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내 교수실로 돌아와서는 지금까지 미뤄둔 고민에 빠진다.


대체 왜 내게 면담을 요청하지? 뭘 물어보려는 거지? 얀국 그룹의 영애가 어째서 내게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어째서 그녀 같은 이가 우리 대학에 입학했지?



"대체 왜 총장은 또 이리 조용했던 거야? 실적에 목숨 거는 그 인간이라면 이런 일로 절대로 조용할 수가 없는데."



총장은 어떻게든 학교의 순위를 올리겠다고 눈이 시뻘개지던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이런 일에도 이토록 조용할 수 있다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 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정말 상상 이상의 통제력이 뒷따라야한다. 


즉슨, 이미 그 상상 이상의 통제력이 확실하게 작용했다는 소리다. 분명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모종의 거래, 혹은 입막음이 있었겠지.


가장 이야기가 되는 가정을 떠올리니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무리 굴지의 재벌가의 따님이라지만 한 명의 학생이 대학, 그것도 나라에서 꽤 알아주는 대학을 완전히 휘어잡았다는 말이 되니까.


이어지는 생각이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만약 그렇다면....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남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현대 사회의 공주님이시다. 그런 공주님이 일부러 일개 대학 하나를 아예 장악해가며 입학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목적이 학력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흥미가 아니라면 말이다.



"설마....아니겠지."



지극히 개인적인 흥미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얀순 양의 눈빛이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던 그 눈빛, 마치 일생일대의 목표를 눈앞에 둔 사람이 보여줄 법한 멀어버린 것 같은 눈빛.


그 맹목적인 시선은 무서울 정도로 분명하게 날 향했다.



"허어억...."



기억 속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버린 그 순간을 떠올리니 갑자기 숨통이 턱 막힐 정도로.


본능적으로 회피하려고 든다. 어차피 소용은 없지만.


똑, 똑, 교육을 받았다 싶을 정도로 공손하기 공손한 인기척이 들려온다. 분명 예절의 극치이지만, 내게는 저것이 그저 감당할 수 없는 전조로만 느껴졌다.


다시금 숨이 턱턱 막힌다. 하지만 그런 변명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피할 수 없었기에 나는 말을 더듬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답했다.



"들....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대체 누가 교수이고, 누가 학생인 걸까, 그런 자괴감마저 들 정도로 방문자의 행동거지는 완벽했다.


순간, 지금 내가 앉은 의자에는 내가 아니라 얀순 양이 앉아있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하게 될 정도로.


나도 모르게 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떨어뜨렸다. 삐걱이는 의자 소리가 분위기에 초를 친다만, 그 불상사에 동요하는 건 오직 나 뿐이었다.


정작 제일 당황해야 할 얀순 양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이미 다 알고 있기라도 한 건지, 아무튼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평정을 유지했다.


결국 나만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흠, 흠, 어서오세요, 얀순 양. 아, 서있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



손님용으로 비치된 의자 중 제일 좋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일 좋은 의자라고 해도 지금까지 이런 의자랑 비교도 안될 최고급 의자에 앉아왔을 얀순 양에게는 딱히 감흥이 없을 테지만.


아무튼 내 권유에 얀순 양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내가 권한 제일 좋은 의자가 아닌, 제일 허름한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얀순 양, 그 의자는 그리 좋은 의자가 아닌데요? 안 불편한가요?"


"아, 죄송합니다, 얀붕 교수님. 


하지만 면담 같은 걸 할 때에는 상대방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교수님께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만약 불편하시다면 다른 자리로...."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뜻이 있었다면 부디 얀순 양이 원하시는 대로 편히 앉아주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말하고 처음 고른 자리에 완전히 엉덩이를 붙인 얀순 양은 내게 시선을 향해왔다. 


그 뚜렷한 눈길에 완전히 꿰인 것처럼 붙잡힌 나는 한순간이라도 감히 한 눈을 판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나요, 얀순 양?"



나는 임용 면접을 볼 때보다 더욱 긴장한 채로 얀순 양을 마주했다. 이런 나와 다르게 일말의 긴장조차 하지 않은 얀순 양은 담담하게 하려던 말을 꺼낸다.



"지극히 개인적인 용건입니다. 얀붕 교수님, 혹시....아직 혼자이신가요?"


"네, 아직도 혼자.......예?"



순간, 내 모든 감각을 의심했다. 


하도 여자랑 못 사귄 끝에 드디어 미쳐버린 건 아닌가 하고, 확신에 가깝게 의심했을 정도로.


하지만 이어지는 얀순 양의 말이 내 의심이 의심이 아닌, 지금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임을 입증했다.



"아직 독신이신지 여쭸습니다. 사귀거나 만나고 계신 분은 없으신 게 맞나요?"


"얀순 양, 물어보신 대로 제가 독신이긴 한데...그게 왜 궁금하신 건지..."


"아, 역시 그렇죠."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듯한 묘한 말투가 내 신경을 자극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러니 분명 물어볼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올 법도 하건만, 요상하리만치 입은 딱 붙어서 좀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마치 아직 내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혹시...저, 기억 안 나세요?"



그렇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얀순 양은 자기 할 말을 자유롭게 꺼냈다.


어차피 질문은 안 나오니 나는 내가 받은 질문에 답하고자 열심히 기억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봐도 내 기억 속에 얀순 양과 같거나 비슷한 인물을 만난 적은 없었다.


이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걸까? 얀순 양은 날 보고 아쉬워하듯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서 운을 뗐다.



"역시 그럴 꺼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말로 그러니까 살짝...아쉽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알아주시면 되니까요.


그럼 먼저....혹시 10년 전 쯤에 뭘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얀붕 오빠?"



얀순 양이 날 부른 호칭이 기폭제가 되어 기억이 떠오른다.



"너구나...?"



척 봐도 돈이 많을 것 같은 집에 가정 교사로 고용된 적이 있었다. 


돈은 많지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허전하기 그지없던 집의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그저 살아있으니까 존재하는 것처럼 있던 어린 여자 아이가 내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어린 여자 아이는 정말로 내가 가르쳐야 하는지 의문마저 들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그런 여자 아이는 어째서인지 늘 아쉬운 점수를 받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어려운 문제는 다 맞히면서, 정작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는 틀리는 것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애의 어머니, 내 고용주인 그 사모님은 전혀 몰랐다. 


내 이전에 거쳐간 가정 교사들도 몰랐고, 나 또한 우연이 따라주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쓰레기 통에 박혀있던 구겨진 시험지를 보지 못 했더라면 말이다.


일찌감치 짐작하긴 했지만, 그 시험지의 존재는 내 짐작이 헛다리가 아니란 걸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였고, 나는 여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대신 다른 걸 해줬다.


사실 약아빠진 마음으로 땡땡이를 친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똑똑하니, 겸사겸사 여자 아이랑 놀아주면서 돈은 타먹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여자 아이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결국 몇 달 뒤에는 잘릴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동화책을 하나 사갔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초등학생인 애한테 유아용 동화책을 읽어주려고 하다니 말이다.


글자는 눈보다 크고, 그림은 크레파스와 색연필의 질감이 그대로 녹아있고, 내용은 단순무식할 정도로 따스하고 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그녀에게 너무 유치했었을 그 이야기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처음 본 이래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던 그 표정이 동화책 속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밝고 환해질 정도로.


그저 여자 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던 미숙하고 냉랭한 목소리는 점점 생기있는 높은 음색을 띄어갔고, 틀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처럼 정형화된 몸짓과 동작은 불규칙성과 활발함이 더해져 다채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저 빛과 형태만으로 모든 것을 판독하듯이 굳어있던 눈빛은 자신의 주관과 감성을 더한 채로 이해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왕성한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기까지 하는 어린 아이다운 눈빛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무척 재밌었다. 기뻤고.


이유야 여러 가지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내가 그 여자 아이에게 제일 필요했던 일을 해줬다는 뿌듯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뿌듯함마저 느낄 정도로 여자 아이한테 다가가 놓고서, 정작 마지막까지 여자 아이의 이름을 몰랐다.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그 여자 아이의 어머니가 이름을 안 알려주셨고, 나도 그 아이를 이름이 아니라 너라든가, 얘라는 등의 호칭으로 부르는 것에 너무 익숙했었으니까.


그렇게 이름조차 모르지만 너무나도 가까이 다가갔던 그 아이와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떨어지고 말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땡땡이 친 게 들켜서가 아닌, 그 아이가 그제서야 부모의 눈에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이별에 그 아이는 어땠는지, 그리고 나는 정말로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여하튼 그리하여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끝까지 모른 채로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10년 만에 그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