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은 <탐색> 한대로 넓었다.

로안이 처음 내려온 계단은 지금 있는 위치에서 남동부 방향이다. 지금은 가장 멀고 길이 엇갈려 탈출구가 아니다.

북쪽은 가장 가깝지만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멀지만 비상 계단으로 추정되는 북서쪽 방향의 입구가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터였다….

 

“헉… 헉…”

 

털썩.

마지막 남은 경비병이 로안의 검에 찔려 쓰러지자 로안은 참은 숨을 내뱉었다.

앞뒤에서 들이닥친 경비병 무리를 처치한 것이 이번이 다섯 번째다.

얻은 열쇠로 문을 뚫고 복도를 달려갈 때마다 적과 맞부딪혔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이렇게 빨리 대응할 수 없다. 렌의 연금술은 가짜라도 진단에 오래 걸린다. 계획대로 꼬마와 접촉해 적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고 열쇠도 얻었다. 전속으로 달려 탈출하면 되는 문제였다.’

 

얼마나 많은 적들을 쓰러뜨렸는지 세기도 어렵다.

혼자라도 골머리를 썩을 만한 갑옷 무장의 경비병 무리들을 꼬마를 보호하면서 상대하느라 힘도 체력도 몇 배로 들었다.

 

“헉… 헉…”

‘어디서 정보가 샜지? 길드의 보안이 뚫린 건가? 아니면 설마…’

 

툭.툭.

지금까지 잠자코 로안의 등에 업혀있던 실바아가 어깨를 툭툭 쳤다.

 

“인간. 넌 상당한 실력자군.”

“무슨 애기를… 헉. 하고 싶은 거야? 너.”

“이만하면 됐다. 날 내려놓고 가라.”

 

실비아는 목을 감싼 팔을 풀며 등에서 내려왔다.

로안이 뭐라 말도 하기 전에 실비아는 말을 이었다.

 

“왜 억지로 날 구출하면서까지 고생하는 거지?”

 

로안은 엘프 소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마의 이름도 몰랐다.

 

“그건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꼬마야.”

“의뢰? 네 목숨과 저울질하면서까지 가치있는 일인가? 뭐 됐다. 난 여기 남을 테니 알아서 탈출해라.”

 

로안은 엘프 소녀의 눈을 살폈다.

그 공허한 눈에는 어떠한 희망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그런 눈이었다.

 

“이곳에 남으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냐?”

“알고 있다. 하지만 네 목숨에 기대면서까지 탈출하고 싶지 않다.”

“….”

 

로안은 엘프 소녀의 마음을 느꼈다.

인간의 추악한 일면만을 봤을 이 소녀가 지금 자신을 포기하고 탈출하라고 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꾸욱.

로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은 로안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인간과 괴물 사이에 존재하는 재능의 벽.

그것은 단시간 내에, 그렇다고 장시간이 지났다고 좁혀지는 간극이 아니었다.

 

‘하지만….’

“읏! 뭐, 뭐하는 짓이냐!”

 

로안이 억지로 엘프 소녀를 등에 업자 소녀는 놀라 아등바둥됐다

 

“네 목숨만 걱정 해라! 어차피 저들은 날 손끝 하나…”

“꼬마야. 이름이 뭐니?”

 

로안이 이름을 묻자 실비아는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

 

“…실비아 드레스아노다.”

“난 로안이다. 모험가가 된 지 6년이 됐고 나름 알아주는 A급 모험가지.”

“지금 무슨 애길…”

“널 반드시 구해주겠다. 실비아.”

 

실비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

“그런 애기다. 넌 지금 내 남아있는 자존심을 건드렸다. 내가 아무리 형편 없어도 꼬마 하나 구출하지 못 할 정도로 약하진 않다.”

 

실비아는 로안을 비웃었다.

 

“이해하지 못하겠군. 여기서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거냐?”

“이해할 필요 없다. 어차피 널 구출하면 남남이니깐.”

 

로안은 결의를 다지고 한 손으로 품속을 뒤져 병에 담긴 갈색 알약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무겁고 어지러웠던 심신에 순간 활력이 타올랐다.

로안은 실비아를 등에 업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 벌써 절반을 지나왔다.

주변은 넓은 동굴로 변했고 이제 조금만 뛰어가면 입구까지 도달한다.

적들의 무리는 더욱 많아지고 강했다.

그들은 실비아의 목숨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독화살과 불화살을 날렸고 방패와 검을 겸병해 로안을 더욱 난처하게 했다.

온몸의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옷은 더럽게 해지고 피로 범벅됐다.

로안은 잠시 숨 쉬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을 떨며 품을 뒤졌다.

그리고 갈색 알약 두 개를 입에 털어넣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실비아가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라! 로안! 대체 뭘 먹는 것이냐?!”

 

로안은 숨을 죽이고 말했다.

 

“광전사의 알약이다.”

“…뭣?”

 

광전사의 알약.

마약과 더불어 인간이 개발하고 금지한 최악의 발명품 중 하나다.

몸의 피로를 모두 풀고 신체 능력과 감각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지만 대가는 수명과 고통이다.

실비아가 알고 있기론 이 약의 권장량은 1년에 1알이다.

그리고 로안은 방금 것까지 포함하여 벌써 10알을 먹었다.

실비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울먹였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내, 내가 로안을 자극해서 그런 것이냐…? 미, 미안하다. 정중히 사과하겠다. 지금 당장 속을 게워내야 한다! 로안! 그렇지 않으면…….”

 

수명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지만 약효가 끝나면 느끼는 속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대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차라리 불구덩이에서 뛰어드는 게 덜 아플 것 같다.라고

 

로안은 실비아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업혀라. 곧 입구다.”

“로, 로안….”

 

로안은 자신을 걱정하는 실비아를 쳐다봤다.

처음 만날 때 냉담한 태도를 떠올리면 지금은 마음을 연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따뜻한 엘프 소녀다.

이 구역질 나는 장소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소녀기도 했다.

로안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모험가는 언제나 목숨을 각오한다. 네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의뢰일 뿐이다.”

 

로안의 차가운 말에도 그 말이 마음이 아린 듯 실비아는 계속 울먹였다.

 

“미안하다… 로안. 미안하다….”

 

로안은 어쩔 수 없이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실비아의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는 피가 무던히 묻어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서로 개의치 않았다.

 

‘이 역겨운 곳만 탈출할 수 있다면….’

 

그때였다.

순간 강한 전류가 로안이 있는 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라왔다.

로안은 실비아를 끌어안고 급히 바닥을 뒹굴었다.

 

지이이이익-

로안이 있던 자리는 탄내를 풍기며 검게 그을렸다.

로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랜만이구나. 이런 장소에서 널 볼 줄이야.”

 

로안은 실비아를 뒤에 숨기며 걸어오는 상대를 노려봤다.

그는 금발과 잘 어울리는 껄렁껄렁한 옷을 입고 스스스 웃었다.

로안이 말했다.

 

“4년 만이군. 빅터르.”

“그 재수 없는 면상은 여전하구나. 꼴이 그게 뭐냐?”

 

빅터르는 로안을 보며 케케 웃었다.

동굴은 빅터르의 웃음소리로 울렸다.

 

“악연이지만 고향 친구지 않나? 못 본 척 보내줘라. 부탁한다.”

 

<전류의 마술사>란 이명을 가진 빅터르는 로안과 같은 고향, 같은 나이에 같은 A급 모험가였다.

만전의 상태에서도 결과를 자신할 수 없는 상대인데 심신은 광전사의 알약으로 정신을 붙잡고 있고 실비아도 있다.

빅터르가 풋 하고 웃었다.

 

“하하하하하! 평소의 너였다면 이런 일에 손을 댄 날 책망했을 텐데, 죽음이 두려운 거냐? 아니면… 아.”

 

빅터르는 실비아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 엘프 소녀가 네 취향이었구나. 그래서 소꿉 친구를 차버린……. 어이쿠!”

 

로안이 광속으로 달려들어 검을 내질렀지만 빅터르는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바닥에 전류가 튀었다.

전류를 다루는 능력으로 기이한 행동을 한단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상대해보니 굉장히 성가셨다.

로안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접근해 검을 내지르고 내질렀다. 

빅터르는 그것을 모두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말했다.

 

“신경쓸 게 있을 텐데?”

“!”

 

전류가 지반을 타고 올라 천장을 타며 로안을 지나쳤다.

그것은 로안이 직접 막을 것을 우려해 우회한 것이다.

로안은 서둘러 실비아에게 향했다.

 

쾅! 쾅! 쾅!

세 번의 굉음이 실비아, 아니 실비아를 덮친 로안에게 직격했다.

 

“큭!”

“로, 로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력했지만 광전사의 알약 덕분인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로안이 전격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실비아 대신 맞아줬다한들 전류는 몸을 통과해 실비아까지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지금부터였다.

거리가 벌려진 지금 상황은 이능력자에게 이보다 맛좋은 상황도 없다.

빅터르는 모든 능력을 끌어올려 전류를 난사했다.

그것은 위아래 좌우 할 것 없이 로안을 덮쳤다.

 

<쉴드>!

 

로안의 오른손 검지에 낀 마법 반지가 흰 광채를 뽐내며 계약한 술자의 주변에 배리어를 쳤다.

전류들이 배리어에 막혀 튕겨져 나가 꺼졌다.

빅터르가 비웃었다.

 

“소용 없다!”

 

빅터르는 그 힘이 무한한 듯 더욱 전류를 난사했다.

그러자 얼마 안있어 배리어가 깨지려 하자 마법 반지도 수명이 다한 듯 원형 전체에 금이 갔다.

 

<쉴드>!

 

로안이 중지에 낀 마법 반지를 발동했다.

새 배리어가 쳐졌지만 빅터르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저것이 마지막이다. 드디어 내 손으로 로안을 죽이는구나!’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을까.

늘 자신보다 잘났던 로안에게 깊은 열등감을 느꼈던 빅터르는 자신이 짝사랑한 소꿉친구 렌마저 로안을 사랑한다는 걸 알자 그를 증오하고 멸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우연찮게 자신이 경호에 선 노예 경매장에 로안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부터 이 그림은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빅터르는 전류를 계속 난사하며 소리쳤다.

 

“크크! 로안. 적이지만 인정한다. 이백 명이 넘는 경비병을 모두 처치하다니. 경이로울 정도다! 이 나조차도!”

 

로안은 태평한 얼굴로 빅터르를 쳐다봤다.

빅터르는 그 모습에 순간 맥이 빠져 전류를 난사하는 것도 멈췄다.

 

“뭐냐 그 얼굴은? 벌써 포기한 거냐?”

 

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빅터르를 향해 반지를 낀 중지를 치켜들었다.

빅터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이 씹새끼가!”

 

승부는 기울어졌다.

상대의 능력을 멸시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순간부터.

로안이 빅터르의 뒤에 나타나 팔꿈치로 그 목을 쳐버려 바닥에 찍었다.

 

“커,컥….”

 

빅터르의 놀란 표정으로 로안을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로안은 그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환영검객>이라 불리는 자신의 능력을 바보처럼 알려주는 사람은 어떤 모험가도 없을 것이다.

 

‘발동조건이 좀 까다로울 뿐이지.’

 

실비아를 보자 그녀 역시 놀란 눈으로 로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여전히 능력만큼이나 멍청해서.’

 

빅터르가 처음부터 여유 부리지 않고 방금처럼 전류를 난사했다면 로안에게 기회는 없었다.

로안의 힘을 실험하듯 근접전을 허용한 게 빅터르의 실책이었다.

 

‘전투에 사사로운 감정을 끼어 넣다니… 그 감정을 이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로안이 빅터르를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신경 끌려 했지만 알아 내야겠다. 이 경매장을 연 주동자의 정체와 이름이 뭐지? 빅터르.”

 

로안이 목을 압박하던 팔꿈치를 풀자 빅터르는 숨을 컥컥 들이쉬었다.

 

“켁… 켁, 컥.컥.”

“숨 쉬지 말고 대답해라. 다음 번에 대답하지 않으면 다리부터 자르겠다.”

 

빅터르는 허겁지겁 숨을 토하고 대답했다.

 

“끅… 컥… 만물 상단의 켁.켁. 주인이다. 켁.”

“만물 상단?”

“그, 그렇다. 켁. 날 고용한 건… 끅.”

 

빅터르는 기절했다.

억지로 숨을 참고 말을 꺼내려다 호흡곤란이 일어난 모양이다.

로안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짝.

저 멀리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돼지 탈을 쓴 하인이었다.

로안은 냉담한 시선으로 말했다.

 

“역시 너였나.”

“어서 오십시오. 손님. 축제는 즐거우셨나요?”

 

하인이 말하자 순간 실비아가 오한을 느끼고 머리를 감싸며 몸을 덜덜 떨었다.

로안이 이를 알아채고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저, 저 목소리다.”

 

실비아는 떠올리기 싫은 듯 말을 이었다.

 

“내,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날 납치한 자가… 바, 바로 저자다. 히, 히익….”

 

로안의 이성은 더더욱 차가워졌다.

 

‘이거 야단 났군.’

 

데미지는 누적됐고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났다.

병에 든 광전사의 알약도 바닥났다.

약효도 서서히 끝나가는지 가슴 속에서 불타오를 것 같은 고통도 야금야금 일어났다.

무엇보다 저 하인이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고 나타나지는 않았을 거다.

돌다리를 두드리면 두드렸지.

 

하인은 쓸모 없어진 빅터르를 보며 말했다.

 

“손님. 혹시 제 밑에서 일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뭐?”

“진지한 물음입니다. 쓸모 없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로안님처럼 휼륭한 기개과 재능을 가진 사람은 드무니깐요.”

 

로안은 하인을 쳐다봤다.

그 말이 진심인 것처럼 그 태도는 정중하고 진중했다.

그리고 패닉에 빠진 실비아를 보며 어떻게 할지 로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