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2편


"야.....얀순아....."



10년 만에 처음으로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을 불러봤다. 꼭 존재를 잊고 있었던 막힌 관이 시원하게 뚫린 것 같은 그런 청량함마저 느껴졌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해본 일에 감명을 받은 건 오직 나 뿐만은 아니었다.



".......네에, 얀붕 오빠."



그 여자 아이, 그러니까 얀순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무심한 표정을 깨뜨리고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하지만 난 거기서 위화감을 느꼈다. 


원래 아주 보고 싶어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난 시점에서 일단은 목표를 이뤘다는 충족감을 느껴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지금 얀순이가 내게 보이고 있는 감정에서 그런 편안한 느낌은 없었다.


꼭 원하는 대로 잘 흘러가는 과정을 확인하고 난 뒤의 안도감 같다고 할까, 아무튼 충족되거나 만족했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것처럼.


단순히 착각일지도 모른다. 착각일 것이다. 


하여튼 문득 이런 생각을 한 덕에 머릿속이 차가워졌고, 그 덕에 잠시 까먹었던 내 교수로서의 본분을 떠올리고 실수를 정정했다.



"아, 아아니, 미안, 얀순아. 아, 아니, 얀순 양.


아무리 반갑다고 해도 일단은 교수인 제가 제 위치도 깜빡하고서 학생을 대했네요.


실수를 저지른 점은 사과드립니다. 미안해요, 얀순 학생."



진심이라는 걸 보이듯, 고개를 살짝 숙여가며 그리 말했다.


아무리 옛날에 친했다고 한들, 지금 나와 얀순이는 교수와 학생의 관계다. 


무슨 이유든, 무슨 사정이든 상관없이, 학생을 대할 때 절대로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특히 얀순이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재벌가의 따님, 연애인들보다도 눈에 띄는 미모, 게다가 이미 실적으로 증명된 그 능력까지, 말 그대로 현대 사회의 완벽한 공주님이시다.


동시에 자극에 굶주린 미디어들이 제일 침을 질질 흘리게 하는 완벽한 대상이고.


그러니 얀순이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어쨌든 나는 일단 선을 그을 수 밖에 없었다. 


교수로서의 본분을 잊으면 안 된다는 책임 의식도 있지만, 얀순이처럼 아득한 차이가 나는 인물과 엮였을 때 뒷따라올 그 어마어마한 여파를 감당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도 한 몫 했다.


분명 얀순이도 이런 내 생각을 알아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그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혈하게 돌아가는 기업 쪽에서 이미 왕벽한 실적과 성과를 거둔 얀순이이니까.


아무리 돈과 결과로 돌아간다지만 결국 사업도 사람과 엮이는 일이다. 머리랑 눈치,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10년 만에 이름을 알게 되자마자 바로 이름으로 불러주신 건 정말 좋았어요."


"아하하, 그건...실수이긴 했는데, 그래도 얀순 양이 원한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런데 그 후가 조금 실망스럽네요."



웃으면서, 아니면 담담하게, 아무튼 좋은 분위기에서 일단 끝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끝날 수 있도록 살짝 기름칠을 할 겸해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래도 된다는 허락을 멋쩍게 웃으면서 하려고 했지만, 단 한 순간에 완전히 바뀐 분위기가 내 말문을 뚝 끊어버렸다.


말이 조금 실망스럽다고 하지, 정말로 '조금' 실망한 게 맞냐고 절로 묻고 싶어질 정도로 혹독해진 지금의 분위기가 말이다.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얀붕 교수님.


지금 현재 만나고 있거나 사귀는 여성 분은 없으시죠?"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깎듯이 말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뜨거운 것이 닿으면 얼른 몸을 빼고, 차가운 것에 부르르 떠는 것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당연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을까, 한편으로는 또 아니기도 한 모양이다. 내가 깎듯이 말하자 얀순이는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흥이 섞인 콧소리를 냈다.



"흐으응....."



꼭 음미하는 것 같은 콧소리, 확실하게 즐기고 있다는 걸 알려오는 저 소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눈을 마주칠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얀순이랑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얼마나 오래 얼어붙어 있었을까, 얀순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긴, 그렇겠죠. 그러지 않으면 안 되니까."



자동으로 얀순이가 아까 했던 말 중 하나를 떠올린다. 내가 아직 독신이냐는 질문에 답하고 난 뒤의 그 말이다.



[아, 역시 그렇죠.]



그 말과 거의 똑같았다. 다른 점은 그때는 좀 더 돌려서 말했지만, 지금은 내가 독신인 게 당연하다고 아예 못을 박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입 밖으로 박차고 나왔다.



"설마....."



얀순이는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의자가 밀려나고, 사람이 일어서고, 그 일어선 사람이 일부러 발소리를 내어가며 다가온다. 


또각, 또각


머릿속이 온통 저 발소리로 가득 찬다.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소음마저도 주의를 끄는 소품으로 재활용하며 다가온 얀순이의 존재감에 나는 거의 반죽마냥 짓눌려질 지경이었다. 


슬 숨쉬기가 힘들어져서 호흡이 느려질 때 얀순이가 소곤소곤 말을 꺼냈다.



"매칭 앱 서른 개, 맞선 열 두 번, 클럽 한 번, 이외에도 이런저런 자잘한 시도들.....아, 그리고 6일 전에 찾아간 그 예쁜 무당은 한 방 먹었어요. 설마 민간 신앙 같은 것까지 찾아갈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그때는 그 무당이 알아서 나자빠져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더라면.....기분이 차암 나빴을 뻔 했으니까요."



그동안 다 지켜봤냐고 묻는 것도, 놀라는 것도, 그래서 완전히 질려버리는 것도 너무 둔해빠진 반응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왜 이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싸늘하게 그리 묻는다. 알고 싶다는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계속 숙였던 채로 들 생각조차 안하고 있던 내 고개가 들린다.


얀순이가 내 턱에 갖다댄 손가락 하나 만으로 이렇게 들어올리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알아서 얀순이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는 걸까, 아무튼 저항감 없이 고개를 들어올린 나는 다시 한 번 얀순이와 눈을 마주쳤다.


얀순이는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꼭 흐뭇한 광경을 바라보기라도 한 것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미소의 대상은 분명하게도 나였고, 얀순이는 곧바로 그 이유를 내게 알려준다.



"귀여웠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너한테 찍힌 줄도 모르고 아둥바둥 허탕만 치며 좌절하던 내가?"


"제가 이렇게 점 찍어둔 줄도 모르시고 계속 다른 곳으로 튀어나가시던 오빠가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갖 감정은 다 드는데, 그걸 말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안 통할 것 같다는 불안감만 느껴졌으니까.


결국 얀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나중에 그렇게 느꼈던 거에요. 


처음에는 오빠가 자꾸만, 자꾸만 이상한 곳으로 새어나가려고 하시는 걸 보고 정말.......조금도 귀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얀순이는 여전히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하는 분위기는 꼭 얼음으로 만든 칼날을 입에 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벌하고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오빠가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또 허탕을 치시니까....제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자꾸만 고꾸라지는 모습이 뭔가.....귀엽더라구요?"



또 분위기가 급변했다. 입에 물고 있던 그 섬뜩한 얼음 칼날이 순식간에 녹아내린 것 같은 느낌으로.


이제서야 내 입이 열린다. 그간 머릿속을 돌아다닌 생각은 많았다.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다.


그런데도 참 우습게도 내가 뱉어내는 말은 고작 한 마디, 그것도 되게 뜬금없는 느낌이었다.



"난....네가....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하소연일까, 아니면 완곡한 거절인 걸까? 어찌 됐건 핵심을 찌르기는 찔렀을 것이다. 얀순이가 날 기다렸다는 것조차 내가 알 턱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얀순이의 행동이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얀순이는 그저 말 없이 그녀가 늘 들고 다니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보여주려고 했다.


이제 와서 떠오르는 것이지만, 얀순이가 뭔가를 꺼내려 한 저 가방은 꽤나 유명했다.


얀순이가 어디를 가든, 어떤 옷을 입든, 늘 저 가방을 가지고 다녔고, 그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 사회의 공주님께서 제 몸처럼 챙기고 다니는 저 가방의 수수께끼에 대해서는 정말 온갖 이야기가 나돌았다.


가장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추측부터 음모론이나 다름없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그 모든 추측 중에서 정확하게 맞은 것은 장담하는데 하나도 없을 것이다.



"쭉 기다렸어요."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내게 보인 얀순이가 그리 말했다.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약간이라도 망가지거나 더럽혀지는 걸 막으려고, 그 소중한 것을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온 신경과 힘을 다 쏟아부은 그런 차가운 목소리로.


그런 목소리가 나오게 만든 이유는 다름아닌 동화책이었다.


작은 가방 안에 딱 들어갈 크기의 그 빛이 좀 바랜 동화책은 내가 얀순이에게 제일 처음 읽어줬던 것이었다.


얀순이가 날 기다렸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랐다고는 이제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