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말이지만 프롤로그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게 실제 내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으으으으읍읍읍으!”

 

정신 차리고보니 나는 감금납치당했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을 압박하는 헝겊 느낌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입은 밧줄로 강하게 조여진 상태고 두 손과 두 발도 마찬가지다.

볼 순 없지만 느낌상 어깨와 허리 부분을 감싸는 밧줄이 등 뒤에 느껴지는 기둥에 바짝 묶여진 상황 같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거다.

맹렬히 돌아가는 생각 말고는.

 

‘씨발.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납치당한 거야? 돈도 쥐뿔도 없는 가난한 대학생인데. 씨발 뭐냐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업이 끝나고 저녁에 편의점 알바를 마친 다음 밤 11시에 집에 귀가했다.

마침 토요일 밤엔 맨유와 맨시티의 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왔었다.

그리고 TV를 키니….

 

‘맹구가 전반전에 3대0으로 지고 있었지. 개병신팀.’

 

홈에서 잡아줄거라 기대한 내가 병ㅅ…

아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곧바로 티비를 끄고 침대에 누웠었다.

그 다음. 초인종이 눌리고…….

 

‘어?’

 

이상하다.

여기서 기억이 끊겼다.

아무리 생각하려고 애를 써도 꺼진 티비 화면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씨발. 왜 안 떠오르는 거야.’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범인일까?

하지만 내가 문을 열어줬다면 상대의 강렬한 모습은 기억에 남아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병신 같은 팀이 쳐발리는 것만 기억에 남냐고. 시발.

 

‘아니야. 내가 문을 안 열어줬을지도 모르지. 그럼 상대가 강제로 열어제껴서 날 기절시킨 걸까? 하… 모르겠다. 기억도 안나고 왜 납치 당했는지도 모르겠고, 시발 남한테 원한산 일도 없고 돈 빌린 것도 없이 착하게만 살아왔는데. 씨발 이게 뭐냐고 대체.’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식은땀과 쿵쾅거리는 심장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내 몸의 생리적 반응이 더 확실히 보였다.

 

“우으으으으으읍!”

 

분명 누구냐라고 소리 질렀는데 이상한 말만 튀어나온다.

밧줄을 입에 묶은 효과가 정확하고 확실하다.

…시발.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터벅. 터벅.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여유롭게 내게 다가왔다.

그럴수록 내 심장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공포 영화는 제법 잘 봐서 강심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시발. 개무서워. 흑흑.’

 

마음속으로 장난스럽게 울어보지만 심각한 상황이 장난으로 변모할 리 없다.

다 큰 성인 남자를 기절시키고 납치할 정도면 적어도 우락부락한 남자임에 틀림 없다.

당연히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아니 잠깐만….

 

‘이거 인신매매 아니야? 돈 없는 대학생을 납치할 리는 없잖아. 가진 건 건강한 몸뚱이 말곤 없으니깐… 헉…. 지, 진짜인 것 같은데…?’

 

몸이 덜덜 떨렸다.

전신에 식은땀이 축축 젖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날 납치한 상대는 여전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구둣발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울리는 걸 보아하니 여긴 실내인 모양이다.

불이 켜져있는지 모르지만 켜져있다면 분명 덜덜 떠는 날 보고 비웃고 있을 거다.

 

‘시발. 비웃건 말건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아직 여자 손도 못 잡아봤는데….’

 

전역하고 열심히 사는 대학생에게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절망에 빠진 내 앞에서 걸음이 턱 멈춰졌다.

그러자 끔찍한 생각에 도달한 나는 반사적으로 울부짖었다.

 

“우으으읍! 우으으으으읍읍읍읍읍읍!(살려줘! 살려만 주면 뭐든 할게!)”

“…진짜?”

 

이럴 수가.

상대는 내 정체불명의 외계어를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청아한 목소리였다.

즉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날 납치했다는 거다.

그것도 꽤나 젊은 것 같은 여자가.

잠깐만…. 이 목소리 내가 어디서 들었지?

 

“아니. 역시 못 믿겠어. 넌 납치 당하고도 여전하구나. 지키지 않을 약속만 남발하고….”

 

목소리는 스산하고 날카롭고 차가웠다.

내용만 보면 날 아는 사람 같지만 여친은커녕 여사친도 없는 모쏠도태아싸찐따남……그냥 모쏠남자가 젊어보이는 여자와 약속같은 걸 할 리가 없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역시 죽여야겠어.”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날카로운 무언가가 파공음을 내며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

 

뺨을 스친 것은 칼인 모양이다.

입을 막던 밧줄이 스르륵 풀어지자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됐지만 대신 뺨이 아렸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죽음의 위기에 내 멘탈은 더 박살이 났다.

입을 막는 밧줄이 풀어졌건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죽이기 전에 답을 들어야겠어.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대체 뭔 소리냐고 씨발년아.’

 

답답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방금 이 여자는 내 말에 혹하지 않았는가?

잘만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약속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지.’

 

말 한마디 잘못 하면 목이 날아갈 판이다.

약속이 무어냐고 물으면 안 그래도 화가 잔뜩난 상대를 자극할 게 뻔했다.

나는 최대한 짱구를 굴리며 늦지 않게 대답했다.

 

“구, 군대에 갔었어. 그래서…”

“헛소리. 입대 전부터 4년이나 지키지 않았잖아? 유언은 그게 끝이야?”

 

이 년은 다혈질이 분명하다.

아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거나 내 목젖을 그것으로 툭툭 치며 당장이라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4년 전? 4년 전이면 고1이잖아. 내가 그때 약속한 게 뭐가 있지? 여자랑 내가 뭔 약속을 했냐고 시발.’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인슈타인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살기 위해 머리가 맹렬히 굴려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툭. 툭.

내 명을 재촉하듯 계속해서 이 년이 내 목젖을 친다.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면 피를 뿜고 죽는 그림이 그려졌다.

약속! 씨발 내가 고1때 한 약속이 대체 뭐지? 대체 뭔 약속을 했길래 이 싸이코같은 년이 납치해서 날 죽이려는 거냐고.

생각해. 생각해내 제발 이현수!

 

‘아… 설마?’

“하아. 적어도 변명이라도 듣고 죽이려 했건만.”

 

이 년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날 납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결론을 바로 대답해야 한다!

 

“혹시 asuka님이세요? 제 소설에 댓글 달아주시던…….”

 

쨍그랑.

칼이 붕붕 날아가며 내 옆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년 시발 나 진짜로 죽이려고 한 거야?

 

“어, 어떻게….”

‘씨발. 진짜였네. 아니… 애 진짜 또라이 아니야?’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소설에 재능이 있는 줄 알고 중2병도 아닌 고1 병을 소설에 쏟아부은 남자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제목이 「얀데레녀에게 사랑받기」였을 거다. 아마.

 

“asuka님. 그… 연중한 것 때문에 저 지금 납치한 거예요…?”

 

조심스럽지만 약간 화난 어투가 섞였다.

그런데 이 년은 내가 자신을 알아봤다고 생각해서일까?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작가님… 어, 어떻게 저인 줄 아셨나요…?”

 

어떻게 알긴.

내 소설에 유일하게 매화마다 댓글 달아주는 사람이 너였는데.

좌절만 남은 연재 도전기에서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 이것밖에 없다.

이거라도 기억에 남아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제가 연중하면서 너무 미안했던 게 asuka님이었거든요….”

 

그러자 납치범이 약간 울먹였다.

 

“그, 그랬어요? 제 댓글에 아무런 답글도 안달길래 기억도 못 하실 줄 알았어요….”

‘야이 미친년아. 매 화마다 댓글을 최소 100개씩 다는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답글을 달아.’

 

참자. 비록 날 납치하고 죽이려한 싸이코납치범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니깐.

 

“근데 왜 안 돌아오셨죠…? 재정비하고 반드시 돌아온다고 공지해놓고…. 그것만 믿고 그때부터 매시간 매일 밤마다 계속해서 작가님 글만 새로고침 했는데요…….”

 

목소리가 다시 스산해졌다.

말투는 존대로 바뀌었지만 내가 험악해진 추억을 자극한 탓이다.

손발은 여전히 묶여있고 멀리 떨어진 칼은 다시 주우면 된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지금은 목숨도 구할 수 있다.

 

‘뭐라 말하지? 그냥 족같아서 연중했다고 하면 분명 칼로 찌를텐데….’

“…작가님? 왜 말이 없으시죠…?”

‘에라 모르겠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하고 근엄한 자세를 취했다.

 

“이거 좀 기분 나쁜데요. 기다리게 한 건 분명 죄송하지만 소설 놓은 건 아니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계속 소설 쓰고 있었고요.”

“…네?”

“제가 좀 완벽주의자라서요. 갈아엎고 갈아엎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요.”

“…그 말씀은 연재 준비를 여태껏 하셨다는 건가요…?”

“네.”

 

그럴 리가.

약속 따위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연중튀 작가다.

하지만 살려면 뭔 말을 못하겠는가?

아니 애시당초 연중했다고 납치한 이 년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해야 할 범법자가 아닌가?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이 현실이 슬펐다.

 

‘풀려나기만 해봐라. 바로 경찰서 가서 신고 박는다. 아이디도 기억하고 있으니깐 추적도 될 거다. 씨발년.’

“…….”

 

그 말을 한 직후 납치범년은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됐는지 목소리에 생기가 묻어나왔다.

 

“그 말, 믿겠어요. 작가님.”

‘아싸!’

“집에 노트북이 있는 걸 봤는데 그걸로 집필하신 거죠? 가져올게요.”

‘뭐?’

 

거기에 야동밖에 없는데요.

 

“정말 소설이 쓰여졌는지 확인되면 풀어드릴게요. 그리고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그에 맞는 보상도 부족함 없이 다 해드릴게요. 정말 제가 괜히 오해했네요. 역시 믿고 있었어요. 작가님.”

 

아니 씨발 거기에 야동밖에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