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1.

지독한 어둠 속.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있었을까.

깨지 않는 악몽에 갇혀버린 채, 초점 잃은 두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던 정우는 메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해….’


그것은 누구를 향한 호소인가.

아니면 불티마저도 되지 못한 작디작은 희망을 좇는 간절한 기도인가.


모래성처럼 조금씩 붕괴하여가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는 정신을 느끼며, 정우는 흐릿한 두 눈을 깜박거렸다.


깨어나기 위한 모든 시도를 다 해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여기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 어둠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부터.

손가락을 꺾다 못해, 곤죽이 되도록 짓이겨도.

혀를 물어뜯어도,

현실이라면 곧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커다란 상처를 자신에게 입혀도.


절망스럽게도 그는 되돌아가지 못했다.

망가진 몸은 저절로 수복되었고, 피를 토할 정도로 하염없이 뛰었지만, 끝이라고는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포기해.


정우는 이 공간의 의도를 그렇게 생각했다.

전부 다 내려놓기를.

무너지기를.

자신의 그 모든 발악을 헛된 것으로 돌리고는 좌절하고 무너진 자신에게 담담히 그 하나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포기해.


‘싫…어….’


포기해.


‘싫어…!’


포기해.


‘절대… 싫다고…!’


그러나 격렬하게 거부한다.

내려놓으라는 유혹을.

포기하라는 종용에 억지로 고개를 돌린다.


자신이 보았던 그 충격적인 장면.

처음 이곳에 갇혔을 때, 보았던 어떤 화면 속의 장면이 정우의 가냘픈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은… 죽어도…! 죽어도 안 돼….’


그 장면은 저 현실 너머.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제 몸으로 자신의 행세를 하며,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는 그녀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정우는 죽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복수조차 하지 못하고, 이곳에 매몰되어 죽어버릴 자신이.

그것이 너무나도, 사무칠 정도로 분하고 원통해서.


그렇기에 악에 악을 쓰더라도 버텨서 돌아가야 했다.







..

.

다시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호해진 시간의 개념마저도 머릿속에서 서서히 흩어질 때쯤.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분명 혼자였을 이곳에서, 갑자기 그런 말이 들려왔다.


‘…이 목소린…?’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에, 누워있던 정우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혼란스러운 머릿속.

그 와중에서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에, 그의 눈에서 지독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정희수…!’


[당신은 원래대로 돌아올 거에요.]


[강지혁이라는 의사와 만나며 있었던 모든 일들은 잊어요. 당신은 그런 치료도 상담도 받은 적이 없어요.]


이어서 영문 모를 소리가 이어진다.

강지혁이 누구고, 갑자기 잊으라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원래대로?

원래대로라고?

이미 망가트리고 짓밟아버린 주제에?

무너뜨리고, 뒤틀고, 꺾어버린 주제에?!

그 말은, 격렬한 분노와 증오에 젖은 정우의 귀에 너무나도 선명히 들렸다.


‘정희수, 정희수, 정희수! 너 때문에! 너 때문에에에!!!’


그저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때.


‘…! 너어어!!’


찾았다.

조금 멀리,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그 가증스러운 웃음이.

자신과는 달리 저 행복해 보이는 표정 전부가.

너무나도 증오스럽다.


곧장 정우가 그녀에게 내달렸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그 결심이.

서슬 퍼런 기세가 두 눈을 통해 선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데도.


콰악!


기어코, 정우의 두 손이 그녀의 목을 힘껏 움켜쥐었음에도.


희수는 웃고 있었다.


뿌득-

뿌드득-


정우의 이가 감정과 함께 갈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온 힘을 다해 조르고 있는 목.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그 증오의 시선을 앞두고도,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더더욱 분노를 느낀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야. 너를! 너를! 나를 이렇게 만든 너를!’


갈라진 목으로 피를 토하며 외치는 정우의 울부짖음.

그 진심을 보고도 죽지도, 아파하지도 않던 그녀는.

힘을 꽉 주어 덜덜 떨리고 있는 그의 팔을 쓸며, 천천히 그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죽어! 죽어! 제발 죽어!’


[정우 씨.]


그 말에 고개를 필사적으로 젓는다.

안 들어.

안 들을 거야.

지껄이지 마.

빨리 죽어버려!

이 이상 나를, 나를…!


‘제발 나를… 놓아주라고… 제발!!’


이제는 증오를 넘어, 흐느끼며 오열하는 두 눈의 눈물을 닦아주며.


[…당신은 절대로 제게서 떠날 수 없어요.]


화사한 미소로,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아…’


그 끝을 보며, 정우의 정신은 점점 아득해졌다.

산산이 부서지는 어둠.

점차 다가오는 빛.

그것은 그토록 원하던 빛이었으나.

결국은 완성되지 못한.

그릇되고 비틀려버린.

새장 속의 빛이었다.














2.

짝-짝-


희수가 박수를 두 번 치는 순간.

과연 그 말대로 박수 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흐리멍덩하던 정우의 눈에 차츰 생기가 돌아왔다.

영문 모를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당혹에 젖은 두 눈.

현실과 꿈을 구분하기라도 하는 듯 제 몸 이곳저곳을 더듬고 감각을 깨우는 손짓까지.


정우의 그런 일련의 행동을 바라보며, 희수는 다소 긴장된 기색으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


시선을 느낀 것일까.

한참 동안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희수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원래대로 돌아온 정우.

그것이 과연 얼마나 원래대로 돌아왔는지는 모른다.

5년의 끝에 결국 자신을 포기해버린 때의 정우일지.

아니면 자신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가면을 쓴 시절의 정우일지.

어느 무엇이 되었든, 담담히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깊은 침묵.


어째서인지, 자신을 그저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희수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도저히 모르겠어.’


불투명함.

거짓된 모습도, 그렇다고 진실한 모습도 아닌 어딘가 흐려 보이는 눈.

누군가의 감정을 살피는 데 있어,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자신의 두 눈이 처음으로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다름 아닌 정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의 감정을 알아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희수 그녀에게 있어 큰 당황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침묵 속에 불안이 다가온다.

통하지 않는 그녀의 눈.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모습.

혼란에 혼란이 가중되어 조금씩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는 머리.

그런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 차츰 그녀의 숨이 가빠질 때 쯤.


“…하아.”


무언가 내려놓은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우는 놀란 희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안 도망칠게.”


“아-”


제법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포기하고 단념한, 그런 말투가 아닌.

조금은 긍정적인 것을 담은 그런 말.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에게 쌓인 것은 많겠지만. 마냥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잘 알겠으니까.”


어째서인지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흡… 으흡….”


“이미 쌓인 것은 제대로 터졌고, 이제 서로 아무것도 안 남았으니까… 이번엔 좀 더 제대로 쌓아보자고. 둘이서.”


그 말에 담긴 진정성에.

그 말에 담긴 따뜻함에.


희수는 천천히 울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애써 입을 열었다.


“네… 흐흑… 네… 정우 씨… 고마워요. 돌아와 줘서. 너무나도 고마워요. 으흐윽….”


드디어 둑이 터진 듯.

너무나도 깊게 쌓여있어서 퇴적되어버린 모든 것들이 드디어 쏟아졌다.

눈물 속에 섞여서.

계속.

계속.

닦아도 닦아도, 소매가 다 젖어서도, 아직도 남아있다는 듯이, 그것들은 물밀듯이 쏟아져나왔다.


서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녀.

그 모습을 보며, 담담히 미소를 지은 정우는 희수에게 다가가,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정우 씨, 으흐윽! 내가 흐끅! 내가 미안해요! 내가… 내가 다 망쳤어요! 내가. 내가…! 내 이기심에!”


“괜찮아. 괜찮아. 이제 다시… 다시 쌓으면 되니까.”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


담담한 그의 말의 위로가 얼마나 따뜻하게 다가왔는지.

희수는 오열하듯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그리 울었다.

그녀에게 있어 오직 회색뿐이었던 그 풍경.

그 풍경은 오늘, 드디어 색을 되찾았다.

아주 선명한 색으로.





-------------------------------------------------



그...예...오랜만....

간만에 쪄왔는데, 불타고 있어 여기...


너무 오랜만이라 까먹은 챈럼들을 위해 조금 설명하자면.

정우의 정신이 갇혀있던 곳은 A-03편에 있음.

그리고 저번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드리프트냐? 한다고 묻는다면.

전에도 얘기했지만, 해피엔딩은....아무래도 무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