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3)





마왕과 그 자녀를 제외한 지체 높고 강력한 일곱 명의 마족이 있다.

그들은 로아스 교에서 엄금한 칠죄종(七罪種)을 각각 하나씩 지배하고 있다.

사실 그들을 보고 로아스 교의 창시자가 교리를 만든 것이다.

 

교만(驕慢)시기(猜忌)분노(憤怒)나태(懶怠)탐욕(貪慾)식탐(食貪)색욕(色慾)

 

마왕의 딸이자 마왕이 봉인된 지금 현재 그녀의 아름다움과 강력함, 그리고 권위를 누를 수 있는 마족은 마계에 없다.

‘시기의 마족’이라 불리는 로스칼이 시종을 자처하며 루미아를 따라 인간계를 내려온 것은 태어났을 지도 모르는 용사를 죽임과 동시에 루미아의 마음에 들기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였다.

 

‘루미아님이 혹시 내 아이를 가지신다면!’

 

로스칼은 망상을 금방 지워버렸다.

곧 루미아가 있는 집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일주일만의 귀환이었다.

벌컥.

 

“저 로스칼, 다녀왔습니다!”

 

로스칼은 루미아의 기척을 느끼고 2층으로 올라갔다.

루미아가 의자에 앉아 뒷모습을 보이며 화로에 불을 쬐고 있었다.

로스칼은 그 고귀한 기품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루미아님! 제가 없는 동안 불편하시거나 아니면 제가 그립지 않으셨습니까?!”

“…….”

“…루미아님?”

 

루미아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아버지를 바라볼 때를 제외한 어떤 것이든 무기질을 쳐다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빛이다.

그 대상이 대마족 로스칼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착각인가? 평소보다 기운이 없으신 것 같은 느낌인데’

“왔느냐? 로스칼. 보고해라.”

 

로스칼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옆 마을 브르츠에는 총 9명의 신생아와 37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샅샅이 흝었지만 용사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음….”

 

루미아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항상 끼는 검은 장갑에 들린 것은 루비가 박힌 고급스러운 나침반이었다.

지침은 고장난 듯 동서남북으로 기이하게 계속해서 움직였다.

 

“주신 로아스가 우릴 방해하고 있군.”

“예?”

“용사는 이미 태어났을 거다. 아버님께선 곧 오백 년의 시련과 절망을 딛고 부활하실 테니깐.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루미아는 나침반을 바닥에 내던졌다.

나침반은 계속해서 삐걱거렸다.

 

“이 마을에 도착하고부터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이 꼴이 됐다. 이 주변에 있는 거다. 용사가 말이야.”

“…죽음을 각오하고 이 근방의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겠습니다!”

 

로스칼은 루미아의 마음에 들기위해 더 힘차게 말했다.

루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헛수고다. 아직까지 추론에 불과하니깐. 거기다 인계(人界)에서 10%도 안 되는 힘을 쥐어짰다간 얼마 못 가 일등 성기사 놈들에게 못에 꿰여 죽을 거다. 얼마나 허무한 죽음이냐?”

 

루미아는 소리없이 웃었다.

 

‘루미아님이… 나, 날 걱정해주시다니!’

 

로스칼은 감격에 찼다.

 

“루미아님!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울 수가…! 평생을 따르겠습니다! 아아!”

“네 방으로 돌아가 여독을 풀어라. 난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예!”

 

로스칼은 그 명령을 철저히 지키며 조심스레 자리를 빠져나갔다.

루미아가 한숨을 쉬었다.

 

“리온… 어째서 화를 풀지 않는 것이냐….”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

밟으면 죽을 것 같은 초라한 인간 아이 리온.

루미아는 그를 생각하면 용사를 생각할 때보다 더 애가 탔다.

 

‘…나는 이곳에 놀러온 게 아니다. 차후에 마계에 위협이 될 용사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야겠군.’

“후우.”

 

루미아는 자신이 오늘 몇 번을 한숨을 쉬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방으로 걸어갔다.

 

 

 

* * * *

 

 

 

“쿠울-”

 

달밤이 환한 새벽.

리온은 코를 고는 뒤르켈 몰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힘의 봉인>

주신 리오스가 용사의 힘을 봉인했다. 

 

‘내가 용사라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한들 어째서 그 힘을 봉인한 거지?’

 

리온은 문 옆에 놓인 랜턴을 줍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빛에 의존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때를 기다려라.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간악한 자들에게 목숨을 뺏기지 않게 인내하라.

 

신의 음성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헉… 내 목숨을… 헉…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이상했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힘을 봉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리온이 언덕을 다 오르자 이미 선객이 있었다.

 

“아.”

 

리온이 랜턴을 들었다.

나무에 기대 앉아 있는 루미아가 작은 불빛에 비쳐졌다.

언덕 밑에 보이는 마을의 전경은 횃불을 제외하고 모두 어두컴컴했다.

 

“리온이군. 잠이 안오는 건가?”

“으응….”

“미안했다.”

“어?”

“어?”

 

리온과 루미아는 서로 놀랐다.

리온은 이 우악스러운 여자아이가 순순히 사과할 줄 몰라서 놀랐으며 루미아는 자신의 입에서 ‘사과‘란 말이 나올 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 한없이 약한 미물에게 사과라니!

루미아가 급히 번복하려고 할 때 리온이 말했다.

 

“나도 미안했어. 루미아.”

“뭐?”

루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잖아.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괜히 내가 분해가지고 삐져있고… 그래선 안 됐었는데….”

“그, 그렇다! 네가 약해빠졌으니 순순히 인정했으면 됐을 터다!”

 

하지만 말과 달리 루미아의 얼굴은 순간 오만상으로 찌푸려졌다.

리온이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그 모습을 들키지 않아 다행일 정도다. 

 

‘멍청한 루미아! 그냥 솔직하게 받아줬으면 되는 거잖아!’

 

처음으로 자신의 화법을 인지한 루미아였다.

리온이 풋 하고 웃었다.

 

“하하하!”

“뭐, 뭐냐! 갑자기 왜 웃는 거지?”

 

리온은 랜턴을 옆에 내려놓고 루미아의 옆에 앉았다.

한 나무에 아이 둘이 기대기에는 좁았기에 서로의 어깨가 부딪혔다.

 

“솔직히 말할게. 난 네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어.”

“…이상하다고?”

“그야 그렇잖아. 맨날 검은 옷만 입고 다니고,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을 처음 봤다고 하고, 귀족 아이처럼 보이지만 평민이면서 어마어마한 부자기도 하고…” 

“그렇군. 네 말을 들으니 나는 확실히 이상한 것 같군.”

“아니야. 이상한 건 나였어.”

 

루미아는 랜턴의 작은 빛에 비춰지는 리온의 얼굴을 봤다.

검은 밤과 작은 불빛의 조화 때문일까?

하얀 머리칼과 자상한 그의 얼굴이 더욱 근사하게 보였다.

 

“넌 이상한 애가 아니야. 그냥 자유로운 거야. 물론… 상식은 배워야겠지만 넌 순수해. 악의가 없어.”

“…순수? 악의가 없다고…?”

“응. 넌 그런 애야. 확실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버지의 딸인 내가 순수하고 악의가 없다니! 마족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군!’

 

허나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귀여운 인간 아이. 한 번만 봐주겠다.’

 

루미아의 볼살은 히죽 늘어졌다.

리온은 그녀를 보지 않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지?”

“맞아. 내 밑에 너가 기대앉았지.”

“궁금해도 묻지 않았는데 누군가를 찾으러 이곳에 왔었다고 했잖아? 그게 누군지 물어봐도 돼?”

 

리온은 고개를 돌려 루미아를 바라봤다.

소녀와 소년이 서로 눈을 마주치자 무언가 용솟음쳤다.

꿈틀.

 

“루, 루미아!”

“잠깐만 있어 봐! 금방 끝낼 테니깐.”

 

루미아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리온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맞췄다.

리온은 저항하고 싶었지만 오늘 낮에 있었던 알렉턴을 떠올리자 바로 포기했다.

 

‘수, 숨 막혀!’

 

타액이 섞이는 진득한 입맞춤이 끝나자 두 소년,소녀는 가쁜 호흡을 내셨다.

서로 다른 의미로.

 

‘헉… 헉… 죽는 줄 알았네.’

“후후. 내 아버지도 날 이렇게 사랑해주시곤 하셨지.”

“그, 그렇구나. 부모님은 다른 곳에 계신 거야?”

 

리온은 다시 입을 맞출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죽었다.”

“…뭐?”

“내 어머니는 죽었다.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날 대신해 죽었다.”

 

리온은 루미아를 쳐다봤다.

열에 들뜬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분노를 무섭게 삭히고 있었다.

 

“내 아버지는 그 부상으로 긴 세월 주무시고 계신다. 끝없는 지옥과 고통의 멍울 안에서….”

“그, 그렇구나”

 

리온은 괜한 것을 물었구나 싶어 사과할려고 할 때였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왔다.”

“…루미아의 부모님을 해친 범인이 이곳에 있다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뭐 그런 거다. 놔두면 화근이 되어 우릴 덮칠 것이다. 그때처럼….”

 

리온은 루미아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그런 아픈 과거가 있었구나. 힘들었겠어. 루미아….”

“그래서 약한 건 죄가 된다. 리온.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가 약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놀리는 것이 아니다. 너만큼은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존재란 뜻이니깐.”

‘복수의 대상이 그만큼 강하다는 걸까. 루미아의 괴력이 쌘 것도 복수를 하기 위한 수련의 결과일지도….’

 

대화가 잠시 멈췄다.

리온과 루미아는 서로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무수히 많았다. 

리온은 몰래 그녀를 위한 소원을 빌었다.

 

‘루미아가 다치지 않고, 그녀의 소원대로 범인이 잡히길….’

 

그렇게 간곡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