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소동이 지나고 간단한 식사 후 로안은 실비아를 욕실에 데려갔다.

로안은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거대한 원형 통에 바가지를 담고선 실비아의 머리에 부었다. 

작은 의자에 앉은 채로 로안에게 등을 보인 실비아가 놀랐다.

 

“아뜨!”

“뜨거워?”

“아, 아니다. 따슨 물이 원체 오랜만이라….”

 

자세히 보니 실비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로안은 스펀지에 비누거품을 내고 조심스레 실비아의 작은 어깨부터 쓱쓱 쓸었다.

거칠게 하면 피부가 쓸릴까 걱정될 정도로 보들보들했다.

 

‘애라서 그런가? 그 고생을 겪었는데 말랑말랑하군.’

“흐, 흐아….”

 

실비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가누지 못하자 로안이 어깨를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너무 좋다. 몸이 녹을 것 같다.”

“호들갑은.”

 

로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펀지로 문지르고 다시 물을 끼얹었다.

검정색 구정물이 하수구로 들어갔다.

 

“아! 상쾌하다. 후후.”

“더 씻겨줄게.”

“아니다. 이번엔 내가 로안을 씻겨주겠다. 근데 그건 뭐냐?”

 

실비아는 로안의 하체를 가린 흰 수건을 가리켰다.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뺏으려하자 로안은 그 손길을 놓치지 않고 막았다.

 

“이것도 인간의 문화인가 하는 것이냐?”

“뭐, 그렇지.”

“참 이상하군. 목욕하는데 수건으로 가리다니.”

‘…너가 애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씻겨주겠다는 것도 자칫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욕실을 누가 엿보진 않겠지만….

로안은 실비아를 다시 한번 씻기고 말했다.

 

“감기 걸리니깐 수건으로 물기 다 닦고 쉬고 있어. 가져온 속옷이랑 옷 입고.”

“응. 알겠다.”

 

실비아가 나가자 로안은 남은 원형통에 몸을 담갔다.

핏물과 진흙물이 꾸덕꾸덕 나왔다.

 

‘다행이군. 물을 더 받아놔서.’

 

물을 담가놓기만 해도 일정 온도로 끊이는 이 원형통은 편리한만큼 상당히 비싸다.

로안이 다른 원형통에 물을 받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흑.

“?”

 

순간적이지만 미세한 소리에 로안은 좌우를 돌아봤다.

후다다다닥.

실비아가 달려오며 욕실 문을 열었다.

 

“로안! 옷 사이즈가 조금 큰 것 같은… 어…….”

 

실비아는 몸을 일으킨 로안의 한 지점에 동공이 집중됐다.

로안이 말했다.

 

“실비아. 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 어. 미, 미안하다. 하하…. 음. 내가 인간을 너무 얕봤군.”

“뭐라고?”

“아니다. 빨리 씻고 와라! 하, 할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다.”

 

탁.

실비아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로안은 아까 전 소리가 들린 쪽을 떠올리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좌측 구석쯤에 자세히보니 작은 구멍이 있었다.

 

“뭐지? 쥐였나?”

‘어쩐지 바람이 좀 새는 것 같더라니.’

 

로안은 구멍을 막고 못 씻은 몸을 마저 씻었다.

 

‘의뢰를 마치고 씻을 때가 제일 행복해. 이것도 마지막이지만.‘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며 로안은 욕실을 나와 침실로 걸어갔다.

 

“실비아?”

“왜 부르지?”

 

침대엔 로안이 사준 옷으로 갈아입은 실비아가 하나밖에 없는 베개를 베며 로안을 히죽 올려보고 있었다.

로안은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짜증이 순간 솟구쳤다.

 

“소파에 네 잠자리를 만들어놨잖아. 왜 여기 있는 거야?”

“같이 자면 안 되는 건가?”

“당연하지. 이 좁은 침대에 너랑 어떻게 같이 자냐?”

“흠…. 그도 그렇군. 알겠다.”

 

실비아는 껑충 내려 로안을 스쳐지나갔다.

로안은 실비아의 입이 삐죽 나온 걸 보고 실망한 걸 알았지만 투정을 다 받아줄 수 없는 노릇이다.

같이 산다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가 필요하다.

로안은 그렇게 배웠다.

 

‘소등 해야겠군.’

 

로안은 소파 위 이불 속에 얌전히 들어간 실비아를 보며 곳곳에 켜진 전등을 껐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한스 씨한테 받을 돈이 30골드. 경매장에서 나온 액수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낮군. 목숨값에 비해서도.’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적은 돈을 벌기 위해 경매장의 경비병들은 목숨을 버렸다.

돈이란 그런 것이다.

가진 사람은 사자탈 남자처럼 펑펑 써대도 무한히 샘솟는다.

없는 사람은 목숨을 바쳐야 돈을 번다.

이게 인간 사회다.

 

‘이제 잘 저축해야지.’

 

로안의 머릿속에 깨진 골동품이 아른거렸다.

그 충격은 당분간 지속될 모양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때 살아남은 게 이상하단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이 겹쳐지자 밤은 깊어져갔다.

로안은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저벅저벅.

 

“로안…. 자고 있는데 미안하다…. 도저히 혼자 못 자겠다. 흑흑.”

“…….”

 

탁자 위의 전등을 키자 문을 연 실비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꿈에서 부모님이 나왔다.…. 혼자 살아남은 날 보며 저주했다…. 흑흑. 난 살아남으면 안 됐던 건가….”

“그럴 리가.”

 

로안은 얼른 일어나 실비아를 부둥켜 안았다.

그녀를 위로하며 등을 토닥이자 어깨가 더욱 들썩였다.

 

“흑흑. 흑흑흑흑….”

“혼자 자긴 힘들겠네. 비좁지만 괜찮겠어?”

“으응…. 흑흑. 미안하다. 흑흑.”

 

로안은 실비아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

서로 부둥켜 안아야지 떨어지지 않고 딱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로안의 옷은 눈물로 군데군데 축축해졌다.

실비아의 금발을 쓰다듬으며 로안이 말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네. 난 애초에 부모 없이 자라서….”

 

움찔.

실비아의 어깨가 놀라자 로안은 괜찮다며 실비아를 진정시켰다.

 

“없는 사람은 애초에 가진 적이 없으니 나처럼 그 상실을 이해하지 못해. 우스운 애기지만 살아남은 걸 감사히 여기라고밖에 말 못 하겠네.”

“그런가….”

“그래. 살아남은 건 감사한 일이야. 원래 내 의뢰는 네 구출이 아니었어. 널 비롯한 아이들을 구출하는 게 의뢰였지.”

“아이들…?”

 

실비아는 로안을 올려봤다.

아직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있었다.

 

“그 하인이 말하더군. 경매장에 오기 전에 인간 아이 16명이 이동 중 사고로 모두 죽었다고.”

“…뭐, 뭐?”

 

실비아의 놀란 어깨를 로안은 강하게 움켜쥐었다.

움켜쥐지 않으면 사시나무 떨릴 듯 떨릴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네 부모가 하인 일당에게 죽은 것도, 이름 모를 불쌍한 아이들이 사고로 죽은 것도 모두 비극이다. 하지만 실비아. 그 비극 속에 파묻혀있으면 영원히 묻혀 있을 뿐이야. 그것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

“난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말이야. 하지만 그런 재능은 신이 허락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모양이야. 사실상 의뢰 실패였으니….”

 

로안이 고개를 숙이자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로안은 강하다…. 로안이 아니었으면 난, 난….”

“난 괜찮으니 벌어지지 않은 일은 억지로 떠올리지 마…. 그래…. 비극을 이겨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그 비극에 도망가는 것도 한 방법이야….”

“로안…?”

 

실비아는 말을 마치고 정적에 휩쌓인 로안을 보며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불안감에 심장이 고장난 것 마냥 덜컹덜컹 뛰었다.

로안이 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실비아. 너한테 처음 애기하는 거지만 난 모험가를 관둘 거다.”

“그, 그래?”

 

실비아는 어째선지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로안의 말은 차가웠고 정리를 마친 듯 보였기 때문이다.

 

“길드 지부장이 돌아오면 의뢰 보고를 할 거야. 그땐… 너와의 인연도 거기까지다.”

“뭐… 뭐라고?!”

 

로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실비아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까지 놀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말할 예정이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다.

늘 그랬듯이.

 

“노예 계약은 렌한테 물어봐서 최대한 빨리 방법을 강구해……”

“안 돼! 절대 안 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실비아는 로안의 허리를 감았다.

마치 곰인형을 놓치기 싫은 것처럼.

실비아가 그럴수록 로안은 더욱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실비아. 억지 부리지 마. 애당초 널 구한 순간부터 인연은 거기까지인 셈이었으니깐.”

“안 돼! 안 돼요! 안 돼! 내가 싫은 거야? 내가 존댓말을 할 줄 몰라서…요…? 왜 날 버리려는 거야! 내가 로안이 아끼는 골동품을 깨뜨려서…? 내가 그 배만큼 어떻게든 벌어올게…. 제발, 제발 날 버리지 마! 로안!”

 

실비아의 말은 뒤죽박죽이었다.

로안은 그런 실비아를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실비아….”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앞으로 징징대지 않을게. 로안이 하는 말은 무조건 따를게. 아까 뛰어다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줘. 난 로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런가….’

 

지금 실비아에게 비극에게 도망치는 방법은 나 자신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째서 자신에게 의존성이 심해졌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자신이 실비아를 맡을 의무는 없다.

애당초 의뢰가 아니었으면 만날 인연도 아닌 셈이다.

 

“로안! 흑흑. 제발… 아무 말이나 해줘. 부탁이야! 흑흑.”

 

실비아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자 로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나중에 들킬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로안은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을 하며 실비아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작은 전등빛은 서로 껴안은 두 명을 비추며 밤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