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팔이 짤린 캄페스였다.

캄페스는 짤린 단면을 부둥켜 안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내, 내 팔이…! 끄아아아아악!”

“고통도 참지 못하다니, 한심하구나.”

 

노파가 이죽거렸지만 캄페스는 고통 때문에 듣지 못했다.

낯선 인물들의 급작스러운 등장에 반응한 건 브레몬이었다.

그는 바로 검을 빼들었고 신경 쓸 필요 없는 꼬마 두 놈을 제외하면 목표는 분명했다.

브레몬은 침을 퉷 뱉고 말했다.

 

“이런 산기슭에 노파 한 명이 살고 있었군. 저 집이 당신 집이오?”

 

브레몬은 옆에 있는 초가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주변은 서서히 활활 타올랐고 집도 그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당도했다.

브레몬이 실실 웃었다.

 

“이거 미안하군. 이 주변은 전부 초토화시키라는 상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군.”

“흥.”

 

노파는 병사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저 둘은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상태였다.

누가 살아 있는 송장이 하는 말을 듣는단 말인가?

 

‘어떻게 죽인담?’

 

어린아이가 잠자리를 갖고 노는 방법은 순수하고 잔인하다.

날아야만 살 수 있는 곤충의 날개를 떼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리를 없애고 꼬리를 아예 말아버리며 눈을 찌르는 놈들도 있다.

갖고 노는 방법의 중요한 점은 괴롭히는 흥미가 사라질 때까지 고통에 울부짖으며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가죽을 벗겨 본 지 꽤 오래됐군. 아니, 내 아지트를 망쳐놨으니 그정도도 약한가….’

 

노파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브레몬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조잡하고 경직된 움직임을 노파는 비웃으며 한 호흡에 간단히 피하고 브레몬의 가슴을 발로 차버렸다.

 

“억!”

“멍청한 놈. 내가 누군지 대강 밝혔을 터인데, 쯧쯧.”

 

브레몬은 내리막길을 굴러가듯 평지를 계속해서 굴러 나무에 막히고 기절했다.

그제서야 캄페스가 오른팔의 지혈을 마치고 노파와 브레몬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캄페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뒤에는 기절한 동료 병사,

고개 아래로는 꼬마 놈을 부둥켜 안은 여자아이 한 명,

그리고 자기보다 키가 작지만 마치 내려다보는 위압감을 주는 정체불명의 노파 한 명.

캄페스는 노파에게 생각이 닿자 그녀가 한 말이 단번에 떠올랐다.

 

‘전대 길드 마스터, 은퇴한 암살자, 늙은 여자…….’

 

“호,혹시 암살자 길드의 위넨 선생님 맞으십니까?”

“그래. 내가 맞다.”

 

‘좆됐다!’

 

노파가 자신의 말을 확인하자 캄페스는 전신에 힘이 빠졌다.

 

암살자 위넨.

음지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살아가던 암살자 길드를 양지로 끌어올리며 100년간 마스터 자리에서 길드를 이끈 명실상부한 대륙의 거대한 축 중 하나다.

모든 국가와 기관들은 위넨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동시에 절대로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기마대의 병사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그녀에게 대항한단 말인가?

그녀는 발길질 한 방으로 이미 브레몬을 손쉽게 제압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칼을 빼들어봤자 목숨만 단축할 뿐이다.

아니, 이미 죽은 목숨인가?

 

‘씨발 빨리 빌어야지, 뭔 대항할 생각을 하고 있냐!’

 

캄페스는 머리에 땅을 박으며 바짝 엎드렸다.

 

“위넨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저 얼빠진 새끼가 아지트를 멋대로 불태웠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렸습니다! 제발, 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위넨님! 부탁드립니다!”

“…….”

 

위넨은 캄페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춤 아래를 당기는 이리아를 바라봤다.

이리아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도 마를 정도로 차갑고 어두운 오오라가 흉흉히 피어올랐다.

이리아가 말했다.

 

“죽이지 말아요.”

“…어째서지?”

 

위넨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되물었다.

그 말을, 그 흉흉한 감정을 모두 담은 말을 이 아름답고 차가워진 여자 아이에게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리아가 울렁이는 감정을 끌어안고 말했다.

 

“당신이 저 사람을 죽이면… 내가 복수할 대상이 사라져요.”

 

‘클클클클… 클클클…’

 

위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상대를 향한 순수한 살의.

그것만큼 달콤하고 매혹적이며 치명적인 것은 없다.

위넨은 오랜 삶을 살면서 이미 그 감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방금, 그것을 손에 넣었다.

암살자로써 흥분되는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위넨은 일부러 시로가 고문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했다.

이 휼륭한 소녀는 위넨의 의도를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아가야, 너는 아직 약하다. 그 가냘픈 손목으로는 저 병사의 갑옷도 뚫을 수 없다. 근데 어떻게 죽인단 말이냐?”

 

위넨의 목소리는 한층 너그러워졌다.

이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강해질 거예요. 당신처럼.”

“뭣? 나처럼? 클클클클!”

 

위넨이 가래 끓는 웃음 소리를 냈다.

은퇴한 지 긴 시간이 지나 암살자의 허물도 점차 벗겨졌지만 이렇게까지 박장대소한 것은 자신을 팔아먹은 부모를 죽인 이후 아주 오랜만이었다.

 

마음에 든다.

이 소녀와 저 소년이.

 

‘하지만 쓸만한 건 소녀뿐이다.’

 

정신력과 인내심, 냉정한 판단력을 갖춘 건 저 소년이다.

오른팔만 잃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을 만큼 키울 자신이 있었다.

 

‘하필 팔을 잃다니, 쯧.’

 

한 호흡에 서로의 생사가 순간 뒤바뀌는게 암살자의 길이다.

미세한 호흡이 그럴 진데 한팔을 잃은 불균형은 아무리 그 사람의 재능이 천부적일지라도 결코 크게 될 수 없다.

위넨은 미련없이 소년을 포기했다.

대신 마음속에 냉혹한 검을 집어삼킨 소녀를 얻었다.

이것만 해도 늘그막에 좋은 선물을 받았다고 위넨은 생각했다.

 

“일어서라. 발레아 병사놈.”

 

위넨이 담담히 말하자 캄페스가 급히 일어섰다.

 

“예! 일어났습니다! 위넨님!”

“이 꼬마가 보이느냐?”

 

위넨이 이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이리아는 캄페스의 얼굴을 조목조목 눈에 담았다.

캄페스가 대답했다.

 

“예! 보입니다!”

“이 꼬마가, 언젠가 널 죽일 것이다.”

“…예?”

“지금은 살려주겠다는 말이다. 니 동료 데리고 썩 꺼져라. 지금 당장.”

“아, 예! 위넨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캄페스는 잘려버린 오른팔과 말 두 마리를 잃었으나 그것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살았다는 감사함을 느끼며 브레몬을 질질 끌고 헐레벌떡 달아났다.

위넨이 그 뒤꽁무니를 가리켰다.

 

“저것을 잘 봐라. 사람의 외모보다 걸어가고 뛰는 보폭이 그 사람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다.”

“…….”

 

이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캄페스의 모든 동작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 원한과 증오를 풀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에 나온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위넨은 고개를 끄덕이고 혼절한 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위독하군. 잘려진 팔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렀어. 고문도 심했건만, 용케 버텼군.’

 

아까운 감정이 샘솟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잠재웠다.

 

“이 꼬마는 이 근방 도시의 의원에 맡겨놓고 살려놓겠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

“이리아…입니다.”

 

병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리아가 답했다.

위넨이 말했다.

 

“이리아, 난 내 원칙과 철칙을 어기고 네 명을 죽일 것을, 네 명을 모두 살렸다. 이것은 내 변덕이 아니다. 모두 너를 위한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총명한 너라면 알 것이다.”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시로를 살려준 것은 제 몸이 부서져도 갚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이리아는 쓴 맛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말을 다하지 못했다.

위넨이 웃었다.

 

“내 제자가 된다면, 그것은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길은 무척이나 고되고, 목숨이 백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혹독하다. 웬만한 각오 없이는 은혜를 갚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내 제자가 될 것이냐?”

 

이리아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로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웃었다.

 

“예. 당신의, 아니, 스승님의 제자가 되겠어요. 그래야지… 시로를 지킬 수 있으니깐요. 누구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시로를 지킬 수 없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위넨은 시로를 들쳐업었다.

사람을 구하는 건 너무나도 이상한 기분이지만 시로를 살리지 않으면 이리아는…

 

망가질 것이다. 아직 그래선 안 된다. 아직은….

 

 

 

 

****

 

 

 

“…….”

 

시로는 낡은 여관의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볼품없는 커튼은 아침의 햇빛을 전혀 가로막아주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팔로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들어올리자 축축한 땀이 손에 묻어나왔다.

 

“또 그 꿈…….”

 

평화롭던 마을은 기습당했고, 발레아 왕국의 병사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불길 너머에서 괴로움에 찬 신음소리마저도 꿈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리아….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아니 살아 있는 거냐…?”

 

꿈에 나타난 소년은 깨어나자 20살이 된 청년이 됐다.

소꿉친구를 잃어버린 지 10년이 된 해였다.