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우… 쿠우…

 

“…?”

 

로안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실비아가 바로 옆에서 바닥에 수그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로안은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을 실비아에게 씌우고 상체를 일으켰다.

작고 허물어진 오두막이었고 낡은 화로에 모닥불이 아직 살아있었다.

 

‘이상하군….’

 

로안은 자신의 몸상태를 살폈다.

지금쯤이면 <광전사의 알약>의 고통이 정신을 뒤엎고도 남을 터인데 멀쩡했다.

겉에 있는 상처들도 온데간데없이 깨끗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하인에게서 살아남고 빠져나와 이곳에 태평히 누워있을 수 있냐는 거였다.

로안은 곤히 자고 있는 실비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쿠우… 으음.”

“일어나, 실비아.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실비아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깨어난 로안을 보자 해맑은 웃음이 나왔다.

 

“살아나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로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멍해주겠어?”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머릿속에 기억나는 건 내가 로안의 입에 파란 포션을 먹였다는 것과…”

‘파란 포션?’

 

모든 상처와 몰려와야 할 부작용들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것은 고대의 보물 ‘엘릭서’로 추정할 수 있다.

 

‘그걸 가진 사람은 하인이라고밖에 추정할 수밖에 없겠는데…. 하지만 대체 왜?’

 

그 귀한 보물을 단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썼다? 너무나 얄팍한 정답이다.

죽이겠다는 실비아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어? 뭐라고?”

 

실비아의 눈이 찌푸려졌다.

 

“사람 귀는 작아서 들리지 않는 게냐, 아니면 물어놓고 들을 생각이 없는 게냐!”

‘그러고보니 엘프족 문화에선 되묻는 게 엄청난 결례랬지.’

 

로안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해. 깬 지 얼마 안 돼서 머리가 멍멍하네.”

“그, 그렇게 말하면 내가 화낸 게 미안해지는 것이다….”

 

실비아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순수한 모습이 어린 아이다워 귀여웠지만 이제 인연은 여기까지다.

로안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길드에 실비아를 맡겨놓고… 이번 임무의 구출도, 주동자의 정체도 파악했으니 보고만 하면 모험가는 여기서 끝인가.’

 

임무의 난이도가 널뛰기되는 건 예삿일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으며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겪었지만 로안은 그것을 과거에 묻기로 했다.

이제 모험가는 관둔다.

그렇게 결의했다.

 

“다시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너랑 난 주종관계를 맺었다. 내 목에 있는 목줄과 네 약지에 낀 반지가 그 증거다.”

 

실비아의 말에 로안의 입이 벌어졌다.

실제로 오른손 약지에 갈색 가죽반지가 껴져 있었다.

그것은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았고 실비아의 목줄과 강한 결착만이 느껴졌다.

로안이 순간 숨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 대체 왜…?”

“나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너가 날 책임지면 되는 거다. 주인으로서 말이다.”

 

실비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닥불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나며 어두운 밤의 실비아와 로안을 불그스름하게 비췄다.

 

 

 

 

*******

 

 

 

 

다음 날 아침.

로안은 실비아와 함께 고향인 보랑고로 돌아왔다.

실비아의 외형은 척 보기에도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 엘프를 나타내는 긴 귀가 문제였다.

로안은 쓰고 있는 망토를 두건처럼 만들어 실비아에게 씌어 몸과 머리를 가렸다.

그럼에도 역시 눈에 띄었다.

 

“어머. 그 이쁜 아이는 누구니? 호호. 결혼했으면 결혼했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의뢰에서 구출한 애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

 

실비아는 낯선 아줌마가 경계되는지 고개를 훽 돌렸다.

실비아를 데리고 걸을 때마다 누구나 실비아에게 관심을 가지고 로안에게 말을 걸었다.

 

‘고향 사람들이라 죄다 안면이 있는 게 이럴 땐 귀찮군.’

“빨리 집에 들어가자. 로안.”

 

감정은 서로 일치했지만 로안은 그 말투가 살짝 거슬렸다.

 

“인간 사회에 들어왔으면 그에 맞는 예법을 따라야 해. 실비아. 내가 너보다 연장자니 존댓말을 하는 게 맞고 남의 집을 제집마냥 말하면…”

 

실비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음. 아무리 말해도 모르겠다. 빨리 가기나 해라.”

‘이 건방진 엘프 꼬맹이가!’

 

쿵!

로안은 화를 못 참고 실비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실비아가 머리를 감싸며 뭄을 굽혔다.

 

“아야!”

“따르라 하지 않을 테니 적어도 조용히 좀 따라와.”

 

로안은 실비아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실비아는 나머지 손으로 머리를 비비며 로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게 인간 로안의 모습인가? 모험가 로안의 독기 서린 모습과 영 딴판이군.’

 

그런데 그 모습이 굉장히 두근두근거렸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잠시 후 도시 외곽의 언덕 너머를 오르자 작은 집이 보였다.

로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비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A급 모험가면 돈도 많을 텐데 집이 왜 이렇게 작은 거냐?”

 

로안이 머리를 쥐어박으려 하자 실비아는 급히 머리를 보호했다.

로안이 한숨을 쉬었다.

 

“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 우선 그 거적대기부터 갈아입힐 옷 좀 가지고 올 테니깐.”

“음. 알겠다. 기다리마.”

‘아주 공주님 납셨군. 노예가 아니라….’

 

로안은 실비아에게 인간의 예법을 가르치는 걸 포기했다.

엘프란 종족은 뼛속부터 오만함과 도도함이 서려있는 것 같다고 로안은 느꼈다.

로안이 문을 닫고 나가자 실비아는 룰루랄라 흥얼대며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댕기며 집안을 구경했다.

와장창! 와장창!

 

“흥. 이렇게 허약한 유리 접시를 쓰다니. 우리가 쓰는 나무 접시면 이런 일도 없었다.”

 

실비아는 그래도 깨진 유리를 로안이 밟을까 걱정돼 구석에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갖고와 유리를 말끔히 치웠다.

실비아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후훗. 로안이 보면 이 몸을 칭찬하겠군.”

 

의기양양해진 실비아는 다시 집안을 뒤졌다.

그때 재밌는 걸 발견했다.

실비아는 의자를 타고 올라 서재를 뒤지다가 낡은 사진첩을 꺼냈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실비아의 눈이 둥그스름히 커졌다.

 

 

 

 

********

 

 

 

 

실비아의 옷을 사기 전에 먼저 들릴 곳이 있었다.

로안은 골목을 구불구불 지나 다 쓰러져가는 간판도 없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의 진열대에는 각양각색의 아티팩트들이 있었고 ㄱ자 테이블 안쪽엔 아름다운 가게 주인이 로안을 바라고 있었다.

어꺠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의 끝에 파마를 한 여자는 로안의 소꿉친구이자 연금술사인 렌이었다.

렌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임무는 잘 됐어…?”

“으응. 그, 그래. 네가 만들어 준 가짜 돈 덕분에 아이한테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어. 고마워.”

“…겨우 그거 갖고 뭘…로안이라면 어떤 것이든 뭐든 해줄 수 있다고…?”

“….”

 

로안은 이 소심한 소꿉친구 앞에 서면 그녀보다 한없이 소심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고백을 차버렸는데, 6년이 지나도 그 마음 그대로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렇다고 렌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렌은 대륙에서도 유명하고 실력 있는 연금술사다.

로안은 렌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걸 감사히,다행으로 여겼다.

 

킁킁.

렌이 로안에게 다가와 개처럼 냄새를 맡았다.

로안은 당황했다.

 

“왜, 왜 그래?”

“…옷에 너와 다른 인간의 피가 엄청 뒤섞였어…많이 힘들었겠어…근데 이상하네…상처 하나 없다니…그보다….”

 

렌은 오른쪽 팔의 생살을 쓰다듬었다.

로안은 렌의 부드럽고 차가운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엘프 여자…아니, 꼬마애 냄새가 나네? 구출한 아이는 엘프 소녀밖에 없었구나? 근데 왜 이리 짙지? 집 안으로 들인 거야? 설마?”

 

로안은 렌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렌은 정신을 차렸다.

 

“어머…내 정신 좀 봐…미안해…이런 내가 싫지…?나도 참…너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바뀌지 않네…역시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나봐…아마 노인이 될 때까지 평생 후회하면서….”

 

로안은 다시 폭주하는 렌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렌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꼬마애한테 질투나 하고…혹시 내가 질렸을까…?어떡하지…?죽어야 하나…….”

“…렌. 돌려서 말하지 않아도 돼. 이번에 신세진 것도 많으니깐. 질릴 때까지 꽉 껴안아. 참을 테니깐.”

“후후…그럼 마음껏…!”

 

렌은 양팔을 벌려 그의 몸을 꽉 껴안고 로안의 사소한 체취 하나하나를 맡으면서 흥분하며 몸을 떨었다.

로안은 깊은 한숨을 속으로 쉬었다.

 

‘후우….’

 

겉보기에는 눈에 뜨이는 미녀지만 속은 망가졌다.

굉장히 소심하고 굉장한 변태며 냄새에 아주 민감하다.

그래도 소꿉친구다. 신세를 많이 진 연금술사기도 하고.

로안은 렌이 만족할 때까지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는 걸 참으며 속으로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는지 로안은 셀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