날 리가 없다.

루미아는 계속해서 리온을 위로했지만 어설픈 화법과 거짓말 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모두 어그러졌다.

 

‘이 내가! 이렇게까지 달래주는데 아직도 풀이 죽다니!’

 

루미아는 심술이 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리온도 자연스레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르켈이 리온을 반겼다.

 

“어서 오거라. 지금 저녁 차리고 있으니 기다리거라.”

“아버지. 저 오늘은 배가 안 고파서 먼저 잘게요.”

“응? 그, 그래. 그러려무나.”

 

사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배가 고픈 것 보다 알렉턴에게 맞은 부위 때문에 배가 더 아팠다.

 

-한심하군. 저런 녀석에게 당하다니 말이야.

 

루미아가 리온에게 말한 건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태생적으로 몸도 약하고 힘도 약하고 체력도 없다.

어른이 된다고 달라질까?

모르겠다.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울음을 꾹 참을려고 할 때였다.

 

-용사의 힘은 남을 지키려는 마음이 들 때 뿜어져 나온다.

 

“어?”

 

리온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귀에 때려박힌 듯한 우렁찬 울림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었다. 가로막힌 벽뿐이다.

리온이 어리둥절할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를 기다려라.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간악한 자들에게 목숨을 뺏기지 않게 인내하라.

 

[상태창을 습득했습니다!]

 

[상태창]

이름 : 리온

칭호 : 없음

상태 : <힘의 봉인><용사의 저주>

특성 : <상태창><신력>

 

리온이 눈을 깜빡이자 <상태창>은 꺼졌다.

다시 눈을 깜빡이자 상태창이 켜졌다.

여러 번 깜빡이자 이제 의도대로 키고 닫을 수 있었다.

리온은 어안이 벙벙했다.

귀청에 때려박힌 정체불명의 단어.

지금 보이는 상태창의 단어.

 

“내, 내가 용사라고…?”

 

리온이 작게 읊조렸지만 그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 * * * *

 

 

 

교회의 왕국이자 성스러운 수도 카메르에는 수만 명의 신도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교회가 있다.

저녁 미사가 끝나자 신도들을 우르르 교회를 빠져나갔다.

정중앙에서 흰 사제복을 입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소녀이자 성녀인 세레나가 있었다.

그때였다.

 

“!”

 

세레나는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정리 중이던 사제들이 놀라 성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녀님.”

“혹시 신탁이 내려진 것입니까?”

 

세레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놀라게 했군요. 몸이 안 좋아서 기도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멀어져가는 사제들을 보며 세레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앞에는 거대한 석상 주신 로아스가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레나의 얼굴은 굳어졌다.

 

‘용사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을 밝히지도 찾지도 말라니… 용사의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 꿇고 기도했다.

 

“부디… 아무런 일이 없길… 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